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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영화창고

미국의 흑인 인권 운동 역사를 담백하게 담은 영화 '버틀러'

by 썬도그 2013.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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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젠하워에서 레이건 대통령까지 백악관에서 손님을 응대하는 백악관의 집사로 34년간 근무를 했던 흑인 세실 게이츠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가 '버틀러'입니다. 이 영화는 미국에서 개봉한 후에 무려 3주 연속 흥행 1위를 기록했지만 한국에서는 예술영화처럼 작게 개봉 했습니다. 보통 미국에서 3주 연속 전미 흥행 1위를 하면 국내에서도 100개관 이상 개봉해야 하지만 아주 작게 개봉한 모습이 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나니 그럴 수 밖에 없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이유는 '영화 버틀러'는 미국 흑인들의 역사와 흑인 인권사를 아주 담백하게 담은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의 흑인들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이 영화에 대한 재미나 감흥 등은 아주 크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영화 '버틀러'를 제대로 즐기려면 흑인 인권 운동 역사를 어느 정도 알고 보면 재미가 있습니다.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아야 하는 흑인들

영화는 주인공 세실 게인즈(포레스트 휘태커 분)의 어린 시절부터 보여줍니다. 세실은 남부 백인 농장에서 목화를 따고 있습니다. 남북전쟁이 끝난 후에 노예 제도는 사라졌지만 실질적으로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와 함께 목화 밭에서 목화를 따던 세실은 어머니가 백인 농장 주인의 손에 이끌려서 헛간으로 가는 모습에 분노를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세실을 막습니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존재들이야!라고 가르치는 세실의 아버지.  아버지는 헛간에서 나오는 백인 농장주에게 말을 겁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아버지를 향한 총구였습니다. 그렇게 백인 농장 주인의 총에 맞아서 아버지가 사망합니다. 

이 모습을 본 백인 농장주 어머니는 아버지의 죽음을 눈 앞에서 본 세실을 '하우스 니그로'일을 시킵니다. 집안에서 음식 시중을 하는 편한 일로 바꾸어주죠. 그렇게 세실은 음식 시중을 돕는 '하우스 니그로'로 성장하고 나이가 차서 큰 세상으로 나갑니다. 그러다 워싱턴에 가게 되고 세실의 성실함과 인품을 눈여겨본 정치인에 의해 백악관의 버틀러로 들어갑니다. 

영화 '버틀러'는 백악관에서 무려 8명의 대통령을 모신 백악관 집사의 성실함과 직업정신을 담은 영화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상했던 그 이야기가 주가 아닙니다. 이 영화의 주된 이야기는 미국 흑인의 역사, 특히 흑인 인권 운동의 역사를 버틀러를 통해서 투영하고 있습니다 


순종의 상징 버틀러

버틀러가 갖추어야 할 기본 마음가짐이자 행동은 순종입니다. 백인들의 시선으로 생각하고 백인들의 마음을 읽어내서 한 치의 불편함도 없게 해야 합니다. 백악관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은 비밀이며 들어도 못 들은 척, 봐도 못 본 척을 해야 합니다. 

세실의 아버지가 세실에게 말했듯 세상의 주인은 백인이고 그 백인이 주인인 세상에서 살아 남으려면 순종해야 합니다. 세실은 어려서부터 이 백인이 만든 세상에 잘 길들여졌고 그런 세상을 있는 그대로 흡수합니다. 그게 자신의 삶으로 생각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버틀러로써는 최고의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항의 상징 '장남'

 그러나 세실의 장남은 아버지의 삶의 방식을 다르게 삽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처럼 세상에 순종을 하지만 장남은 흑인 인권 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듭니다. 대학도 일부러 흑인들이 핍박을 받고 있는 남부에 있는 대학교를 다니면서 조직적으로 유색인종 정책을 정면으로 거부합니다. 남부에서 '자유 라이더 '운동을 벌이다가 KKK단을 만나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시위를 하다가 수시로 감옥에 갈 정도로 아주 극렬하게 흑인 인권 운동을 합니다.

영화는 아버지인 세실의 순종적인 삶의 방식과 장남의 저항하는 삶이 영화 내내 흐릅니다. 결국은 부자간의 큰 다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흑인 인권 운동 역사를 연대기 순으로 보여주는 영화 '버틀러'

위에서도 말했듯이 영화 버틀러는 '투철한 직업정신'에 대한 이야기가 주인공이 아닙니다. 그건 하나의 조연 역할을 할 뿐이고 주연은 흑인 인권 운동입니다. 따라서 흑인 인권 운동 역사를 좀 살펴보고 보면 더 많은 것이 보이고 느껴질 것입니다. 

지금도 미국에서 흑인들이 백인에 비해서 차별 대우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1960년대 이전에는 남아공의 인종차별 정책처럼 백인과 흑인에 대한 차별이 엄청나게 심했습니다. 특히 남부 지역에서는 위 사진처럼 수도꼭지도 백인용, 유색인종용이 따로 있었고 버스에서도 백인 좌석과 흑인 좌석이 따로 있었습니다. 하물며 같이 학교도 다니지 못했습니다. 


영화 버틀러에서도 나온 위 사진은 1957년 흑인 여학생인 도로시 가운츠가 일반고등학교에 입학을 합니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인종차별 철폐정책을 펼쳤기 때문입니다. 법은 바뀌었으나 사람들의 마음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흑인 여학생이 등교하자 백인들이 뒤 따르면서 이 여학생을 괴롭힙니다. 


위 사진은 두 미국 흑인 선수가 육상 200미터 경기에서 금메달과 동메달을 딴 후에 한 손을 올리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진입니다. 1968년 멕시코 하계 올림픽 육상 시상식 장면인데요. 위 사진은 흑인 인권 운동의 상징 제스쳐입니다. 이 제스쳐를 취한 이유로 IOC는 정치적인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올림픽 메달은 박탈 당했습니다.  

이렇게 바로 몇십년 전만 해도 이런 몰상식한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던 곳이 미국입니다. 대통령이 아무리 인종차별 하지 말라고 해도 사람들의 마음이 쉽게 바뀌지는 않습니다. 말콤X와 같은 흑인 인권 운동의 강경파가 나오기도 하고 마틴 루터킹 목사처럼 온건파가 나오기도 하면서 흑인 인권 운동은 얻어 맞으면서 계속 전진을 합니다.



조금씩 전진하는 흑인 인권 향상을 지켜보는 버틀러

이런 흑인들의 인권 운동을 버틀러라는 백악관 흑인 집사를 통해서 영화는 그 흑인 인권 역사를 건조하게 담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은 흑인 인권 운동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자유 라이더' 버스가 KKK단에 의해 불태워지는 모습에 분노 하면서 흑인 인권 향상에 큰 도움을 줍니다. 

영화는 8명의 대통령을 보여주면서 그들이 조금씩 조금씩 흑인 인권에 대한 전진을 하는 모습을 조금씩 느리게 담고 있습니다. 큰 사건 사고를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영화는 모든 과거의 사건 사고를 화질이 좋지 않은 실제 영상물로 대신 합니다. 조금씩 조금씩 한 걸음씩 나아가는 흑인 인권 운동을 지켜보고 있으려니 조금은 지루하기도 합니다. 

영화 중반까지는 좀 따분한 느낌도 많이 듭니다. 사건, 사고를 과거 영상으로만 처리하고 큰 사건 사고가 있지도 않습니다. 중반까지는 버틀러와 장남의 반목과 갈등만이 크게 부각 될 뿐입니다. 아버지인 세실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듯 살지 않는 철없어 보이는 장남 때문에 속이 시커멓게 타버립니다. 이런 부자 간의 갈등이 좀 더 자극적이어서 시선은 그쪽으로 자꾸 쏠립니다. 반면, 백악관 안에서의 버틀러의 삶은 순종 그 자체라서 크게 눈에 들어오는 모습은 없습니다. 

다만, 이런 것은 있습니다. 아이젠하워나 케네디나 수 많은 대통령이 하나된 미국을 외치면서 흑인도 미국인이기 때문에 함께 가야 한다고 외치지만 정작 변화를 외치는 백악관의 버틀러 대부분은 흑인입니다. 또한, 같은 일을 해도 흑인은 월급이 백인 집사 보다 적습니다. 아주 이율배반적이죠. 뭐 대통령들이 월급을 얼마나 받는지 알 수 없었다고 해도 레이건 대통령 같은 경우는 흑인 버틀러(집사)의 처우에 대한 관심을 가지면서도 남아공 인종차별정책을 반대하지 않는 모습등을 보여주면서 정치인들의 허튼 모습을 살짝 보여줍니다. 


흑인들의 저항의 역사가 있었기에 현재의 흑인 대통령이 나올 수 있었다

버틀러는 기교가 없는 영화입니다. 화려한 편집술과 풍부한 시각 효과를 다 배제했습니다. 비슷한 영화라고 할 수 있는 포레스트 검프가 허구와 실제 역사를 적절하게 버무리면서 뛰어난 시각 효과를 썼던 것과 달리 이 영화 버틀러는 지나칠 정도로 백악관과 세실의 집만 보여줍니다. 이러다보니 상당히 지루한 영상의 연속이고 흑인 인권에 관심이 전혀 없는 분들은 이 영화 권할 수 없을 정도로 따분하기도 합니다. 

이런 약점을 배우들이 막아내고 있습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연기한 로빈 윌리암스나 닉슨 대통령을 연기한 '존 쿠삭' 등의 다른 영화의 주연급 배우들이 까메오급으로 출연 합니다. 특히 레이건 대통령은 깜짝 놀랄 배우가 나옵니다. 여기에 20년만이라고 했던가요. 오랜만에 연기를 한 토크쇼의 여왕인 '오프라 윈프리'의 연기도 볼 수 있습니다. 

중간에 딱 한 번 시계를 봤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후반에 진한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버틀러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 시작하면서 가슴 속에서 조금씩 눈물이 흐르더군요. 버틀러의 삶도 삶이지만 미국에서 흑인들의 삶을 보면서 분노감이 조금씩 흐르더군요. 

솔직히 전 흑인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백인을 좋아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익숙하지 않음에서 오는 흑인에 대한 거부감이 있습니다. 이런 편견은 흑인 친구를 사귀면 사라지겠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 같기에 이런 인종에 대한 편견은 조금은 가지고 평생 살 듯 합니다. 하지만 제가 이 영화에서 미국에서 고통 받는 흑인들을 보면서 분노하고 눈물을 흘린 이유는 그들의 지난 삶이 너무나도 기구했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짐승처럼 끌려와서는 백인 주인에게 반항 한 번 하지 못하고 죽어갔던 수 많은 흑인들의 지난 역사에 대한 분노심과 연민이 절 흔들어 놓네요. 버틀러가 순종적인 삶을 버리고 조금씩 변하가는 그 과정이 너무나도 아름답고 눈물 겹습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모든 흑인들이 그토록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면서 끝이 납니다. 


수 많은 저항의 시간이 모여서 세상을 변화 시킨다

사람이 쉽게 바뀌지 않듯이 세상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민주주의의 교과서라고 하는 미국이라는 나라도 몇십년 전만 해도 인종차별이 만연했던 인권 후진국이었습니다. 수 많은 흑인들이 저항하고 부딪히고 싸웠기에 조금씩 조금씩 흑인에 대한 시선은 바뀌었습니다. 정부가 인종차별 하지 말라고 계몽을 해도 쉽게 계몽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소수의 흑인을 감싸려면 소수의 백인들이 나서야 합니다. 그리고 그 소수가 다수가 되어야하죠. 

지금은 인종차별을 하거나 인종에 대한 모독을 하면 사회적으로 매장되는 미국 사회가 되었기에 함부로 인종차별을 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아직도 인종차별이 존재하는 것이 미국입니다. 이 영화 버틀러가 흥행에 크게 성공한 이유 중에 하나가 이 영화를 개봉하기 전인 지난 8월 플로리다 주에서 한 소년이 비무장 상태에서 백인 청년에게 총을 맞고 죽었습니다. 이 사건에 미국 법원은 이 백인 청년을 무죄 판결을 내립니다. 이후에 흑인들은 대규모 시위를 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9월 버틀러가 상영 되었습니다. 

인종차별 사건이 일어난 후에 개봉한 이 영화는 그 시위의 물결처럼 큰 흥행에 성공을 했습니다. 버틀러를 상영하는 영화관에서는 흑인들의 눈물이 가득했다고 하죠. 그들의 고통의 눈물이 태평양 너머 저에게까지 전달이 되네요. 

수십년이 넘는 저항의 시간이 있어야 세상이 변합니다. 이 긴 흑인들의 저항의 시간을 보고 있노라니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를 돌아보게 되네요. 과연 우리는 얼마나 민주주의를 위해 저항을 했을까? 과연 우리는 민주주의를 얻을 자격이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동시에 듭니다.  영화 '버틀러'는 헛점이 많은 영화입니다. 단순함이 지루함으로 보여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영화를 추천하는 이유는 한국 사회에서 흑인처럼 살아가는 소수자들의 고통이 이 영화를 통해서 보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소수자들의 인권을 투영할 수 있는 좋은 영화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대사처럼 Yes! We Can Do입니다. 끊임 없이 저항하다보면 세상은 변화 합니다. 

별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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