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명물이 된 사진공간 배다리와 6개의 갤러리가 모여서 사진전을 합니다. 아래 글은 사진공간 배다리에서 가져온 글로 그냥 복사해서 소개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고 빠를 것 같아서 긁어서 붙였습니다. 조만간 제가 직접 가서 어떤 사진전인지 사진으로 담아온 후 다시 소개 하겠지만 이미 전시회가 진행되고 있어서 급한 김에 이렇게 소개 합니다.
출처는 : http://uram54.com/current/1341 입니다.
2013 사진공간 배다리 프로젝트 ‘폐허 속에서 발견된 오브제’展
폐허 속에서 발견된 오브제 Object Found in Ruins
2013년 8월 16일 ▶ 8월 28일
초대일시 2013. 8. 16(금) 오후 6시 30분
관람시간 오후 1시 ~ 오후 6시 30분 (매주 목요일 휴무)
슬라이드 쇼 상영 8.16 (금) ~ 17(토) 오후 8시~9시
전시장소 사진공간 배다리, 스페이스 빔, 한 점 갤러리, 띠 갤러리, 아벨 전시관, 배다리 모닝글로리(빈 사무실 임대)
참여작가 (40명)
구제철, 권영오, 김기래, 김승혜, 김준성, 김태은, 김홍기 김화성, 노기훈, 박균열, 성대석, 성희진, 신경옥, 신동헌, 신문식, 신운섭, 심춘환, 안우동,유광식, 유덕기, 유운선, 유진성, 이동주, 이문호, 이상봉, 이수연, 이연실, 이연옥, 이윤도, 이재훈, 이주형, 이형교, 이호진, 이희연, 장덕윤, 장수선, 정은진, 조인식, 천호선, 황태경
큐레이터 이혜진
디렉터 이영욱
총감독 이상봉
주최 사진공간 배다리
후원 인천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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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자의 글>
프로젝트 기획자: 이영욱
사라지는 모든 것은 흔적을 남긴다.
문제는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무엇이 남는가 이다.
사라짐의 정지, 흔적을 남기는 사진. 모든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숭배자로서의 사진가에게는 폐허만큼 좋은 소재도 없다. 폐허된 현장은 마치 사진가들의 성지순례장소처럼 보인다. 사진가들은 이제까지 그 많은 재개발현장을 어김없이 배회해왔다. 그리고 폐허는 순례자로서의 사진가가 접신(接神)을 하도록 만들었다.
사진의 생생함은 폐허를 더 폐허답게 만든다. 이는 죽은 것을 되살리는 역설이다. 사진의 세계는 사라진 것들을 유령처럼 되살린다. 그것은 진저리처지는 리얼(real)이 된다. 죽어야 할 것들이 되살아나는 실재없는 현존의‘날것’이다. 폐허이미지에서 대개의 사진가들이 포착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사라지는 흔적의 미학이다. 폐허현장은 사진가의 미학적 코드와 결합한 시대의 사건으로서 기록의 욕망을 부추긴다.
본 전시는 뉴타운 건설에 직면한 인천의 재개발지역에 주목했다. 경제개발논리로 사라질 철거현장과 폐허된 풍경에의 관심은 사진가들로 하여금 각자의 오브제를 발견하게 했다. 버려진 혹은 남겨진 오브제를 발견한 사진가의 시선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사진가들은 우리가 너무나 쉽고 빠르게 옛 모습을 잊어가는 건 아닌지 묻고 있다. 저 건물들, 한 때에는 세련된 건축 양식으로 그 모습을 얼마나 뽐내었던가!
사진은 온기 가득했던 집이라는 공간에서 자라난 ‘나’로 하여금 사라지는 공동체, 존재가 망각되는 현장을 목도하게 만든다. 멸족하는 나를 기억해주는 연결고리와 토대가 되는 역사책 같은 과거가 무너진다. 시대마다 언제나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이 있다. 인정한다. 그러나‘나’라는 존재의 흔적조차 부정하는 획일적 개발의 논리는 미아(迷兒)가 되는 죽음과 상당한 연결고리가 있다.
여기 이 사진 속 풍경들은 이제 현실에 없다. 글을 쓰는 지금, 이미 사라져버린 뒤일 것이다. 현실의 폐허는 개발에 떠밀려 깨끗이 치워졌다.사진 속의 그 곳, 그 사물들은 이제 더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진짜 폐허는 사라졌다. 그런 점에서 <폐허 속에서 발견된 오브제>전의 사진들은 마치 가상의 이미지 같다. 불길함과 슬픔의 감정을 끌어내는 이 풍경은 결국 유령을 불러들인 것이 틀림없다.
폐허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사진에 담긴 인천 재개발현장, 그곳이 폐허로 변한 까닭은 시간의 경과에 따른 자연스러운 소멸 때문일까. 이 물음은 단지 낡은 과거의 것은 일단 없애버려야 한다는 왜곡된 개발론에 관한 단순한 비판이 아니다.
고대로부터 이어진 폐허의 유적은 삶의 흔적으로 보존되지만, 현대도시의 폐허는 결코 그런 식으로 남겨지지 않는다. 현대적 재개발현장은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여 진행된 노화가 아닌 일순간에 행사된 인공적 폭력의 결과, 즉 파괴의 산물이다. 오늘날 빈번히 목격되는 수많은 폐허의 사진이미지들은 자본의 폭력 앞에서 무능력한 주체, 사그라진 삶의 터전에 대한 슬픔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폐허의 사진이미지에서 우리가 읽어야 할 것이 과연 노스탤지어에 빠진 주체의 무기력함뿐일까?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폐허 속에서 비로소 그 도시가 꿈꾸었던 그 꿈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의 이 꿈 역시 시대가 부른 것이다. 전시는 새 것에서는 찾아낼 수 없는 도시의 은폐된 욕망들이, 폐허의‘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채워지고 있음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 욕망에는 모든 것이 다시 폐허로 돌변할 수 있다는 불안 역시 내재되어 있음을 직시한다. 다시 말해, 지금의 폐허된 대상은 언제든 우리의 삶 또한 폐허로 돌변할지 모른다는 불안을 상기시킨다는 것이다.
현대도시는 희망찬 미래라는 착각 속에 새로운 건축을 통해 스스로를 파괴하며 존재하는 속성이 있다. 그렇게 또 다른 폐허가 중첩된다. 인천의 뉴타운 프로젝트도, 새로운 건축도, 개발논리의 힘의 잣대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는 없다. 도시의 건축은 일회용품처럼 소비되며 늘 폐허될 운명 앞에 있다. 결국 우리가 이 도시에서 꾸는 꿈은 늘 폐허의 불안 속에 존재한다.
자기 투사 이미지
사진은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미지와 같다. 우리는 작가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금세 대상 속으로 몰입한다. 하지만 그 몰입은 어디까지나 대상에 반사된 자기투사 이미지에 불과하다. 사진이라는 거울이미지에 자신을 투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진은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우리가 살고 있고 또 살았던 공간들이 폐허된 현장에서, 스스로‘나’에 관한 물음을 던지도록 만든다. 이는 달리 말해, 작가는 대상을 보여주는 일에 전적으로 책임질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만 작가는 통제불가능상태의 어떤 모습(의도하지 않은 대상의 흔적)이 카메라 앞에 노출 되게끔 입장을 취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아래 본 프로젝트의 참여작가들은 사진예술가의 입장이 아닌 사건현장을 방문한 탐험가, 수사관, 고고학자와 같은 입장을 취해보기를 제안 받았다. 기획자는 그로 인해 통제되지 않는 형상의 범위들까지 가시화되기를 바랐다. 이를테면 평소에는 간과해온 건축물의 양식, 버려진 물건의 특이성, 다양한 모습으로 폐허화된 현장과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취향, 삶의 세부흔적까지 포착될 수 있도록 말이다.
사진이미지는 관객이 사적인 환경에 스스로를 몰입하게 한다. 바로 이 점에서 사진은 대상의 역할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본 프로젝트는 어디까지나 폐허현장의 대상에 속하며, 이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사진을 사용한다. 사진은 일차적으로 이미지이지만 한편으로는 현실을 포착한 일종의 오브제와 같다. 오브제의 개념을 어디에 둘 것인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전시의 포커스는 사진가 각자에 의해 발견된 폐허 속 대상이 사진매체와 어떻게 접촉하고 또 어떻게 전시라는 형식과 연결되는지에 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전시배치를 통해 그 의미가 생산되고 보여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진 속 무언가를 결코 다 보지는 못한다. 세부적인 대상들은 내 의도에 따라 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나에게만 포착돼 드러나는 것이다. 그것은 말로는 표현 불가능한 무엇에 대한 흔적이다. 사진은 다시 오지 않는 부재를, 오직 한 번‘현존’했던 무엇을 증명한다. 그리고 그 부재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무언가를 증명한다.
정확히 부분적인 세부들은 징후다
그래서 사진이미지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대단히 가식적이다. 그것은 피사체가 어떤 포즈를 취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사물은 특정한 주체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한 것을 느끼자마자, 의미의 빛 속에서 포즈를 취한다. 여기서 사진의 근본적인 멜랑콜리가 발생한다.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을 것만 같은 아파트 귀퉁이 화단이 무너지고, 정원수가 뽑힌다. 도대체 이 도시에는 무슨 일이 있었기에? 빈집에 누가 들어왔음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벽지가 뜯겨지고 기물들이 파손될 수 있는가. 버려진 것들은 헐리고 사라질 운명. 애정결핍에 몸서리친다. 강제로 들이닥친‘집달관’처럼 쓰레기는 방안에 산더미이다. 사람이 떠난 자리에 풀들이 움직인다. 폐허 속에 방치된 건물들은 주인 잃은 짐승처럼 금세 늙어버렸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어도, 폐허된 현장은 처참한 전쟁을 치렀다.
그런데 폐허의 사진을 볼 때 이 모든 것은 나와는 무관한 일처럼, 그저 감상의 차원에 머물게 된다. 틀림없는 초 현실이다. 차라리 그것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이렇듯 폐허를 간증하는 사진들은 그 속성상 ‘한 때 존재했었다’는 증거를 확보하지만, 그곳이 폐허가 된 정확한 원인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폐허사진이 주는 심미적 효과에 주목 할 수밖에 없다.
사진에서 폐허의 미학은 멜랑콜리 환상에 의해 매혹되나 계속해서 대답 없는 질문을 한다. ‘모든 것은 사라지게 되어 있는가?’아니면 더 정확하게, ‘모든 것은 이미 사라지지 않았던가?’ 어떻게 마을전체가 송두리째 굴복하고, 사라지게 되는가? 그리고 어째서 세상은 이러한 붕괴에 그토록 취약할 수 있으며, 사라짐에 쉽게 매혹되는가?
뒤이은 질문도 있다. 폐허의 사진이 주는 매혹이 대수롭지 않은 사건들로 치부되는 이유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로부터 다시 진정 신비로운 질문이 솟아난다. 이런 폐허의 사진, 정확히는 현실이 아니라 이미지에 불과한 사진을 통해 어떻게 시대를 고발 할 수 있는가? 우리는 폐허의 이미지를 통해 나 없이도 지속될 세상에 대한 깊고 오랜 환상을 품어오지 않았는가. 인간을 떠난 세상, 너무나 인간적인 의지에서 벗어난 세상, 우리가 없는 그 세상을 보고자 하는 유혹을 느껴오지 않았는가. 사진이 주는 강렬한 쾌감은 현실감에 대한 물질성 즉, 언어의 해석 속에서 의미를 통과하지 않고 그 자체로 기능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 바로 그것에 우리는 매혹된다.
똑바로 볼 수만 있다면!
폐허사진 속에는 절대 사라질 수 없는 무엇이 있다. 우리는 이것을 똑바로 보아야 한다. 사라질 수 없는 것은 사라져 없어지는 대신 다른 영역으로 들어간다. 바로 개발논리의 환상, 판타스마고리(Phantasmagoria) 속으로. 그로부터 깨어나기 위해 우리는 도시가 과거에 꾸었던 꿈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를 폐허 속에서 발견된 오브제에 투사하여 되돌아 볼 때에만 비로소 그 꿈이 어떻게 변질되었고, 또 무엇 때문에 악몽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는가를 깨달을 수 있다.
폐허의 이미지는 우울한 감정을 동반하는 한편 미래에 대한 환상을 부추긴다. 그러나 의미론적으로 ‘말’이 없는 사진을 통해서는 폐허의 원인을 정확히 규명할 수가 없다. 다시 말해 우리는 사진을 보면서도 잘 보지 못하며, 때문에 폐허의 이미지에 현혹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어쩌면 우리가 사진에서 읽어내야 하는 것은 ‘똑같은 것이 영원히 되돌아온다’는 니체의 영혼회귀일 것이다. 도시개발의 논리에 의해 옛 것이 사라지고 새롭고 편리한 문화가 제공된다는 환상은 폐허 된 과거 도시의 집들이 세워질 때에 역시 기대되었던 바이다.
내 삶의 흔적을 밀어낸 개발이 더욱 세련되고 좋은 것만 만들어 줄 것이라는 환상, 이것이 판타스마고리의 주문이다. 허황된 꿈에서 깨어날 수 있는가? 우리가 그 주문의 경계 안에 있는 한 탈출은 불가능하다. 탈출을 위해서는 기억이 필요하다. 그리고 기억이란, 나를 응시하는 사진으로부터 되돌아오는 시선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현대의 도시는 끊임없는 생산과 동시에 폐허를 만드는 시대다. 새로이 만들어진 상품들은 채 다 쓰이기도 전에 또 다른 상품에 의해 폐기당하며, 새로운 건축물 또한 머지않아 그와 같은 용도 폐기의 운명을 안고 있다. 언뜻 발전을 거듭해 나아가는 시대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일종의 신화이며, 반복적 욕망의 환상인 것이다. 이에 순응한다면 우리는 그 대가로 현실공간에서 자신의 삶의 흔적을 포기하고, 지워내야만 한다.
판타스마고리의 주문으로부터 빠져 나오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이 주문의 영향 아래에서 맴돌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폐허사진 속 공간에 자신을 투사하고 그것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다면, 이 주문으로부터 탈출하기에 좋은 부적 하나를 얻게 되는 셈이다. 내 기억의 흔적을 깡그리 지우고 꿈을 담보물 삼아 미래에 대한 허황된 환상을 투사할 것인지, 욕망의 투사일 뿐인 마술적 환상의 주문으로부터 깨어날 것인지는 전적으로 관객의 몫에 달렸다.
<큐레이터의 글>
큐레이터 이혜진
지금 인천은 ‘재개발’ 중이다. 오랜 거주자들이 떠난 자리는 폐허가 되거나 허물어졌고, 그 땅은 이제 새로운 주인을 맞을 준비를 한다. 인천문화재단 지원으로 이뤄지는 ‘폐허 속에서 발견된 오브제’展은 그렇게 사라져가는 시절의 흔적을 발견하고 또 보존하는 아카이브 프로젝트이다. 다시 말해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말이 없는 대상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관상학적 독해의 일환인 것이며, 이는 곧 본 전시의 목적이기도 하다.
4개월에 걸친 답사 및 촬영을 통해 작가들은 각기 다른 관점과 접근 방식으로 인천의 재개발 지역을 담아냈다. 가족이 떠나버린 거실에 뒹구는 그릇에서부터 입주자가 없어 텅 빈 신도시의 최첨단 아파트까지. 인천의 변해가는 모습을 담아내는 이들의 방식은 모두 다르지만, 폐허 속에서 잠시 멈춰버린 삶의 흐름과 그 경계를 들여다보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하나의 커다란 궤를 이룬다.
전시는 특정한 공간에 국한되지 않고 인천 배다리 지역의 전반에 걸쳐 이루어진다. 배다리 헌책방 거리를 중심으로 열릴 ‘폐허 속에서 발견된 오브제’展은 사진공간 배다리, 대안미술공간 스페이스 빔과 더불어 한점 갤러리와 띠 갤러리, 그리고 아벨 전시관을 거점으로 하는 열린 전시이다.
또한 헌책방 거리 내의 빈 건물 중 한 곳을 대여, 전시공간으로 연출함으로써 폐허에 관한 또 하나의 탐구를 시도한다. 이로써 관객은 갤러리 안에 전시된 사진 작업 뿐 아니라 오래도록 인천을 지켜온 거리와 그곳의 분위기를 함께 체험하며 인천이라는 도시, 그리고 오늘날 이 도시가 들려주는 여러 이야기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프로젝트는 2주간의 본 전시 외에도 약 4개월 간 총 네 차례의 워크숍을 통해 참여 작가 진의 작업 진행 상황을 공유한 바 있다. 그리고 지난 5월에는 인천 서구 가정동 재개발 지구에서 한 차례의 단체 촬영을 진행하였다. 또한 참여 작가의 상당수가 현재 인천에 거주하고 있어, 이들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인천 지역 커뮤니티와의 소통 또한 이루어질 수 있었다.
본 전시에는 이미 수차례의 전시를 열며 활동해온 전문작가 10여명과 더불어 사진 아카데미, 인천현대사진포럼 활동 등을 통해 작업해온 30여명이 함께 참여했다. 이와 같은 구성으로 ‘폐허 속에서 발견된 오브제’展은 기존의 프로와 아마추어라는 구분에서 벗어나 사진예술이 담아낼 수 있는 외연의 확대를 꾀하였다.
이형교, 숙골로, 디지털 프린트, 80 X 120cm, 2013
임기성, 빈집, 디지털 프린트, 80 X 120cm, 2013
장덕윤, 공기, 디지털 프린트, 80 X 120cm, 2013.
장수선, 가정동, 디지털 프린트, 80 X 120cm, 2013
조인식, 멈추어 버린 시간_달력 사본, 디지털 프린트, 80 X 120cm, 2013
천호선, 인천, 디지털 프린트, 80 X 120cm, 2013
권영오, 배다리 중앙시장, 디지털 프린트, 80 X 120cm, 2013
박균열, 무연고-비누- 디지털 프린트, 60 X 120cm, 2013
성대석, 인천, 디지털 프린트, 80 X 120cm, 2013
신문식, 꽃, 디지털 프린트, 80 X 120cm, 2013
안우동, 가정동, 디지털 프린트, 80 X 120cm, 2013.
유운선, 신발, 동춘동, 디지털 프린트, 90 X 100cm, 2013
이연실, 보내기, 디지털 프린트, 80 X 120cm, 2013
이재훈, 동막골, 디지털 프린트, 80 X 120cm,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