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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권력이다

'소셜네트워크 속의 나'와 '현실의 나'의 차이가 클수록 고통스럽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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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네트워크 속의 나'와 '현실의 나'의 차이가 클수록 고통스럽다

썬도그 2013. 1. 9. 19:35


나는 3개의 이미지로 나뉘어진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라는 우스개 문장이 있지만 이 문장에는 근본적인 질문을 우리에게 하고 있습니다.  그 근본적이고
누구나 한 번 이상은 해봤을 나란 누구인가? 라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질문입니다. 

나는 누구일까요?
라는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나와 나를 아는 사람들이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라는 것은 하나의 이미지라고 생각됩니다. 외형적 이미지를 포함한 하나의 이미지의 형태로 존재합니다.

이 나라는 이미지는 3가지 형태로 존재합니다
내가 바라보는 나, 남이 바라보는 나, 그리고 진짜 나의 모습으로 존재합니다

내가 바라보거나 생각하는 나와 남이 바라보거나 생각하는 나의 이미지가 같을 수는 없습니다. 개인마다 그 간극이 다를 뿐, 남이 나를 바라보는 나의 모습과 내가 나를 바라보는 모습은 다른 모습으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간극을 줄이기 위해 가끔 혹은 자주 "나 어떻게 생각해?"라는 질문으로 나와 남이 바라보는 내 이미지의 간극을 체크합니다. 체크한 후 그 간극을 줄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는 가 하면 간극을 방치해 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바라보는 나는 가장 범위가 넓습니다. 그 이유는 감정의 진폭와 진자운동이 가장 심한 곳이 나라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잘나보이고 우쭐거러 보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자기를 파괴할 정도로 모멸차게 자신을 바라보기도 합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주인공 '신지'는 내가 바라보는 나를 아주 혐오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파괴적인 모습을 보여주죠. 반면 붉은머리 소녀 '아스카'는 남이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삶의 에너지를 받습니다.

아스카 최고다! 멋지다! 라는 칭찬의 말을 듣기 위해서 에반게리온에 타서 사도와 싸움을 합니다. 아스카는 외부의 시선을 극도로 잘 활용하고 그게 삶의 활력이 됩니다. 반면 '신지'는 반대로 남들이 어떻게 볼까? 두려워하기만 합니다. 자신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자신만의 보호막을 치고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보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웅크리고만 있습니다

어떠신가요? 내가 바라보는 나와 남이 바라보는 나의 간극이 심하신가요? 아님 비슷한가요?
저는 조용하고 사려깊고 차분하고 이성적이고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으로 제 이미지를 생각하고 있지만 술자리에서 지나가는 말로 나를 어떻게 생각하냐는 말에 제 이런 이미지와 비슷한 대답을 해주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쾌활하고 유머러스하다고 하는 친구도 있습니다.  다행히(?) 대부분은 내가 원하고 내가 추구하고 내가 나를 바라보는 이미지와 친구들이 저를 바라보는 이미지가 비슷합니다. 하지만 반대인 경우는 고민이 되죠. 

예를 들어서 난 차분하고 조용하고 미술관이나 사진관에서 사진관람을 좋아하고 영화 보고 난 후 폭풍 수다를 좋아하는 문학소년 같은 나를 나는 좋아하지만 친구들은 그런 나의 모습을 지루하고 고리타분하고 딴전을 피운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실제로 저는 대학교에 가서 성격이 바뀌었다고 느낄 정도로  아주 쾌활하고 뭐든지 솔선수범하고 나서기를 좋아하고 술자리 분위기를 이끌는 등 상당히 쾌활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가장 충격적이였던 것은  짝사랑 하던 동아리 여자동기가 "너는 참 활달하고 쾌할한 것 같아"
그 말에 갸우뚱거렸습니다. 이게 남이 보는 내 모습일까? 하지만 전 그런 이미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행동을 하는 이유는 단지 분위기가 침울한 술자리나 모임이 있으면 그게 마치 내 책임인양 생각하는 망상 때문이고 어쩌면 내성적이고 자기 학대적인 성격의 반발심에 서 억지로 끌어낸 가짜 이미지였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하는 생각도 하지만 지금 그 시절 동아리 동기들을 만나면 그때의 내 쾌활했던 이미지가 좋았다면서  "어렸을 땐 참 예뻤는데"라고 하는 어른 들의 말을 합니다.

그러면 저는 남들이 원하는 즉, 친구들이 원하는 그 쾌활한 이미지로 계속 살아야 할까요? 사실 전 그 이미지로 사는 것은 제 성격이 아니였기에 남들은 즐거웠을지 몰라도 내가 바라보고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이 아니였기에 즐겁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내가 원하는 내 모습과 남이 원하는 내 모습이 다를 때, 특히 그 차이가 클 때 우리는 고통스러워 합니다. 
뭐, 한국에서 사회생활 하다보면 하기 싫은 것을 참 많이 하고 10개의 성격을 가지고 살아야 할 정도로 자기를 포장하고 남의 비유에 잘 맞추는 카멜레온 같은 사람들이 되어야 해서 변신의 귀재들이고 자신을 속이는 행동을 처자식 때문에 수시로 해야 하기에 내가 원하는 나와 남이 원하는 나에서 매일 같이 갈등을 하면서 삽니다.

그러니 맨날 상사 앞에서 상사 맞춤형 이미지로 살다가 상사가 없거나 퇴근하면서 그 스트레스를 술과 담배에 푸는 것은 아닐까요?


신지는 이런 모습에 아주 괴로워 했습니다. 신지는 자신이 바라는 모습이 뭔지도 몰랐고 그냥 아버지가 날 사랑해주길 바라거나 타인들이 자신에게 요구하는 이미지에 힘을 얻는 아주 수동적인 인간으로 나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신지와 같은 삶을 좋게 보이지는 않네요. 그런식으로 남이 원하는 이미지대로 산다면 그게 진짜 행복하고 재미있을까요? 다만 신지 같이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도 없는 사람이라면 타인이 요구하는 이미지 혹은 바라보는 그 이미지에 맞춰 사면서 행복을 느끼는 분들이라면 남이 원하는 이미지대로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자아가 형성 안된 10대 때 이야기이고 20대가 넘어가면 어느정도 자아 형성이 되었기에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가 다 있기에 신지와 같은 삶을 사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에반게리온에서 신지는 14살 10대로 나오나 봅니다. 어른이 보는 신지는 찌질이지만 10대들은 다 그런 자아형성이 안되서 겪는 사춘기가 있고 그 고통의 시간이 지난 후에 자아라는 옹이가 생기는 것이겠죠. 그러나 우리 부모님들이나 어른들은 어린 10대에게 이렇게 되었으면 한다는 보편적인 표준형 인강형 이미지를 강요하고 있고 이 보편적이고 표준적이고 순종적인 이미지를 착하다라는 말로 포장해서 부축입니다. 하지만 모든 10대들이 그 이미지와 싱크로율을 맞출 수 없고 그 차이 즉 내가 원하는 이미지와 부모나 어른들이 바라는 이미지가 심한 차이를 날 때 10대들은 일탈을 하고 폭주를 하게 됩니다. 



가상 세계인 'SNS와 게임속 나'와 '현실의 나'의 차이가 클수록 괴리감도 크다

소셜네트워크에서 ‘나’는 누구인가? by 한상기

라는 글에 영향을 받아서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소셜네트워크의 나와 실제적인 나에 대한 이야기가 아주 흥미롭고 재미있는 글입니다. 철학자 '조지 허버트 미드'는  내가 생각하는 나를 I이고 내 주변사람들이 나를 인지하는 모습을 'Me'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현실에서도 I와 Me의 차이가 있는데 온라인 세계인 소셜네트워크와 게임속 세상은 아주 극심할 수 있습니다.
게임은 아이디로 접속하기 때문에 아이디가 나를 대변하는 하나의 아바타가 됩니다.  게임 속 내 캐릭터의 모습과 실제 내 모습과 비슷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안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매일 맞고 지내거나 삥을 뜯기지만 게임 속에서는 던전 공격대원을 모집하고 이끄는 공격대장이 될 수도 있고 길드의 우두머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게임속 세상은 마음만 먹는다면 현실속 나와 다른 이미지로 살 수 있습니다. 물론 현실도 내 마음먹기에 따라 이미지가 달라질 수 있지만 게임 같이 쉽게 바꿀수는 없고 긴 시간이 필요 합니다.

이렇게 현실과 게임속 나의 정체성이 극명하게 다를 수 있지만 대부분 현실과 게임속 모습이 비슷한 이유는 관계 때문입니다.
게임을 혼자 한다면 모르겠지만 하나의 그룹을 만들고 친구를 만나고 만들게 됩니다. 이렇게 다른 유저와 관계 맺기를 하게 되면 평판 같은 내 이미지가 형성이 되게 되고 그 평판을 유지하기 위해서 현실의 내 모습과 비슷한 모습하게 유지합니다

관계맺기 혹은 친구는 나의 평판을 이루는 남이 바라보는 나의 이미지를 만들어 주는 존재들이고 친구가 많아질수록 남이 바라보는 나의 이미지인 Me는 편린이 되어서 거대한 내 평판을 이루게 됩니다. 물론 다른 이미지 예를 들어서 현실에서는 내성적이고 조용한데 게임 속에서는 괄괄하고 붙임성 있는 모습으로 게임을 할 수 있지만 그렇게 이중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사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괴리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 다른 사람과의 관계맺기는  내 본성을 다스리고 내 자아의 폭주를 막아주는 제동장치 같은 초자아를 형성하게 됩니다.
예전에 어떤 분이 제가 페이스북에서 실명을 쓰지 않는다면서 실명을 쓰라고 충고를 해서 당황스러웠습니다. 그 이유는 실명을 쓰지 않으면 진솔하지 못하다는 것인데요. 그 주장이 정말 이해가 안 갔습니다. 실명을 쓰면 더 진솔하게 보일 수 있다고 하는데요. 진솔하게 보일 수 있다는 그런 편견은 공감이 갑니다만 꼭 익명으로 운영하면 진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편견이라고 생각합니다.

익명, 혹은 닉네임 혹은 실명의 차이점은 다 피상적인 부분이고 실재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관계를 얼마나 잘 맺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서 와우 같은 온라인 게임에서 아무도 친구 맺기를 안 하고 솔로잉이라는 혼자 게임을 하다가 심심해서 쪼랩이라고 하는 자기보다 레벨이 낮은 유저의 캐릭터를 심심풀이로 죽이고 살육을 하게 된다면 그 사람은 입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멀리 할 것입니다. 하지만 관계맺기가 없는 사람이기에 그 사람에게 누구도 그러지 말라고 말하지도 말한다고 해도 그 말을 듣지 않습니다.

하지만 친구나 길드에 들어가 있고 함께 게임을 하는 관계가 많은 사람은 그런 PK라는 아무 이유없이 다른 유저의 캐릭터를 죽여서 친구들이 왜 그랬냐! 그러지 말라는 등의 사방에 있는 초자아들이 충고와 걱정을 해주기 떄문에 쉽게 질서에 위반되는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관계맺기라는 초자아를 형성하고 그 속에서 자아를 심는다면 그게 익명이든 실명이든 혹은 게임이든 SNS건 상관없이 현실속 나와 게임속 혹은 SNS속 나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도 않고 잘 적응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현실과 SNS와 게임속 내 모습이 다르다면 그 괴리감의 차이만큼 고통도 클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 답지 않다고 내안에서 말하는 목소리가 수시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런 내 속에서 말하는 것을 무시하고 다른 이미지로 SNS이나 게임속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갖고 살 수는 있지만 수시로 자신을 통제하고 콘트럴 해야 하기 때문에 결국은 자신의 모습으로 수렴하게 됩니다. 또한 게임과 SNS는 내 일상의 아주 일부만 보여주기 때문에 데이터가 적을수록 나를 곡해하고 오해하는 시선이나 이미지가 형성되지 않겠지만 그 데이터가 쌓이고 쌓이다보면 현실속 내 이미지와 SNS속 이미지는 비슷하게 동기화 될 것입니다. 



조금 느슨한 초자아의 세계인 SNS가 어쩌면 실제의 나에 더 가까울 수도 있다

SNS나 게임속 관계를 오프라인으로 연동하거나 반대로 오프라인 관계인 현실속 관계를 온라인으로 연동하는 것이 아닌 분절된 관계로 이어가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페이스북 친구가 500명이 있다고 해도 수시로 만나는 관계는 극히 일부입니다. 

대부분은 온라인으로만 서로를 인지하고 교류를 하죠. 그 이웃 하나하나가 내 초자아들입이자 외부의 시선입니다. 아무도 안 보면 담벼락에 오줌을 쌀 수 있겠지만 누가 쳐다보면 그런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나를 지켜 본다는 그 자체 만으로도 우리는 스스로를 제어하고 내안의 초자아가 발동해서 자아를 콘트롤 합니다

최근에 일어나는 극악무도한 살인 행위나 연쇄살인범들 대부분은 이런 관계맺기에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사회와 단절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외부의 시선이라는 외부의 초자아가 없습니다. 여기에 내 안의 양심이라는 초자아 마져 꺼져버리면 그때 부터 폭주를 하게 되고 사람을 죽여도 죄책감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니 성범죄자에게 전자팔찌를 채우는 것은 언발에 오줌누기 밖에 안 됩니다. 

이건 아주 나쁜 예이고 현실에는 너무 강한 초자아 때문에 현실이 고통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술먹기 너무 싫은데 부장님이 사장님이 거래처 갑이 따라주는 술이나 영업상 술을 마셔야 할 때가 많습니다. 속으로 술 먹고 싶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지만 외부의 시선이 막아냅니다. 술 따라 줬는데 안 먹는다고 싸가지 없다는 말들이 다 그런 규범과 질서들이죠. 

SNS는 이런 규범과 질서가 오프라인 처럼 통용됩니다. 그럴 수 밖에도 온라인에 접속한 사람들이 저 화성인들이 접속한게 아닌 같은 인들들이 만나는 것이고 단지 텍스트로 만나는 것이 다를 뿐이죠. 
SNS는 현실과는 다르게 직접적인 만남을 하지 않는 관계가 많고 이런 관계의 느슨함 덕분에 돌직구를 쉽게 던질 수
있습니다. 평소 같으면 나이 많다고 아는 분이라고 쉽게 직언을 하기 힘들지만 SNS는 어느정도의 익명성 때문에 직언과 솔직한 말 혹은 솔직한 의견을 쉽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온라인에서도 매너 없는 직언은 상처를 받기에 매너를 갖추고 직언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속마음을 길어올려서 텍스트로 세상에 뿌릴 수 있는 것이 페이스북이자 트위터입니다. 
오프라인 세계는 너무 억압하는 것들이 가득합니다. 하지만 온라인은 어느정도 이게 느슨합니다. 그래서 좋은 점도 있고 나쁜점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서 하는 직언을 오프라인에서도 편하게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합니다. 지금의 온라인 세상은 가만이 있고 오프라인 현실 세계가 좀 더 온라인과 비슷하게 계급장 없고 서로 직언을 쉽게 할 수 있는 그러나 매너는 갖춘 모습을 보였으면 하네요.

쉽게 설명하자면 서양처럼 수평적 세게관이 펼쳐졌으면 합니다. 수직적 세계관을 가진 한국사회에서 그나마 대나무 숲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온라인이 아닐까 하네요. 

쓰다보니 중구난방 두서없는 글이 되어버렸네요. 현실속의 나와 온라인 속의 나.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남이 바라보는 나 
이 괴리감은 시간이라는 매개체로 서로 닮아가고 동기화 될 것입니다. 괴리감과 오해는 관찰의 시간의 차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이 농담 같은 말에 항상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현실과 가상 혹은 온라인과 남과 내가 바라보는 '나'라는 존재의 싱크로율은 항상 높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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