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3명입니다.
남이 바라보는 나.
내가 바라보는 나.
진짜 나
나는 1명이지만 이미지는 3명입니다. 나는 내 스스로 조신하고 차분하고 정감있는 나라고 생각하지만 친한 친구나 혹은 나를 아는 사람에게 넌지시 혹은 술자리에서 나에 대한 느낌이나 이미지를 말하라면 사뭇 다른 모습에 당혹스러워합니다.
이렇게 내가 원하는 나의 이미지와 남이 날 바라보는 이미지는 많이 다를때가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진짜 나는 내가 원하고 남이 느끼는 나와 다를 경우도 참 많습니다. 다만 날 오래 지켜보는 친구나 지인일수록 이 차이는 크지 않죠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원하는 이미지와 남들이 반응하는 나는 많이 다르죠. 그 괴리감을 지켜보면서 속상해하기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나이들어가면서 이 괴리감에 대한 두려움이나 속상함은 많이 줄었습니다. 왜냐하면 시간 때문입니다.
술자리에서 잠시 보는 사람에게 내 이미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그냥 무시합니다. 몇 시간 만나지 않는 사람이 그날의 내 콘디션을 고려하지 않고 판단하는 말은 그냥 무시해도 됩니다. 그날 따라 술이 많이 취했거나 좋은 일이 있어서 달뜬 모습에 외향적이고 재미있고 만사가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하는 판단은 듣기 좋을지 몰라도 솔직히 그게 제 모습은 아니죠
저는 오히려 시니컬하고 모두 들떠서 흥분할 때 이성적으로(비록 그게 찬물을 뿌릴지는 몰라도) 판단해서 제동을 걸어주거나 수비적인 말을 합니다. 이 모습에 많은 친구들이 넌 왜 그 모양이냐~~라고 하거나 항상 부정적이라는 말을 해줍니다. 솔직히 이런 말에 상처받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친구들이 나중에 크게 실패하고 나에게 그때 니 말을 들을 것이라면서 울먹이면 어깨를 빌려주죠. 모두가 예스라고 할때 저는 일부러 달뜬 그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말할려고 노력 합니다.
이런 모습 때문인지 좀 더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으면 조용히 저를 찾는 친구나 후배가 있습니다. 제가 참 돌직구 같은 스타일이거든요.
각설하고요.
우리 아이들을 볼까요?
여자 아이가 바비인형 거부하고 로봇을 만지고 놀면 여자아이가 왜 그러냐면서 바비인형을 가지고 놀라고 하지 않나요?
반대로 남자 아이가 소꼽장난 하면 남자가 그러면 못쓴다면서 변신 로봇을 선물해주지 않나요?
이건 강박이자 강요입니다.
사진작가 윤정미는 이런 모습을 블루 핑크 프로젝트로 담았습니다. 여자아이 방에 물건을 꺼내보니 온통 분홍색 장난감 학용품이 가득하고 남자 아이 방의 물건은 온통 파란색으로 가득한 모습을 담았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1930년대 독일의 아이들은 남자 아이들이 분홍색을 좋아하고 여자 아이들이 파란색을 좋아해서 기사화 하기도 했는데요. 여자 아이들이 분홍색을 좋아하는 것은 하나의 사회적 강압이라는 것을 밝혔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자 학습의 동물입니다. 색은 옳고 그름이 없지만 우리는 그걸 옳고 그름으로 강압적으로 말하죠.
이게 다 어른들의 시선을 아이들에게 지시하는 모습입니다. 이 강압에 여자 아이들은 바비인형을 가지고 놀고 여자 아이들은 모두 공주가 되고 싶어 합니다.
정작 아이들 본인은 자기가 그래야만 해야하고 그렇게 여자는 공주 이미지를 가져야 하는구나 생각하고 자라죠.
사진작가 Ilona Szwarc는 9살 여자 아이들에게 자신의 분신인 인형을 주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 분신은 9살 여자아이의 분신입니다. 다만 바비인형은 없습니다. 9살 여자 아이들의 정체성을 반영한 아바타이자 분신인 인형을 주고 함께 사진을 찍었습니다.
아이가 자신이 가지고 노는 인형에 동기화 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아이가 자신과 비슷한 인형을 가지고 노는 것일까요? 인형은 여자 아이들의 분신입니다.
남자 아이들은 로봇이 분신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