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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사진/사진전시회

금천 옛 사진전 '응답하라 1995'

by 썬도그 2012.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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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구청 1층 로비에서는 지난 주에 작은 사진전을 했습니다.
그 사진전 이름은 '금천 옛 사진전 응답하라 1995' 다분히 유행가사 같은 단어를 쓴 사진전입니다. 이 사진전을 위해서 금천구는 지난 몇달 동안 금천구민의 사진 앨범속에 잠자고 있는 기억들을 깨워달라고 부탁을 했고 그 부탁에 많은 금천구민들이 응답을 했습니다.

금천구는 서울의 25개구 중 막내 구입니다. 95년에 구로구에서 분리되어 나온 구 입니다. 
막내이기도 하지만 구 크기도 재정자립도도 높지 않습니다. 또한 아파트 값도 비싸지 않고요. 저소득층이 많이 사는 지역인데요. 그렇다고 이걸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구조적인 가난은 가난이 아니죠. 내가 게을려서 돈을 많이 벌지 못하는 것이라면 창피하고 부끄러운 것인데 지금은 구조적으로 돈이 돈을 버는 시대라서 아무리 내가 노력을 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건 제 생각일 뿐이죠. 설문조사를 했더니 금천구 중고등학생들이 자존감이 많이 없다고 합니다. 동네에 대한 사는 곳에 대한 자부심이 없다보니 자존감이 없고 자존감이 없음은 자학으로 이어집니다. 

새로운 구청장은 이런 모습을 지우기 위해서 공동체 형성에 큰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 하나의 단편적인 예가 바로 이런 '금천구 옛 사진전'입니다. 지난 몇 주동안 이 사진전이 금천구청 1층 로비에서 있었는데 이제서야 소개를 합니다. 


1층 로비 한쪽은 북카페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 새로운 금천구청사 건물이 들어섰을때는 이런 것이 없었습니다. 저 둥그런 코쿤 같은 곳에는 가산디지털단지 사진들만 가득하고 도우미 아가씨 까지 있었습니다. 금천의 발전상 어쩌고 저쩌고 토건적인 이야기만 있었는데 

새로운 구청장은 이 활용가치가 없던 공간에 책과 의자와 쇼파를 배치해서 구민들이 쉽게 찾아와서 책도 읽고 담소도 나누고 공부도 하는 등의 공간으로 만들었습니다. 시험기간이 되면 이 곳에 밤 늦게 까지 공부하는 학생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 공간을 잠시동안 사진갤러리로 만들었네요


사진들은 금천구 구민들의 앨범속에서 나왔습니다. 80년대 구로구 독산동과 시흥동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있네요.  방역 소독차의 모습이 옛기억을 되살립니다. 얼마전에 보라매 공원에서 방역차가 지나가길래 피할려고 하다가 그 연기 냄새를 맡았습니다. 놀랍게도 그 석유냄새가 아닌 낙엽타는 구수한 냄새였습니다. 요즘 방역차 냄새가 확 달라졌고 구수하기 까지 하더군요.


한 구민이 꺼내든 사진은 60년대 풍경을 담고 있습니다. 
그 시절 단아한 풍경이 눈에 들어옵니다.


누구였을까요? 저 행복한 표정으로 절구를 찢고 있는 분을 찍었네요
아마도 남편분이 아니였을까요? 사진 찍는 것이 쉬운 시대가 아니였지만 일상을 그대로 담아냈습니다. 웃는 얼굴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60년대라고 하는데 지금은 할머니가 되셨겠네요


사진놀이중에 이런것이 있죠. 현재와 과거의 동일한 장소에서 과거 사진 속의 자신의 모습과 동일한 포즈와 옷을 입고 사진 찍는 놀이요.
위 사진은 그런 사진놀이를 따라한듯 해요. 싱크로율은 많이 어긋나지만 아주 흥미롭습니다. 사실 뭐 싱크로율 맞출 만한 배경이 없죠

어렸을 때 집앞에서 찍은 사진을 같은 장소에서 찍을려고 해도 그 집은 허물어졌습니다. 추억의 장소가 거의 다 해체된 서울. 조금은 서글프네요


시흥대로 라고 하는데요. 어디인지 분간도 안갑니다. 뒤 배경의 건물은 현재 없고 금성 텔레비젼도 현재 없습니다.포니 자동차가 다니는 것을 보니 80년대 초반으로 보이네요. 


한 중학생이 관악산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뒤에 보이는 배경은 금천구와 광명시 그리고 양천구가 되겠네요. 




사진 자료는 많지 않았습니다. 이 지역에 사람들이 많이 살기 시작한 것은 60년대 이후였기 때문에 많은 이야기가 있지는 않겠죠.


금천구가 금천구이기 이전에는 구로구였고 구로구는 구로공단이라는 수출1공단이 있었습니다. 한국을 먹여살린 공단이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공돌이 공순이라는 못된 소리를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못된 소리들은 항상 있었습니다.

열심히 사는 사람에게 왜 비하하는 말을 할까요? 자기 못난 것은 모르는 인간들이죠. 구로공단은 거대한 곳이였습니다. 가산동과 가리봉동 전체가 공단이었습니다. 의류,신발, 가전, 가발등 해외에 수출하는 저가 상품들을 만들었습니다. 노동 집약적인 상품들이 많았기에 많은 여공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쪽방에서 기거하며 숨막히는 삶을 살면서 고향에 있는 남동생과 부모님들에게 돈을 부쳤습니다. 소설가 신경숙도 그 구로공단 쪽방촌에서 살았었습니다. 신경숙의 공단에서의 삶은 소설 '외딴방'에 녹여져 있습니다. 


80년 당시의 금천구의 모습인데 앞 부분에 판자촌들이 보입니다


지금은 자전거도로가 잘 깔려 있어서 자전거를 타고 한강과 강북을 오갈 수 있는 안양천입니다. 물고기도 많이 살고 철새도 가득가득 합니다. 굳이 저 멀리 나가서 철새 볼 필요 없이 안양천에만 와도 목이 긴 철새들을 볼 수 있습니다. 숭어떼, 붕어떼도 가득합니다.
하지만 예전에는 이 곳에 다리가 많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두 물난리가 난 모습인데요.  물이 가득해지면 모습이 비슷해져 버리네요. 



가리봉역입니다. 현재는 가산디지털단지역으로 개명을 했고 개명한 만큼 변화가 거대한 곳입니다. 공단 이미지 찾을려고 가산디지털역에 오면 거대한 빌딩 숲에 갖히게 됩니다. 

영화 '장미꽃 인생'의 무대이기도 했죠. 가리봉동은 코메디 소재로 많이 쓰일 정도로 폄하의 대상이었습니다.
지금도 가리봉동에 산다고 떳떳하게 말 못하는 분들이 있는데요. 창피해 할 것 전혀 없습니다. 어디사는 것이 그 사람의 수준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니까요. 반대로 저 압구정동 산다고 우러러 보는 것도 천박한 행동입니다. 사람이 중요한거지 그 사람이 가진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요. 

모든 것이 변했지만 가리봉역(가산디지털단지역)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기본적으로 이 지역은 철길 때문에 좀 산만한 느낌입니다. 철길 건너와 반대쪽이 양분되어있고 가산디지털단지 자체가 교통이 좋지 않아서 섬 같이 느껴집니다. 가산디지털단지로 출퇴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외지인들이고 출퇴근만 저쪽으로 할 뿐 금천구와 융합되고 있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금천구민이 가산디지털단지에 갈일은 거의 없습니다. 뭐 쇼핑몰이 가득하긴 하지만 가격이 싼 것도 아닙니다. 

또한 이 단지에는 문화시설이 많지 않고 심지어 술집도 많지 않아서 편의점이 술집 역활을 합니다. 여름밤에 가보면 여기저기서 술판이 벌어지는데 고단한 직장인들의 어깨가 보입니다.


안양시가 예전엔 안양읍이였네요. 생길때 부터 시인줄 알았는데 안양읍 시절도 있었군요. 지금의 안양은 위성도시를 넘어서 또 하나의 서울이 되어 있습니다. 물가나 모든 것이 서울과 동기화 되었습니다.

예전엔 서울에서 5천원 하던 영화를 3천원에 싸게 볼 수 있어서 좋았는데 지금은 그런것도 없습니다



현재 금천구 벽산 아파트 자리에 있었던 산기슭에 가득한 집들이 보이네요. 이 곳을 싹 밀고 아파트를 세웠습니다.


1965년 청계천 범람으로 인해서 많은 수재민이 생겼고 그 수재민들이 시흥동 산기슭에 텐트를 치고 살았습니다. 도심에서 쫒겨난 사람들이 서울 변두리로 많이 이동 했는데 강남구의 구룡마을, 신림 난곡등이 있었는데 구룡마을 빼고는 다 사라지고 아파트가 올라가 있습니다. 
난곡이 사라지기 전에 사진으로 그 곳을 남겨보지 못한 것이 아쉽네요. 디카 시대가 5년만 일찍 왔어도 참 좋았으려만...


응답했다 2012라는 메모지가 보이네요.
뭐라고 응답할까요?

오겡끼데스까? 잘 살고 계시나요? 추억은 항상 달달합니다. 그 당시로 타임워프하면 쓰고 맵고 짠 맛이 나겠지만 우리는 무드셀라 증후군에 빠져서 항상 아름다운 맛만 남고 나머지 맛은 다 날아가 버립니다. 언젠가 이 글을 제가 30년 후에 읽는다면 또 희미하게 웃고 있을 듯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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