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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사진/사진에관한글

사진을 관람할 때 작가의 의도가 중요한가? 내 느낌이 더 중요한가? (스투디움과 푼크툼)

by 썬도그 2012. 7.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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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사진전에는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 누군가가 따라 붙어서 사진을 설명하지 않죠. 
하지만 유명한 사진작가의 사진전에는 도슨트가 있습니다. 매일 특정 시간에 큐레이터가 사진이나 그림을 하나 하나 설명을 해주는 서비스죠. 

저는 유명 사진전과 그림 전시회를 볼 때는 먼저 아무런 설명없이 제 느낌대로 봅니다. 사진이나 그림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읽지 않습니다. 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를 보기전에 어떠한 설명이나 부연 설명을 피할려고 합니다. 최근들어서는 어떠한 영화평도 보지 않고 영화를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어떠한 설명을 듣지 않을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그 영화나 사진이나 그림을 제 느낌과 경험만 가지고 볼 수 있기 때문이고 이 감상이 제대로 된 감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남들의 평이나 평론가들의 평을 읽고 영화나 전시회를 보면 내 느낌과 생각보다는 평론가나 도슨트가 주입하는 느낌에 막혀서 내 느낌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거 뭐 영화를 평론가가 본 것을 확인한 건지 전시회를 도슨트가 보고 설명하는 것을 들으러 간건지 구분이 안 갑니다.

이렇게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전시회를 다 관람 한 후 도슨트 시간을 기다립니다.
시간이 되면 시작하는 도슨트의 설명을 들으면서 그 정보를 제 스마트폰에 바로바로 입력합니다. 

그리고 그 도슨트가 사진이나 그림을 해석해주는 그 정보와 기호를 머리속에 넣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정보가 없이 봤을 때와 어떠한 정보나 기호의 해석이 가미되어서 볼 때의 차이점을 느껴봅니다.

네! 차이점이 있고 많습니다. 


아주 정확한 예는 아니지만 위 사진을 가지고 설명해 보겠습니다. 

위 사진은 사진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입구에 걸려져 있는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최고의 걸작인 '생 라자르 역 뒤에서'라는 사진입니다. 위 사진은 한 남자가 물 웅덩이를 폴짝 뛰는 순간을 정확하게 잡아 냈는데 남자의 발레리노 같은 동작과 저 뒤에 철망 옆에 있는 발레리나의 포스터의 동작과 유사합니다.  이외에도 이 작품을 명작으로 해석하는 설명은 끝도 없이 많습니다.  고백하자면 전 이 사진 아무런 느낌이 없습니다. 

그런 사진들이 있습니다. 사진작가가 직접 나와서 나는 이런 A라는 의도로 촬영을 했다고 설명을 한다고 칩시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서 환경 문제에 대한 고발을 담았다고 칩시다. 그런데 저는 작가의 의도와 다르게 B라고 바라봤고 제 생각은 환경 문제에 대한 고발 보다는 도시의 아름다움을 느꼈다고 하면 어떤 것이 정답일까요?


나는 B라고 느낀 사진을 작가가 직접 이건 A라는 의도와 느낌을 담았다고 하면 그 괴리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그 괴리감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서 내가 느낀 B라는 느낌과 경험을 싹 지우고  A라는 의도를 다시 주입해야 할까요? 
이런 경험들 없으신가요?



롤랑 바르트의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

프랑스는 철학의 나라답게 많은 철학가를 배출 했습니다. 그러나 사진에 대한 철학가는 많지 않습니다. 사진의 역사가 짧기 때문이 가장 큰 이유겠죠. 그 사진에 대한 철학적 이야기를 많이 한 분이 바로 롤랑 바르트입니다. 문예미학자이자 기호학자, 구조주의자,인문학자등의 수식어가 참 많은 이 분의 책을 20년 전에 구매를 했습니다. 우연하게 구매를 했던 이 '카메라 루시다'는 당시는 몰랐는데 여전히 이 책을 구하려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사진 쪽에서는 아주 유명한 책입니다. 

아주 짧은 에세이집이지만 이 책은 사진을 해석하는데 큰 족적을 남긴 책입니다. 

이 책에는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이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20년 전 읽었지만 당시는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없고 읽어도 뭔 소리인지 제대로 소화도 못 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이 책을 다시 읽기 시작하면서 어느 정도 이 두 용어에 대한 감을 잡았습니다. 


윌리엄 클라인 - 이탈리아인 거주지역- 뉴욕 1954년


사진작가의 의도나 문화적인 약속이나 작품의 코드를 설명해주는 도슨트가 바로 스투디움

스투디움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어떤 예술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는 특징이나 코드화 해서 보여줄 수 있는 객관화된 느낌등을 스투디움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위 사진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아이들이 웃고 있는 모습이 들어오지만 장난감인지 진짜인지 구분이 안가는 총도 보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웃고 있고 뒤에서 걸어오는 행인도 총에 놀라지 않는 모습으로 보아서 장난감 총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저 총이 진짜라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진을 찍은(지금도 다르지 않겠지만) 1954년 이탈리아인 거주지역은 범죄가 만연한 지역이고 총기에 대한 자유가 많은 미국이기에 진짜 총으로 해석해도 전혀 무리가 없습니다.

이 사진을 보면서 우리는 미국의 총기허용 문화를 느낄 수 있고 아이들의 천진난만함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제가 해석하는데 다른 분들도 거의 대부분 동의할 것입니다. 또한 공감이 가고요. 또한 이 사진을 찍은 '윌리엄 클라인' 작가의 의도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사회적인 관점과 시대적 배경과 지식, 문화, 관습 등 종합적인 정보를 가지고 우리가 느끼는 것을 스투디움이라고 합니다. 도슨트 하는 분이 이러저러해서 이러한 사진이다라고 할 때 우리가 고개를 끄덕이는 게 바로 스투디움입니다. 



사진의 한 부분이 나의 폐부를 찌르는 느낌을 주고 뚫어지게 사진을 보게 하는 푼크툼

바르트는 위 사진을 대수롭지 않게 스치듯 넘어가다가 총이 아닌 아이의 빠진 이에 멈추게 됩니다. 그리고 바르트는 이 빠진 이를 뚫어지게 보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되고 환유적인 경험을 하게 됩니다. 


위 사진은 브레송의 덜 유명한 사진입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고 보는 사진이고 그냥 스치듯 넘어갈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왼쪽 거대한 포스터에 있는 여자분이 자신의 첫사랑과 닮았다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이 사진을 뚫어지게 보게 될 것 입니다. 

남들의 보편적 경험이 아닌 나만의 기억과 경험을 찌른 저 여자의 눈매가 내 첫사랑의 눈매와 닮았다면 이 사진 앞에서 나는 우두커니 서서 한 참을 들여다볼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진은 내 기억이 담긴 풍선을 날카로운 것으로 터트려 버리고  첫 사랑과 데이트하던 곳과 같이 영화를 보던 기억들, 첫 키스를 한 그 골목길까지 봉인된 기억이 쏟아져 나오면서 한 참을 보게 합니다

사진전에 가면 유독 날 붙들어두는 사진들이 있습니다. 그 사진작가의 유명한 사진이 아님에도 나를 움직이게 못 하게 하는 사진들 이런 사진들에는 내 경험과 기억의 풍선을 터트렸기 때문입니다

푼크툼은 개인성, 특별성, 주관성, 감각성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건축학개론은 90년대 기호를 많이 담고 있는 영화입니다. 따라서 현재의 30,40대들이 열광을 했습니다. 위 사진에서 허리에 찬 삐삐와 필름 자동카메라는 30,40대의 감성을 자극하는 90년대 상징물입니다. 하나의 기호로 사용된 것이고 위 사진을 보고 우리는 공통된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아련함, 추억,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감정들을 이끌어내죠. 이게 바로 스투디움입니다. 

그러나 저에게 있어 이 사진은 푼크툼을 이끌어냅니다. 그 푼크툼을 이끌어 낸 것은 주인공이 들고 있는 카메라 때문입니다. 저 카메라는 제가 사진동아리 활동을 할 때 집에서 출사 때마다 가지고 나간 카메라입니다. 다른 동기들은 멋진 SLR카메라를 들고 나왔는데 저는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러 다녔고 항상 부끄러워했습니다.  결국엔 카메라 없이 출사에 나가서 SLR 카메라를 빌려서 찍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행동을 한 저에게 꾸지람을 하고 싶지만 20대 초입의 어린 학생에게는 겉모습이 중요했던 시기였습니다. 한편으로는 선배들이 왜 자동카메라도 멋진 카메라라고 훈계를 안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위 사진은 보편적인 90년대 커플들의 사랑놀음입니다. 이건 스투디움이죠. 90년대의 상징성을 내재하고 있고 보편적인 코드기에 스투디움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수지가 한 저 노란 머리띠를 한 여자가 내 첫사랑이라면 그시절 자신의 추억을 떠올리겠죠. 그 추억을 떠올리게 한 저 노란 머리띠는 푼크툼입니다. 

저 노란 머리띠는 90년대를 상징할 수 있는 코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노란 머리띠는 70년대도 80년대도 그리고 지금도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나에게 중요한 이유는 내 추억과 링크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습관이 있습니다. 어떤 영화나 사진을 보다 보면 (특히 영화) 한 장면에 푹 빠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영화 '화차'에서 어머니를 밀어 버리는 무시무시한 계단 장면에서 전 이상하게 제 어린 시절의 그 골목길 계단이 떠올랐습니다.  그렇게 어린시절이 떠오르더니 혼자 상상계를 개방해서 여러 추억을 끄집어 놓고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추억에 빠져 있다가 다시 스크린에 집중하면 장면은 바뀌어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는 어떤 특정한 것에 필이 꽂혔다고 할 때가 많습니다. 어떻게 설명하기도 힘든 그 느낌. 그 필에 꽂힌 것을 따라가다 보면 그 필이 시작되는 부분은 아주 작은 부분일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스마트폰을 살 때 여러 가지 것을 따지고 사는 분도 있지만 어떤 분들은  뒤태가 예쁘다는 부분적인 이유만으로 그 제품에 푹 빠지기도 하죠


사진전을 볼 때 작가의 의도인 스투디움도 중요하지만 저는 그 것보다 내 느낌 내가 느끼는 푼크툼이 더 좋습니다. 
사진 해석은 작가의 몫이 아니라 관객의 몫입니다. A라는 작품을 보고 어떤 사람은 A라고 느끼고 나가고 어떤 사람은 B라고 느낀다고 해서 B가 틀리고 A의 해석이 맞다고 할 수 없습니다.  느끼는 것에 정답과 오답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그렇게 느꼈다면 그렇게 느낀거지 작가가 이렇게 느꼈다고 나도 그렇게 느끼라는 것은 폭력입니다. 
따라서 사진전을 볼 때 내 느낌대로 쭉 보고(푼크툼을 발견할 수 있죠) 그 다음에 도슨트를 통해서 작가의 의도인 스투디움을 느껴보세요. 사진이나 그림이나 영화나 내가 느끼는 느낌이 우선이지 작가의 의도나 다른 사람의 해석이 우선일 수 없습니다. 다만 참고만 해야죠. 

이 '카메라 루시다'책을 다시 읽는데 정말 번역 엉망이네요. 책을 좀 더 자세히 읽고 위 글의 개념이 틀린 게 있으면 수정하겠습니다. 또한 제 글에 오류가 있으면 댓글로 지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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