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아카데미 시상식은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년 같으면 어떤 영화가 작품상을 탈지 무척 기대가 컸지만 요즘 영화관도 드문드문 가고 빅재미나 큰 충격을 주는 영화가 거의 없어서 실망스러운 나날입니다. 영화관에 가는 이유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하게 되는 요즘이기도 하네요.
그러나 결과는 궁금해서 봤더니 <아노라>가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편집상, 여우주연상까지 주요 상을 다 쓸어갔네요.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을 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극찬을 한 영화지만 개봉 당시는 안 봤습니다. 성 노동자가 주인공이라는 소리에 보고 싶은 생각이 크게 들지 않았습니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션 베이커 감독의 영화 아노라
제가 <아노라>를 개봉 당시 안 봤던 이유는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때문입니다.
2018.03.18 - [영화리뷰/영화창고] - 아름답고 잔혹한 성인들을 위한 동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아름답고 잔혹한 성인들을 위한 동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개봉 전 부터 많은 사람들과 평론가들로부터 사랑스러운 영화라는 극찬을 받았던 가 드디어 지난 주에 개봉을 했습니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상이나 해외 유수의 영화제에서 큰 사랑을 받은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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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 영화를 보고 푹 빠져서 합정동 팝업스토어까지 가기도 했습니다. 아이폰으로 촬영한 이 저예산 독립영화 속 무니은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네요. 이 영화 너무 좋았습니다. 너무 좋았어요. 미국 자본주의 세상의 잔혹함과 무니의 동화가 대비되면서 극렬한 감정을 끌어냅니다. 정말 좋은 영화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영화라서 다시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숀 베이커 감독을 이 영화로 알게 되었고 놀라운 연출과 스토리와 연기에 아직도 남들에게는 추천하지만 너무나 사랑스러운 무니는 보고 싶지만 영화 속 현실을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못 보겠습니다. 제가 영화 속 캐릭터 이름을 잘 못 외우는데 아직도 툭하고 나오는 걸 보면 지금도 이 영화의 영향권에 있다는 걸 방증하네요.
성 노동자를 소재로 한 영화 아노라
결론부터 말하면 <플로리다 프로젝트> 보다는 못합니다. 그것도 한참 못합니다. 보면서 이렇게 단순한 이야기의 영화 그리고 특별할 것도 없는 영화가 작품상까지? 여러모로 갸우뚱하게 하는 영화입니다. 보다가 3번 정도 쉬었다가 볼 정도로 몰입도도 내용도 대충 예상이 가서 한 번에 보지는 못했습니다.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오히려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어야 할 정도로 두 영화를 비교하면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훨씬 더 좋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아카데미는 신인 감독에게 작품상까지 안겨주지는 않는 보수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르는 것으로 멈췄네요.
내용은 너무 단순합니다. 구글에 검색만 해도 나오는 러시아 재벌 2세인 이반(마크 아이델슈테인 분)이 클럽에서 향락을 즐깁니다. 성 노동자인 애니(미키 매디슨 분)는 러시아어를 조금 할 줄 안다는 이유로 이반을 접대합니다. 그러나 이반이 애니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해서 다음 날 자신의 저택으로 오라고 합니다. 그렇게 관계는 업소 바깥으로 이어지다가 1주일 동안 애인이 되어주면 2천만 원을 주겠다는 제안을 합니다.
그렇게 1주일 동안 세상 모든 것을 가진것처럼 살다가 이반이 청혼을 합니다. 라스베이거스는 즉석 결혼이 가능할 정도로 쉽게 결혼을 성사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죠. 그렇게 이반은 애니와 결혼을 합니다. 이 소식은 러시아 부모들에게 알려집니다. 이 21살 이반을 관리하는 미국 현지 관리자인 토로스는 안절부절못합니다. 딱 2주간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반이 일을 저질러 버렸습니다.
이에 러시아 부모가 전용기를 타고 다음 날 도착한다고 하고 그 사이에 토로스와 토로스의 똘만이인 조폭 같이 생긴 이고르와 토로스의 동생이 이 결혼을 되돌리려고 노력합니다. 이 와중에 이반은 빤스런을 해서 도망칩니다. 보통 부부라면 아내를 챙겨야 하는데 아내가 애원을 해도 도망칩니다.
공산주의의 시조새 러시아 이민자들 통해 본 잔혹한 미국의 자본주의 (스포가 있어요)
이 단락은 스포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심한 스포는 아니지만 영화를 볼 분이라면 건너뛰시면 좀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습니다.
성 표현이 노골적이고 적나라합니다. 가리고 숨기고 대충 담지도 않습니다. 그냥 다 담습니다. 아마 아카데미 작품상 받은 영화 중에 가장 성적 표현이 많고 심한 영화입니다. 그렇다고 에로물이냐? 아닙니다. 다큐인 줄 알았습니다. 그냥 세상에 이런 풍경에서 하루하루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그냥 보여줍니다. 그런 면에서 '마이키 매디슨'의 연기는 여우주연상을 안 줄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결코 쉬운 연기가 아닌데 실제처럼 연기합니다.
션 베이커 감독은 이런 <플로리다 프로젝트>에 이어서 성 노동자를 꾸준히 담고 앞으로도 담을 예정이라고 하는 이유는 자신이 약물 중독으로 인해 밑바닥까지 떨어졌는데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마음속에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꾸준히 이 세상 어두운 곳에서 사는 사람들을 담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세상 가장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을 영화로 담아서 상류층들이 모이는 듯한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받은 것은 <기생충>만큼 쇼킹한 결과입니다. 아카데미가 우리는 이렇게 깨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 같기도 합니다.
물론 영화 자체는 나쁘지 않고 그런대로 좋지만 작품상까지? 받을 정도인가는 좀 갸우뚱하게 됩니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주제는 사랑에 대한 정의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이 뭔가를 묻는다는 시선이 많은데 전 그렇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예상이 가능합니다. 이반이 진짜 애니를 사랑해서 결혼했을까? 아니면 엔조이로 즐기다 버리는 도구였을까? 의 궁금증이 영화 전반을 이끌어갑니다.
그리고 영화는 2부가 시작되듯 새로운 국면이 시작됩니다. 빤스런한 이반을 찾기 위해서 애니와 3명의 러시아 재벌 관리자들이 이 이반을 찾는 과정을 담습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 나옵니다. 그냥 힘 좋은 동네 양아치인줄 알았던 이고르(유리 보리소프 분)이 유일하게 애니를 위로해 줍니다. 그럴 때마다 애니는 깡패 보듯이 쳐다보고 혐오하고 경멸합니다. 마치 자신이 세상에 받는 시선을 그대로 이고르에게 쏟아냅니다. 저 같으면 한 대 칠 것 같은데 이고르는 다 받아냅니다.
어? 왜 착하지?라는 생각이 들지만 생각해보면 외모가 조폭 같다고 진짜 조폭이지 않을 수도 있죠. 제가 가장 크게 공감하고 흔들렸던 건 애니에게 이고르가 애니의 본명인 아노라의 뜻이 빛이라는 뜻이라는 점을 알려주는 장면도 있지만 둘 다 러시아 이민자 출신이라는 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러시아가 공산국가라고 아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러시아는 자본주의 국가이자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러시아는 공산당이 따로 있지만 여당이 아닌 야당입니다. 푸틴이 이끄는 정당이 여당입니다. 따라서 공산주의는 사라졌습니다. 자본주의가 경제 시스템의 기본 룰입니다. 이렇게 러시아는 자본주의 국가가 되면서 신흥 재벌이 생겼지만 대부분은 가난한 국민이 되었고 이중 일부는 해외에서 정착해서 살고 있습니다. 애니의 할머니도 러시아인이라서 애니가 러시아어를 조금 할 줄 압니다. 이고르는 최근에 정착했는지 영어가 서툴지만 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미국에서 버티고 있습니다.
비록 러시아 재벌 2세의 뒷치닥거리나 하는 하찮은 일을 하고 있지만 그 누구보다 마음이 따뜻합니다. 아노라라는 이름을 깨워준 것도 이 이고르입니다. 이고르가 이 영화의 아노라 즉 빛입니다. 이 캐릭터가 유일한 희망을 느끼게 해 주네요.
성노동자의 삶을 담았다는 점만 좋았던 아노라
션 베이커 감독은 음악을 아주 잘 사용합니다. 또한 감각적으로 잘 사용합니다. 이 영화가 88억 원으로 제작된 영화라는 사실에 깜짝 놀라게 하는 이유는 음악과 선택과 집중입니다. 필요한 건 확실히 보여주고 감각적인 연출로 매끈하게 담았습니다. 그러나 스토리나 너무 뻔하고 노골적이고 단순합니다. 깊이 있는 풍자도 없습니다. 애니와 이반을 통해서 세상의 현실을 보여주는 힘은 좋지만 엄청나게 좋게 느껴지지는 않네요.
그럼에도 성 노동자를 지금까지 영화의 액세서리로 사용하던 모습을 지우고 성 노동자 본인의 목소리를 많이 담은 점은 무척 좋네요.
엔딩씬에 대한 극찬이 많은데 이것도 전 그냥 그랬습니다. 물론 어떤 의미인지는 압니다. 평생 애니라는 무명으로 살고 싶었는데 빛이라는 뜻을 가진 아노라로 살고 싶었던 애니의 속 마음이 터져 나오는 장면이지만 이것도 예측 가능하다 보니 전 좀 뚱했네요.
분명 좋은 영화입니다. 션 베이커 감독의 일관된 성 노동자에 대한 진심이 통했고 이 영화를 통해서 성 노동자들에 대한 시선이 좀 더 부드러워질 수 있을 것이 확실합니다. 그럼에도 좀 더 이야기나 의미를 노골적이지 않고 은근하게 담았으면 좀 더 공감의 진동이 커질 텐데 너무 직설적인 표현의 연속이라서 좀 아쉽긴 하네요.
카메라의 빛으로 세상 어두운 곳을 비춘 션 베이커 감독
19세기말 뉴욕의 어두운 뒷골목과 지하에는 수많은 이민자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뉴스에 절대 나오지 않습니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은 존재들이었죠. 그러나 플래시가 발명된 후 '제이콥 A. 리스'라는 사진기자는 플래시를 단 카메라를 들고 밤거리를 다니면서 뉴욕의 어두운 곳을 인공의 빛으로 담았습니다.
그러자 없던 존재들이 있는 존재가 됩니다. <아노라>는 그런 영화로 느껴집니다. 영화 자체에 대한 만족도는 그렇게 높지 않지만 이 시선이 작품상까지 이끌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영화 카메라로 성 노동자라는 천대하는 존재들을 당당하게 펼쳐놓고 그들도 인간이라고 말하고 있고 오히려 약자들이니 우리가 보듬어야 할 존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게 영화 <아노라>에 대한 외적인 박수갈채가 아닐까 하네요.
별점 : ★ ★ ★☆
40자 평 :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던 성 노동자를 향해 카메라 빛을 비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