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결말부터 소개하면 봉준호 감독 영화 전체를 놓고 보면 중간 정도이고 해외 언론에서 말했듯이 넷플릭스 영화 <옥자>와 <설국열차>를 섞은 듯한 느낌의 영화입니다. 눈요기꺼리는 많지 않은 것이 단점이라면 큰 단점이지만 대신 이전의 어떤 영화보다 의미가 많이 들어가서 다 보고 난 후에 많은 생각꺼리를 던져주는 영화입니다.
동시에 봉준호 감독 영화 중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영화입니다. 그래서 볼만했냐? 볼만합니다. 다만 긴장감이나 큰 충격 같은 건 없지만 현재 미국 사회 및 한국 사회를 넘어서 전 세계에서 펼쳐지고 있는 자본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미국에 대한 정면 비판이 가득 담겨 있는 사회 비판성이 아주 강한 영화입니다.
다만 너무 우주선 실내에서만 이야기가 이루어지다 보니 시종일관 어둡고 칙칙한 점은 좀 아쉽지만 '로버트 패티슨'의 놀랍고 뛰어난 연기가 불꽃이 튀네요.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가 많으나 눈요기 꺼리가 꽤 적은 점은 아쉽다
제작비가 무려 1억 5천만 달러 한화로 계산하면 약 2,000억이 조금 넘는 제작비를 투입한 영화 <미키 17>의 원작은 <미키 7>이라는 소설입니다. 봉준호 감독은 감독이지만 동시에 뛰어난 각본가이기도 합니다. 직접 각본을 쓴 영화들이 거의 대부분이죠. 그러나 이 영화는 <설국열차>와 함께 원작이 있는 영화입니다.
<설국열차>는 콘셉만 따오고 직접 다 지어낸 이야기지만 <미키 17>은 원작을 각색하진 했지만 <설국열차>처럼 거의 다 지어낸 수준은 아닙니다. 이게 영화 <미키 17>의 단점이라면 단점입니다. 봉준호 감독 특유의 뛰어난 이야기 진행이 애초부터 큰 기대를 할 수 없습니다. 또 하나의 큰 장애물이 있다면 SF 영화라는 점입니다.
유일한 눈요기꺼리는 집신벌레 같은 외계 생물체가 눈밭을 뛰어다니면서 군집 행동을 하는 것이 전부라고 할 정도입니다. SF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기 쉽지 않죠. 특히 한국에서는 스페이스 오페라나 SF 영화 모두 마니아들만 열광하는 장르라서 큰 인기를 끌기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SF 영화의 매력은 상상에서 나온 뛰어난 우주 전투와 액션이 큰 역할을 하는데 놀랍게도 이 <미키 17>은 액션이 거의 없다고 할 정도로 눈요기가 거의 없습니다.
비슷한 소재의 2009년 영화 <더 문> 보다는 규모가 큰 영화라서 야외 장면은 꽤 화려하지만 실내 장면이 너무 많고 실내도 너무 어두워서 시종일관 어둡습니다. 이게 꽤 아쉽네요. 대신 이전 봉준호의 어떤 영화보다 사회 비판적인 요소가 많고 사랑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키 17의 간단 줄거리
시대배경은 2054년입니다. 미키 반스(로버트 패틴슨 분)는 티모(스티븐 연 분)와 함께 마카롱 사업을 하다가 20억이 넘는 빚을 집니다. 문제는 이 빚이 잔혹한 사채업자의 돈으로 돈을 안 갚으면 죽을 수 있습니다. 이에 티모와 미키는 선거에서 연전연패한 케네스 마샬(마크 러팔로)이 이끄는 나플라임이라는 새로운 행성을 개척하러 떠나는 탐사선에 지원을 합니다.
티모는 비행자격증이 있어서 우주선을 모는 파일럿이 되지만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미키는 익스펜더블(소모품)이 됩니다. 이 익스펜더블이라는 설정이 이 영화의 핵심 재미이자 주제 중 하나입니다. 익스텐더블에 지원을 하면 미키는 기억을 백업하고 3D 프린터로 프린팅을 하고 그 몸에 기억을 넣어서 생명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기억은 실시간 백업이 되기에 무한 재생의 힘을 얻고 계속 새롭게 태어날 수 있습니다. 이 익스펜더블은 실험도구처럼 활용됩니다.
위험한 곳에 내려가서 탐색을 하고 새로운 항성에 도착해서 대기 중에 있는 바이러스를 마시고 죽습니다. 그렇게 미키는 무려 16번이나 죽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미키의 희생으로 백신이 개발되고 미키 17과 동료는 나플라임을 탐사하게 됩니다.
이 소모품 같은 미키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나샤(나오미 애키 분)입니다. 나샤는 죽은 것이 직업인 미키를 사랑하고 둘은 연인이 됩니다. 이 개척선을 이끄는 케네스 마샬은 아내 일파 마샬의 조언이나 받는 멍청한 독재자입니다.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불같이 화를 냅니다. 그렇다고 문제 해결 능력은 없고 오로지 아내의 조언이나 민머리 비서에게 도움을 받습니다.
그렇게 4년 간의 항해 끝에 나플라임에 도착해 보니 나플라임에는 원주민이 있었습니다. 쥐며느리 같이 생긴 큰 벌레들이 가득한 행성이었습니다. 이 행성을 탐색하던 16번째로 복제된 미키 17이 눈 구덩이 밑으로 떨어집니다. 친구 티모가 구하러 내려오지만 화염방사기만 들고 올라가고 내일 보자고 합니다. 미키도 압니다. 어차피 죽으면 내일 다시 복제가 되니 죽는 게 더 현명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쥐며느리 에 먹혀서 죽는 걸을 예상 했는데 쥐며느리 들이 먹지 않고 오히려 미키 17을 땅으로 올려다 줍니다.
그렇게 돌아온 미키 17은 자신의 방에 있는 미키 18과 조우하게 됩니다. 법적으로 2명의 복제 인간이 있으면 안 됩디다. 이를 멀티플이라고 하는데 둘 다 죽이고 기억도 삭제하는 강력한 법이 있습니다. 그렇게 존재해서는 안 되는 또 다른 나를 만나면서 이야기는 흥미롭게 전개됩니다.
전반과 후반으로 나눠서 본다면 전 전반부의 이 독특하고 놀라운 설정이 좋았지만 후반 풀어가는 서사가 좀 느슨한 것 같아서 좀 아쉬웠습니다. 전반부 설정만 보면 작당을 하고 복제 인간을 여러 개 복제한 후 여러 명의 미키가 체재를 전복하면서 일어나는 존재에 대한 깊은 질문을 쉽게 끌어낼 것으로 예상했는데 그건 아니네요. 마치 영화 <늑대와 춤을> 또는 <아바타>의 또 다른 버전 느낌으로 끝나는 것 같아서 좀 맹숭맹숭한 점은 아쉽네요. 여기에 볼거리가 많지 않은 점도 느슨함을 더 가속시킵니다.
봉준호 영화 중에 몰입이 안 되는 영화가 거의 없는데 이 영화는 봉준호의 매운맛이 아닌 서양 자본을 위한 순한 맛 버전 느낌입니다. 그럼에도 의미나 풍자와 은유는 그 어떤 영화들보다 많이 넣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미국인들에 대한 풍자를 가득 담다
워너브라더스사가 개봉 전에 봉준호 감독과 의견 충돌이 많았다는 소식에 뭔가 있나 보다 했는데 결국 전 세계에서 편집 전권을 거머쥔 5명도 안 되는 감독 중 한 명이 된 봉준호 감독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진 영화가 <미키 17>입니다. 뚜껑을 열어보니 바로 알겠더라고요. 누가 봐도 이 <미키 17>의 이야기는 메이 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에 도착한 미국 선조들의 이야기입니다. 백인들이 도착한 후 미국의 지배자가 된 것처럼 개신교도인 케니스 마샬이라는 독재자가 이끄는 개척함 자체가 미국 역사와 비슷합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독재자 케네스의 명령을 거부하려던 직원이자 과학자들이 찬송가를 부르고 주님을 외치자 따르는 모습이 요즘 미국 그리고 한국 사회의 종교와 정치가 결탁된 못난 모습으로 보입니다. 이는 미국인 전체에 대한 비판이자 풍자로 미국인들이 보면 약간 껄끄러울 것으로 여겨집니다. 다만, 미국인들은 유쾌함과 풍자에 익숙한 나라라서 잘 받아들일 듯하네요.
미키 17, 크리퍼를 통한 이름 짓기와 고유명사
우리 사람은 동명이인이 있지만 각자는 고유명사인 이름이 있습니다. 똑같이 생긴 쌍둥이도 이름이 다르듯 우리는 이름을 통해서 내 고유함을 증명하고 증명받습니다. 그런데 미키는 이름이 있지만 없습니다. 미키를 계속 복제하면서 이름을 미키 2, 미키 3, 미키 4로 만들고 미키 17까지 이어집니다.
이는 소모품이라는 소리이자 존재가치를 낮추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공산품과 소모되는 모든 것에 이름을 따로 붙여주지 않듯이 미키는 이름이 있지만 없는 존재이고 실제로 우주선 승무원들의 대우도 비슷합니다. 묻는 말이라고는 죽는 것이 어떤 기분이냐고 묻기만 합니다. 이런 존재는 또 있습니다. 원주민인 쥐며느리 들을 보고 크리퍼라는 이름을 지어줍니다. 좋은 이름을 지어줘도 되지만 부정적이고 벌레에게 붙이는 이름을 지어줍니다.
그런데 놀라운 건 통역기를 목에 건 미키 17이 말을 붙여보니 인간이 죽이고 잡아간 쥐며느리 새끼들마다 이름이 있다는 걸 알게 해 줍니다. 우리는 적대시하고 무서워하는 것들에 이름을 붙여주지 않고 그들, 그것들 식으로 부릅니다. 그러나 적들이 모두 누군가의 아들이고 딸임을 인지하게 하는 건 그 사람들의 이름을 붙여주거나 물어보는 겁니다.
회사라고 다를까요? 직원, 부하라고 부르지 않고 따뜻하게 이름을 불러준다면 그 경영자는 아주 훌륭한 경영자의 기본 자질을 갖추고 있다는 방증이 아닐까 합니다.
곳곳에서 보이는 봉준호 감독의 전작들의 향기
보다 보면 봉준호 감독의 전작들이 꽤 보입니다. 먼저 마카롱 매장을 운영했다가 망했다는 소리에 영화 <기생충>에서 대만 카스테라 집 하다 망한 것과 오버랩되었습니다. 이외에도 미키라는 소모품을 대하는 모습이 <옥자>의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하는 모습과도 이어집니다. 봉준호 최초의 사랑 이야기라고 하지만 <옥자>도 사랑하는 슈퍼 돼지를 사랑하는 여자 아이의 이야기라서 최초는 아닐 수 있습니다. 보면서 미키가 옥자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더라고요.
또한 무시무시한 사채업자 등을 등장하는 등 자본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도 꽤 들어가 있습니다.
소모품 같이 사용되는 비정규직 양산 사회
기업들이 흔히 하는 소리가 있죠. 너 말고도 이 일을 할 사람은 많아! 라면서 노동자를 티슈처럼 쓰고 버리는 일이 참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2018년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사고로 숨진 김용균씨가 있습니다.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에서 여전히 열악하고 참혹스러운 노동환경에 내몰린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것이 미키입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또 같은 노동자가 반대하는 아이러니한 일도 참 많이 일어나는 나라입니다.
이게 어디 한국만의 일일까요? 전 세계에서 노동자를 인간이 아닌 하나의 소모품 또는 도구로 활용하는 나라들이 참 많을 겁니다. 영화에서 미키 17에게 만찬을 열어서 극진한 대접을 하는 척하면서 선장인 마샬이 보여주는 행동은 역겨움 그 자체이자 어떻게 보면 이 영화에서 가장 강렬한 장면이 아닐까 합니다.
나 라는 존재는 무엇일까?
나라는 존재는 어떤 존재일까요? 일본 애니 <공강기동대>가 놀라웠던 것은 나를 데이터화해서 넷 상에 업로드하면 불로영생의 삶을 살 수 있다는 설정을 통해서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기억이라는 데이터 덩어리인가라는 의문을 던졌습니다. 영화 <미키 17>은 복제 인간을 통해서 또 다른 나를 통해서 나라는 존재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기억과 DNA가 동일한데 미키 17은 순한 맛, 미키 18은 매콤한 맛이라는 성격이 영 딴판인 사람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소리를 할 수 있지만 이게 이 영화의 핵심 주제이자 재미입니다. 아무리 같은 기억과 DNA를 가졌다고 해도 성격이나 기질은 다를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걸 이해하기가 쉬운 것은 아니라서 과학적 근거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돌아보면 20대의 나와 지금의 나는 확실히 많이 달라졌습니다.
또 흥미로운 점은 미키는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순응하면서 살았습니다. 어차피 죽으면 또 태어나면 되지라면서 살았는데 멀티플인 또 다른 나인 미키 18을 만나자 죽음에 대한 재인지와 죽기 싫다는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미키 17이 죽은 후 미키 18은 연속성이 있지만 미키 18이라는 복제물이 등장하가 미키 17이 죽으면 미키 17이 죽은 것이라는 즉 메타 인지를 하게 됩니다. 연속성이 깨지자 미키는 혼란스러워합니다. 이 설정이 그 어떤 복제 인간을 소재로 한 영화에서 볼 수 없던 설정이라서 좀 더 끌고 갔으면 했는데 좀 다루다 마네요. 아쉽고 아쉽더라고요.
그리고 이런 익스펜더블 미키를 사랑하는 나샤를 통해서 사랑의 정의를 하는 것도 꽤 좋았습니다. 봉준호 영화 중에 가장 달달한 영화가 아닐까 하네요.
순응주의자와 혁명주의자
미키 17은 순응주의자입니다. 얼마나 순한지 사채업자가 보내달라는 영상을 찍기 위해서 티모가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미키 18을 죽이지 않고 미키 17이 순하다면서 미키 17을 죽이려고 합니다. 미키 17은 그런 존재입니다. 독재자의 폭정에도 순응하고 폭력에도 순응하고 죽으라고 하면 죽습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불평불만이 하나도 없이 삽니다.
자본주의에서 노예로 사는 것이 딱 어울리는 인물입니다. 반면 미키 18은 세상을 뒤집어 놓을 생각을 합니다. 불편하고 부당한 건 다 없애려고 할 정도로 과격합니다. 이 모습은 미국과 한국 사회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순응주의가 많은 나라에서 독재자는 쉽게 지배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죠. 누군가는 미키 18을 응원할 테고 누군가는 미키 17을 응원할 겁니다. 그 모습을 통해서 우리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잘 보여줍니다. 결국 세상은 순응주의자가 바꾸는 것이 아님을 아주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미키 17처럼 사람은 언제나 변할 수 있는 존재임도 좀 보여줍니다. 이 부분도 좀 다듬어서 핵심 주인공의 변화 과정을 좀 더 강렬하게 담았으면 하는데 좀 아쉽더라고요.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어린 시절 자신이 자동차 안에 있던 빨간 버튼을 눌러서 부모님이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고 믿고 살던 미키 17에게 미키 18이 그건 자동차 제조사가 잘못 만들어서 일어난 일이지 니 탓이 아니라는 소리가 인상 깊더라고요. 많은 제품이나 서비스를 이용하다 보면 제조사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이나 관공서의 문제를 자신이 물건을 잘못 뽑아서 한탄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고 재수가 없었다 식으로 처리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답답합니다.
저는 그럴 때마다 꼭 항의하고 문제점 지적에 대한 피드백을 받아서 문제를 개선하는 과정을 봅니다. 이런 저를 사람들은 불평불만주의자라고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한 마디 하죠. 세상은 불평불만주의로 인해 개선되는 것이지 좋은 게 좋은 것이다! 식으로 살면 아무것도 개선되지 않는다고 대꾸합니다.
기대를 낮추고 보면 꽤 볼만한 영화 <미키 17>
다들 <기생충>을 뛰어넘는 명작 영화를 기대하셨겠지만 쉽지 않은 걸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열광하는 봉준호 감독의 전작들은 한국적인 설정과 한국인들이 공감할 요소가 참 많았습니다. 그러나 대자본이 들어가면 글로벌적인 공감을 위해서 봉준호 감독의 날카로움이 무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기대를 잔뜩 하게 되죠. 기대보다는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재미없지는 않습니다. 다소 지루하긴 하지만 의미는 좀 더 풍부해졌으니까요.
요즘 나온 영화 중에서는 그나마 크게 볼만한 영화였습니다. 죽음에 대한 의미, 자본주의, 독재자, 순응주의, 존재 등등 꽤 많은 질문을 낳게 하는 영화입니다. 봉준호라는 이름을 가리고 보면 꽤 좋은 영화 <미키 17>이었습니다만 봉준호 감독 영화 중에서 아주 좋은 영화로는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별점 : ★ ★ ★☆
40자 평 : 풍자를 가득 싣고 우주 같은 할리우드로 진출한 봉준호 함선의 연착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