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의 사진이 세상을 바꾸기도 하지만 여러 장의 사진이 모여서 거룩한 힘을 만들기도 합니다. 한국에서 보기 드물게 히트한 사진집 <윤미네 집>은 한 아마추어 사진가가 딸이 나고 자라고 결혼하기까지의 긴 시간을 사진집에 담았습니다. 사진 하나 하나는 뛰어나다고 할 수 없지만 긴 세월의 더께가 주는 시간의 힘은 큰 공감을 자아냈습니다.
이렇게 하나의 피사체를 긴 세월동안 촬영하는 열정은 사진가의 명성을 크게 끌어 올릴 수 있습니다. 사진가 김기찬은 골목을 30년 이상 촬영한 사진가입니다. 70년대 동양방송국(TBC-TV)에서 영상제작부장을 역임하다가 전두환 군부 정권이 언론 통폐합을 추진해서 KBS 영상제작국 제작1부장으로 위치이동을 합니다. 꽤 잘나가는 안정된 직장을 지닌 김기찬은 1969년부터 주말마다 카메라를 들고 변화하는 서울의 모습을 촬영합니다
그가 주로 촬영한 곳은 서울역 뒷편인 만리동과 중림동 부근입니다. 이 중림동과 만리동은 현재 개발이 되었지만 90년대까지만 해도 달동네였습니다. 김기찬 사진가는 69년부터 2001년까지 이 중림동과 만리동 골목을 카메라에 담습니다. 지금은 수시때때로 그가 담은 만리동과 중림동 골목 풍경을 많은 서울 시민들이 보고 그 시절을 떠올리거나 서울의 옛모습을 후대에게 알려주는 역사적인 사진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골목이라는 주제를 무려 30년 동안 촬영한 김기찬은 골목을 주제로 한 사진전과 총 13권의 사진집(이중 6권이 골목을 주제로 한 사진집)을 출간합니다. 그리나 안타깝게도 2005년 향년 68세로 세상을 떠납니다. 이 책은 김기찬 사진가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지난 후 나온 책입니다. 어떻게 보면 회고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책 전반부는 김기찬 사진가가 쓴 글이 나옵니다. 1972년에 촬영한 아이를 2001년에 다시 만나서 촬영한 사진은 뭉클함을 느끼게 합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사진을 촬영하고 또 다시 사진으로 담을 수 있었던 이유는 김기찬 사진가는 골목 자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골목을 지닌 마을 사람들은 낯선이의 카메라를 반겨할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동네 사람 마냥 매일 같이 들락거리니 마을 사람들도 김기찬 사진가에게 마음을 풀어줬고 이후 이렇게 자연스럽고 생기 넘치는 골목을 담습니다. <골목을 사랑한 사진가> 앞 부분은 김기찬 사진가의 사진에 대한 에피소드들이 나옵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서울 인근의 작은 마을에 갔다가 담배를 얻어 피는 것을 넘어 밥과 술까지 얻어 먹고 나온 에피소드는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남시 춘궁동(고골), 1982. 6. 6>
그리고 이 사진이 잊혀지지 않네요. 돌담길 앞에서 환화게 웃는 꼬마 아기씨의 모습이 눈에 확 들어옵니다. 낯선 사람에게 이렇게 까지 환하게 웃어주기가 쉽지 않지만 김기찬 사진가와 꼬마의 행복감이 사진에 빛나는 보석처럼 담겼습니다.
책 후반은 김기찬 사진가 주변에 있던 동료 사진가와 다양한 사람들이 김기찬 사진가의 사진과 삶과 옛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한정식, 전민조, 김호기, 임종업, 윤한수, 최종규, 정진국, 이광수, 윤일성은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김기찬 사진가를 소환하거나 그의 사진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하기도 합니다. 이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글은 한겨레 신문기자인 임종업 기자의 글과 사진입니다.
서울역 뒷편에 있는 달동네인 만리동과 중림동이 재개발이 되면서 골목은 사라지고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섭니다. 그 변화한 중림동의 모습을 소개하면서 그의 사진의 의미를 조목조목 소개합니다.
그의 사진은 세월이 흐를수록 가치를 더한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변두리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고스란히 담았으니 골목길이 사라진 지금 그의 작품은 유일한 기록이 된 것이다.
<골목을 사랑한 사진가 143페이지 중에서>
사진의 기본 속성은 기록성입니다. 당장은 큰 의미가 없지만 세월이 흐르면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생깁니다. 실제로 이 김기찬 사진가가 촬영한 사진을 몇년 전에 서울 역사박물관에서 전시를 했습니다. 당시 꽤 많은 관람객이 그의 사진을 봤습니다. 아주 인기 많은 사진전이었죠.
서울은 거대한 생물입니다. 매일 자고 일어나면 진화를 합니다. 그러나 이 거대한 생물인 서울은 스스로를 기록하지 않습니다.기록 한다고 해도 권력자들의 행동만 기록하죠. 그러나 이런 숨은 사진 일꾼들이 마을을 기록했고 그 기록이 서울의 사진 역사책이 됩니다.
주말마다 가족들을 집에 두고 홀연히 사라지는 남편이 의심스러워 미행을 했다는 부인의 말처럼 우직함이 세상을 담은 보석 같은 사진을 만들었네요. 김기찬 사진가의 사진집과 함께 곁들여서 읽으면 좋은 책입니다. 그가 어떤 사진가였는지, 왜 그의 사진이 중요하고 의미가 깊은 지를 잘 소개한 책입니다.
김기찬이 떠난 자리에 어떤 사진가가 우리들 그리고 서울을 기록하고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