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이 암에 걸려서 투병을 하는 영화입니다."
이 말을 들으면 영화 보고 싶지가 않습니다. 이미 수 많은 영화들이 주인공의 불치병이나 암에 걸리는 불행을 관객에게 목도하게 했습니다. 이런 불편한 소재는 기여코 관객들의 눈물을 흘리게 만들지만, 그 눈물이 맑지가 않습니다. 억지로 울게 만드는 영화는 눈물이 나도 그 눈물이 상쾌하지가 않습니다.
영화 <하나와 미소시루>는 그 불편하고 흔한 소재를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원작 소설인 <하나와 미소시루>를 각색해서 영화로 만든 영화는 소재만 보면 구미가 당기지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일본에서의 영화평도 원작 소설인 <하나와 미소시루>가 일본에서 베스트셀러에 오른 것을 보고 뭔가가 다르구나라고 약간의 기대감을 가지고 봤습니다.
그리고 그 기대는 기대치를 넘어서 영화 크라이막스에 한 참을 맑은 눈물을 흘리는 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혼남 싱고와 암 환자인 치에가 결혼하다
영화는 2007년에 시작을 합니다. 유명한 블로거인 치에(히로시에 료코 분)은 뭔가 어리숙하고 철이 없어 보이는 남편 싱고(다키토 켄이치 분)와 처음 만난 이야기부터 시작을 합니다.
20대 초반의 성악가를 꿈꾸는 어여쁜 여대생인 치에를 보고 첫눈에 반한 남편 싱고는 치에를 졸졸 따라 다닙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사귀게 되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날 치에가 유방암에 걸린 것을 알게 됩니다. 유방암 수술을 마치고 치료를 하면 평생 여성 호르몬 억제재를 먹어야 하기 때문에 아기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싱고는 치에와 결혼을 합니다.
싱고는 이혼남입니다. 전 부인이 아기를 낳지 않는다고 해서 이혼을 한 전력이 있음에도 아기를 낳지 못하는 치에와 결혼을 합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아기를 같지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아름다운 신혼 생활을 합니다.
죽을지도 모르지만 하나를 낳은 치에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아기를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던 치에가 임신을 했습니다. 남편 싱고는 너무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합니다. 그러나 치에는 이런 남편이 야속하기만 합니다. 아기를 낳게 되면 여성 호르몬이 많이 나와서 다시 암이 재발할 수 있는데 남편은 좋아라만 합니다. 주변 사람들의 조언과 용기에 힘입어 죽을지도 모르지만 치에는 하나를 낳습니다. 그러나 역시나 암이 재발하게 됩니다.
억지스럽지 않은 암 투병기를 담은 '하나와 미소시루'
영화 '하나와 미소시루'는 주인공 치에의 암투병기 영화입니다. 여기까지 말만 들으면 고개를 돌리실 분이 계실겁니다. 그런데 이 영화 흔한 암 투병에 대한 클리셰를 지워버렸습니다. 우리가 흔히 암에 걸린 사람들의 행동인 화장실에서 피를 토하고 고통의 단말마를 지르고 죽기 싫다고 애원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그런 모습은 너무나도 진부합니다. 주인공의 고통이 내 고통으로 느껴지기 보다는 스트레스로 전환되어서 전달됩니다. 그런데 이 영화 다릅니다. 주인공의 암투병 과정을 담담하게 담고 있습니다. 그 무시무시하다는 항암치료 과정은 치에의 말로 대치를 하고 한 번도 암 때문에 불편해 하거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암에 대한 조크를 고민하는 모습이나 암이라는 단어 대신에 퐁이라는 단어로 말하라고 할 때는 웃기기까지 합니다.
이 영화 웃깁니다. 영화 초반부터 암 발병 사실을 밝히지만 그 이후에도 철없는 남편과 치에 모두 웃으려고 노력하고 잘 웃습니다.
그러나 그 암 투병 과정을 미화 시키거나 희화 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민간 요법을 통한 암치료 장면이나 그 민간 요법 치료비를 내야 하는 아픈 현실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치에는 철 없어 보이지만 믿음직하고 사랑 충만한 싱고의 고결한 뒷바라지는 관객들의 마음을 푸근하게 해줍니다.
너무 평범한 암 투병기라서 그런지 좀 지루하긴 합니다. 영화 중반까지 이렇다할 큰 에피소드도 두 남녀 주인공의 흔한 티격태격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큰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지루한 면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대규모 자본이 들어간 최근 한국영화의 MSG를 과도하게 투입해서 역한 느낌을 들게 하는 것 보다는 낫습니다.
하나에게 미소시루 만드는 법을 알려주는 치에
그 단조로움을 너무나도 귀여워서 깨물어주고 싶은 하나(아카마츠 에미나 분)이 귀여움으로 흔들어 놓습니다. 보자마자 수백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선발된 아역 배우겠구나 했는데 역시나 1천대 1을 뚫고 선발된 아역 배우네요. 정말 귀엽습니다. 외모도 귀엽지만 너무나도 귀여운 행동을 잘 합니다.
하나의 귀여움 때문에 영화에서 우울한 느낌은 전혀 느낄 수 없습니다. 또한, 엄마 아빠도 하나 앞에서 슬픈 표정 한 번 내지 않고요. 이런 하나에게 치에는 꼭 한가지를 강제로 배우게 합니다. 바로 '미소시루'입니다. '미소시루'는 한국으로 치면 두부 된장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 된장인 낫토를 풀고 가다랑어포와 채소와 두부를 썰어서 넣고 끊이면 '미소시루'가 됩니다. 치에는 어린 하나에게 '미소시루'를 직접 해 먹을 수 있게 가르칩니다.
'미소시루'처럼 맑은 된장국 같은 건강한 영화 '하나와 미소시루'
암 환자를 소재로 한 영화지만 역설적으로 상당히 건강한 영화입니다. 먼저 이 영화는 암 정기진단의 소중함을 깨우쳐줍니다. 치에가 정기검진을 건너 띈 그 사이에 암이 온몸에 퍼져 버립니다. 약간 계몽적이라고 할까요? 그걸 넘어서 암 환자의 일그러진 얼굴과 표정과 역정 없이 가족과 딸 하나를 위한 치에의 아름다운 사랑이 마음의 체온을 끌어 올립니다.
치에가 하나에게 '잘 먹고 잘 사는 법'을 알려줍니다. 그게 하나를 위한 일이자 하나가 자신을 기억하게 하는 끈이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시종일관 밝은 톤을 유지합니다. 특히, 마지막 크라이막스 장면은 이 잔잔하기만 했던 영화가 큰 에너지를 담았다가 터트립니다.
그냥 흔한 클리셰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악가가 꿈이였던 치에가 부르는 노래가 너무나도 아름답습니다. 노래도 아름답지만 가사에 눈물이 주루룩 흐르네요. 격정적이라는 단어가 딱 어울립니다. 지금도 주제가를 들으면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히네요.
참! '히로시에 료코'에 대한 칭찬을 빼먹었네요 90년대와 2천년대 초의 스타였던 '히로시에 료코'를 오랜만에 스크린에서 만날 수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이제는 30대 중반의 나이이고 얼굴에 늙은 모습이 많이 보이지만 여전히 료코는 아름답습니다. 오히려 암 환자 연기를 하기 위해서 메이크업도 하지 않은 모습이 더 건강해 보였습니다.
료코가 드레스를 입고 노래하는 모습은 천사가 노래를 부르는 모습 같았습니다. 아무래도 노래 가사와 아름다운 멜로디가 합창을 해서 더 그렇게 보인 것도 있네요.
저녁 노을처럼 아름다운 영화 '하나와 미소시루'
하나 앞에서 한 번도 노래를 부르지 않던 치에는 노을이 지는 저녁 햇살 아래서 조용히 노래를 부릅니다. 저녁 노을은 촛불처럼 붉은 빛을 냅니다. 수평선 너머로 태양이 사라지면 그 태양 빛의 여운이 온 세상을 붉게 만듭니다. 그 붉은 빛에 많은 사람들은 온기와 아름다움을 느끼죠. 저녁 노을 같은 영화입니다.
영화 자체는 큰 에피소드가 없습니다. 마치 블로그 포스팅을 하나 둘 씩 읽는 재미라고 할까요? 실제로 이 영화는 치에의 블로그와 싱고의 글로 엮어진 영화입니다.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사랑을 한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가 관객을 감동시킵니다. 여자 분들이 보면 참 좋을 영화입니다. 저 같이 일본 영화 감성이 잘 맞는 관객들에게도 좋고요. 억지가 인위적인 감동이나 눈물을 자극하지 않아서 더 좋았습니다. 맑은 두부 된장국에 밥 한끼 맛있게 먹고 나온 느낌입니다.
추천하는 영화입니다. 영화가 끝나고 관객석을 뜨지 않는 관객들이 꽤 많네요.
원작 소설이 궁금해서 들쳐 봤습니다.
첫 페이지 넘기자마자 울컥했습니다. 하나가 엄마에게 쓴 편지네요. 책을 들쳐보니 블로그 글을 그대로 옮겨 온 것이 많습니다. 아시겠지만 블로그에 쓰는 글들은 무슨 문학적 깊이나 재미가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어리숙하고 간단한 일기 같은 글이지만 기록성이 무척 뛰어난 매체가 블로그입니다.
블로그에 가끔 일기는 일기장에 쓰라고 하는데 치에는 블로그에 암 투병기와 하나와 싱고와의 알콩달콩한 행복한 가족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그 블로그 일기장에 글들이 친근하고 이웃집에 사는 주부가 쓴 글 같아서 아주 읽기 편하네요. 그래서 베스트셀러가 된 것이 아닐까요? 현학적인 글보다 이런 우리 주변의 삶을 기록한 글. 결코 힘들어 하거나 낙담하는 모습이 아닌 자신의 암 투병기를 적으면서 자신의 암 투병기를 통해서 용기를 얻은 다른 암 투병 환자들의 빛이 되었습니다.
치에는 그런면에서 촛불과 같은 사람이었네요. 담백하고 맑은 영화 '하나와 미소시루'입니다
평점 : ★★★☆
40자 평 : 맑은 된장국 같은 건강하고 아름다운 암 투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