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는 세계의 랜드마크가 다 있다. 파리의 에펠탑과 비슷한 도쿄탑과 작은 크기의 자유의 여신상도 있다. 네덜란드 항구를 그대로 옮겨 온 하우스텐보스도 있다. 지금은 세계적인 경제 대국이고 다양한 세계 1위의 공산품을 만드는 일본이지만 70년대만 해도 일본은 짝퉁 국가였다. 미국과 유럽에서 만든 제품들 그대로 베껴서 싼 가격에 내놓는 80년대 한국이 그리고 현재 중국이 하고 있는 행동을 했었다. 이런 행동을 우리는 손가락질한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이이토코도리' 즉 '좋은 것은 기꺼이 취한다'라는 일본식 문화 편집 방식라면 이게 바로 일본의 정체성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런가?
일본은 한국과 달리 충분히 일본어로 표현할 수 있고 신조어로 만들 수 있음에도 영어를 그대로 자신들의 단어로 사용한다. 한국 같았으면 국립국어원 이전에 무분별한 외국어 남용이라고 혼구녕이 났겠지만 일본은 크게 개의치 않는다. 그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사용하기 더 편하다면 굳이 일본 고유의 것을 고집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일본은 참으로 개방적이다. 하기야 단 몇십 년 만에 봉건사회를 버리고 서양의 전체주의 국가를 만든 나라가 아닌가. 좋으면 남이 뭐라고 하든 말든 갔다가 쓴다.
대신. 기존의 것보다 더 좋고 싸게 만든다. 이게 바로 일본이 세계적인 경제강국이 된 이유고 중국이 그 뒤를 따르고 있다. 세상엔 무에서 유를 창조한 창조는 거의 없다. 다 주변 환경과 다른 것에 영향을 받거나 영감을 얻어서 새롭게 재해석한 것이다. 애플을 봐라. 애플이 마우스를 세계 최초로 만들었나? 아니다. 이미 제록스에서 마우스와 GUI를 어깨 너머로 본 스티브 잡스가 스탠퍼드 대학에서 마우스 특허를 사서 세상에 널리 알린 것이다. 아이폰도 아이팟도 기존의 있던 기술을 재해석한 것들이다. 오롯하게 새롭게 만들어진 제품은 없다. 단지 여러 가지 좋은 점을 짜깁기 해서 좀 더 멋지게 만들었을 뿐이다.
김정운 교수를 처음 안 것은 2007년 경 전후로 아침 방송에서 처음 본 듯하다. 베토벤 머리를 한 중년의 교수가 사회 병리적 현상을 유쾌하게 설명하는 모습에 반해 버렸다. 지금은 사라진 KBS의 명작스캔들에서는 호크 교복 같은 옷을 입고 나와서 사회 비판적인 이야기 또는 세상을 명쾌하게 해석하는 탁월한 식견에 반했다.
그리고 상당히 유쾌한 모습에 더욱더 반했다. 문화 심리학자라는 보기 드문 명함으로 방송계를 종횡무진하던 김정운 교수가 어느 날부터 잘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 책을 작년 말에 발견했다. 에디톨로지? 참 낯선 제목인데 바로 읽고 싶었지만 밀린 책들을 다 해치우다 보니 이제야 읽었다.
솔직히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냥 말 만 잘하는 교수일 줄 알았다. 아니다. 내 생각이 틀렸다. 그는 교수가 맞다. 그것도 아주 말도 잘하고 글도 잘 쓰는 훌륭한 지식과 지혜 전달자이다. 게다가 컴퓨터와 IT기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교수다. 고리타분함과 거리가 먼 것은 알았지만 정신 상태는 아주 맑고 젊다. 게다가 반골 기질이 다분하다. 마치 날 보는 듯 세상 모든 것을 삐딱하게 보고 해석하려고 한다. 나보다 나은 점은 지식이 깊고 풍부하고 자신의 전하고자 하는 말을 맛깔스럽게 잘 전달한다.
그러기에 책도 내는 저자가 되었겠지만.... 이 김정운 교수를 모르는 분들은 이분의 스타일을 알려면 이 에디톨로지 맨 뒤쪽 에필로그를 읽어보면 이 분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다. 일부 소개를 하자면
그러나 유학 초기에만 "교수님 멋져요" "대단해요" 어쩌고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내 카톡을 씹어버린 처자들은 절대 용서 못한다. 김갑수(시인, 방송인)도 용서 못한다. 괴뇌하는 마지막 지식인이 좀 되어보라고, 교수도 때려치우고 일본에서 고독하게 보내면 무지하게 폼나 보일 것 일고 그 인간이 날 얼마나 '펌프질(!)' 해댔는지 모른다.
폼 나기는 개뿔! 지난 3년간 앞이 캄캄해 미치는 줄 알았다. 나는 차가운 다다미 방을 뒹굴며 어쩔 줄 몰라하는데, 정작 본인은 '종편의 스타'로 종횡무진 산다. 아무튼, 이 책이 아무리 잘 파려도 그에게 밥 한번 사는 일은 없을 거다. <에디톨로지 에필로그 중에서>
딴 이야기부터 했지만 이 저자의 활달함과 유쾌함을 미리 소개해야 이 좋은 책을 더 많이 읽을 것 같기에 저자의 발랄함을 소개했다. 이 에디톨로지라는 책은 부제인 '창조는 편집이다'라는 설명처럼 인류가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편집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기존의 정보를 재배치하고 재배열해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했기 때문에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보의 편집자에게 권력이 몰리고 있는 현 세태를 지적하고 있다. 몰랐는데 스티브 잡스는 "민주주의에는 자유롭고 건강한 언론이 중요하다.... 뉴스를 모르고 편집하는 조직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편집의 중요성을 스티브 잡스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보면 요즘 강력한 파워를 지는 사람들은 편집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나 서비스이다.
포털을 봐라, 자체 생산하는 콘텐츠도 있지만 대부분은 외부 콘텐츠를 편집해서 보여주는 것 아닌가? 검색 자체가 다른 정보를 가공 편집해서 배치하는 편집이다. 저자 김정운은 정보 부족 시대가 아닌 다양한 방식의 편집이 가능한 지식 편집의 시대라면서 인터넷상의 편집권력을 말하고 있다. 맞다. 나도 이 블로그에 여러 글을 쓰지만 오로지 내 머릿속에서 나온 글은 그리 많지 않다.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검색과 책 그리고 내 경험을 섞어서 내놓는다.
그러면 사람들은 마치 내가 그 모든 정보를 빠꼼하게 알고 쓴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100% 이해하기보다는 90% 정도 이해하고 비슷한 것을 엮어서 새로운 생각을 넣어서 생각한다. 오로지 머릿속에 모든 지식을 다 넣고 다닐 필요가 있나? 스마트폰과 인터넷에 모든 정보가 있는데 뭐라고 달달 외우나? 어디에 가면 그 정보가 있는 지만 알면 됐지. 논문도 그렇지 않나? 다른 사람들이 쓴 책과 논문을 뒤적여서 자신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버팀목으로 쓴다.
책은 르네상스 시대의 원근법을 통해서 서양의 한 가지 시선과 동양의 다원주의적인 시선을 비교한다. 불과 몇 백 년 전만 해도 서양은 동양에 비해서 과학이나 경제 문명이 발달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1개의 시선을 가진 원근법 같은 과학으로 일원화된 시선으로 집중하면서 동양을 따라잡는다.
이 과학이라는 한 가지 시선은 합리와 이성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방법론적이고 체계적이어서 보다 빨리 진격할 수 있었고 이 이성과 합리를 바탕으로 한 과학이라는 시선으로 세상을 제패한다. 그러나 서양의 이 1개의 시선으로 된 세상은 60년대를 전후로 다원주의 시선에 의해 붕괴된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다원주의적인 시선을 가진 동양의 한국, 일본, 중국은 전체주의 같은 1개의 시선만이 옳다고 말하고 있다.
에디톨로지는 편집의 힘을 여러 가지 각도와 사례로 설명하고 있다. 책 중 후반에 가면 일본의 성장과 교복 문화에 대한 이야기까지 담고 있는데 한국의 제복 문화를 곱씹어 볼 수 있는 좋은 글들이 있다.
다만, 이 책은 편집의 힘에 대한 이야기에 집중하기보다는 후반으로 갈수록 다소 산만한 편이 있다. 편집의 힘을 말하기보다는 보다 여유로운 세상이 더 큰 생각과 창조를 만들어낸다는 주장도 들린다. 주제에 집중하지 못하는 면이 있지만 프로이트가 어떻게 비판을 받았는지 심리학자라서 그런지 심리학에 대한 다양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많이 펼쳐 놓는다.
특히 눈여겨볼 대목들은 미국의 심리학의 근간이 모든 성과를 개인의 능력으로 환원하고 모든 것이 내 탓이라고 하는 개인주의에 기인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사회병리 문제나 정부의 잘못까지도 개인이 게을러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회를 개조하기보다는 죽어라도 성공비법을 담은 자기 계발서를 읽고 남들보다 더 많이 노력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런 풍경은 낯설지가 않다. 작은 미국 같은 한국은 미국의 미래를 담으려고 하는지 모든 문제를 개인 탓으로 돌린다. 네가 노력을 안 해서 네가 게을러서 니가 못나서 힘든 거지 사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자기 착취를 강요하는 사회가 바로 한국이다
포스트모더니티의 핵신을 한병철 교수는 '피로사회'라고 규정한다. 근대 후기의 성과 사회는 각 개인의 끊임없는 자기 착취의 나르시스적 장애로 몰아넣는다. 타인의 의한 착취가 아니라 '자발적 자기 착취'다 끊임없이 발전해야 한다는 일원론적 발발과 성장에 대한 강박으로 인해 주체는 죽을 때까지 안정된 자아에 도달하지 못한다 <에디톨로지 중에서>
이 책에는 정보를 편집하는 방법으로 독일 학생들이 쓰는 카드식 필기법을 소개하고 있다. 노트는 편집을 할 수 없지만 카드에 핵심 단어와 분류를 해 놓고 DB처럼 카드를 쌓아 놓고 있다가 카드를 골라서 섞어서 새로운 지식을 만드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 독일 학생들의 카드에 적는 필기법을 따라 해보고 싶다.
그리고 김정운 교수는 에버노트로 정보를 체계적으로 분류 저장한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지는 정보 검색을 통해서 알아보고 따라 해보고 싶다. 책 후반에는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필요한 부분만 읽어도 된다면서 재미있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읽지 말라도 해도 읽는다고 말한다. 약간 당한 느낌이지만 책이 참 좋다 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순차적으로 읽어서 억울한 것은 없다. 정보 편집의 시대라고 아무 글이나 섞어서 소개하는 것이 아닌 자기 주관이 바로 선 상태에서 정보를 편집해야 그 편집된 새로운 정보가 생명을 얻을 것이다. 추천하는 책이다. 여러 가지 흥미로운 내용들이 꽤 많다. 특히, 한국 사회의 병리현상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요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