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을 잘 두지도 좋아하지도 않습니다만 바둑의 매력은 알고 있습니다. 바둑의 매력은 장기 보다 더 복잡하고 엄청난 전략과 전술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대로 하려면 꽤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고 오래 둬야 합니다. 기 오래 둬야 하는 느린 속도 때문에 장기보다 바둑은 인기가 높지 않았습니다. 바둑판은 오목 둘 때 사용하는 용도로 많이 사용했죠.
그러나 어렸을 때 어른들끼리 3시간 이상 걸리는 바둑을 두는 모습을 보면서 신기했습니다. 한 수를 두는데 엄청나게 긴 시간을 가지는 모습이 지루하지만 장기에서 볼 수 없는 진지함이 있어서 바둑은 한 세계를 만드는 과정 같았습니다. 그렇다고 장기가 진지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고 바둑보다는 박진감 넘치고 간단해서 좀 더 대중적이고 작은 세계 같았습니다.
바둑을 좋아하지도 잘 하지도 못하지만 조훈현, 조치훈이라는 이름은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공중파에서 거의 볼 수 없는 바둑 중계방송이지만 80년대는 꽤 많이 중계를 했습니다. 아마도 조훈현과 조치훈이라는 한국 선수들의 맹활약이 한 몫했겠죠. 여기에 항상 일본 바둑 밑에 있는 하수로 취급받던 한국 바둑이 일본을 앞서는 시대가 시작 된 것이 80년대였기 때문도 있을 것입니다.
아직도 기억나네요. 조훈현 9단, 고바야시9단, 얼굴은 모르지만 이름은 많이 들어서 익히 알고 있는 이름입니다. 그중에서 조훈현 9단은 한국 바둑을 세계에 알린 분입니다. 뭐 한국,중국,일본만 하는 듯한 바둑이지만 일본의 그늘 밑에 있던 한국 바둑의 위상을 정상급으로 올려 놓았던 분입니다.
이 조훈현 9단이 쓴 책이 '조훈현, 고수의 생각법'입니다
바둑 고수 조훈현이 들려주는 인생 이야기
이 책은 조훈현 바둑기사가 쓴 자서전이기도 하지만 정통 방식의 자서전을 따르고 있지는 않습니다.
총 10단으로 나눠서 바둑 훈수를 빙자한 삶에 대한 조언을 담고 있습니다. 바둑 에세이가 가장 합당한 분류 같네요
책은 1단, 바둑 고수가 말하는 생각의 법칙부터 10단, 생각할 시간 만들기까지 평생 바둑만 둔 조훈현이 바둑을 하면서 느낀 생각을 인생에 빚대면서 독자에게 조언을 해주고 있습니다.
아! 조훈현 바둑 기사를 모르는 분들이 있겠군요. 그분들을 위해 잠시 소개하겠습니다. 1953년 목포에서 태어난 조훈현은 어렸을 때 일본으로 건너가 바둑 유학을 합니다 수년 동안 일본에서 실력을 닦은 후에 한국으로 건너와서 한국을 대표하는 프로 바둑 기사가 됩니다. 1989년 한,중,일의 최정상 기사들이 참가한 바둑 올림픽인 잉창치배에서 세계 일류 기사를 차례로 꺾고 대회 첫 우승을 하면서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립니다.
이후 지금까지 세계 최다승인 1935승과 세계 최다 우승인 160회를 기록한 바둑 기사입니다. 조훈현은 바둑 고수를 넘어 바둑의 신입니다. 그에게는 국수(國手)라는 거룩한 수식어가 붙습니다.
조훈현 바둑 기사를 보면 참 신기합니다. 보통 스포츠는 전성기를 지나면 서서히 은퇴를 준비하고 코치가 되고 감독이 되어서 다시 스포츠계로 돌아옵니다. 플레이어가 아닌 관리자도 돌아오죠. 바둑도 전성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전성기가 지났다고 해서 은퇴를 하고 관리자나 매니저나 감독이 되는 것이 아닌 나이가 많아도 새까만 후배들과 바둑을 둡니다.
특히 자신이 키운 제자와 결승전에서 맞붙는 진기한 풍경도 많이 보입니다. 조훈현은 자신이 키운 제자인 이창훈과 바둑대회에서 많이 만나게 되는데 제자와 스승간의 대결이라고 해서 큰 이슈가 되었던 것이 기억나네요. 야구나 축구나 농구 같은 스포츠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이죠. 지금도 현역으로 활동 중인 조훈현 기사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쓴 책이 이 '조훈현 고수의 생각법'입니다.
책은 넘기면 조훈현을 세상에 알리고 스타로 만들어준 1989년 잉창지배 결승전 부터 그려지고 있습니다. 수 많은 우승을 한 조훈현이지만 그에게 있어서 인생의 변곡점을 그려준 우승이 1989년 잉상치배가 아닐까 합니다. 그렇기에 가장 서두에 두지 않았을까요?
책은 조훈현의 성장기를 그대로 따르는 방식은 아닙니다. 선형적이 아닌 비선형적으로 과거와 현재를 하나의 주제로 묶어서 독자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는 어떤 생각의 룰을 제시하고 자신의 바둑 세계의 경험을 삶의 경험으로 연결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런 방식은 자칫 잘못하면 나이든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하는 흔한 삶의 훈수 같이 느껴져서 식상할 수 있습니다. 이 책도 그런 식상함이 아예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 훈수하는 방식이 내가 이렇게 살았으니 너도 이렇게 살어!라는 강압이 아닌 인자한 할아버지가 손주나 아들에게 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전해주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좋은 점은 바둑을 잘 모르지만 바둑 세계가 생각보다 깊고 넓고 예의로 꽉 찬 세계라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 제가 감동 받은 부분을 몇 개 소개하겠습니다.
조훈현을 키운 것은 일본의 세고에 선생님이었습니다. 일본 거물들도 존경하는 바둑계의 거목이죠. 그런데 일본인도 아닌 한국의 어린 조훈현을 제자로 삼고 숙식을 제공하면서 조훈현을 보듬고 키워냅니다.
인품과 인격을 어떻게 가르치겠는가. 매너는 가르칠 수 있어도 인품은 못 가르친다. 가르치려고 덤벼드는 것 자체가 어쩌면 그 사람을 망가뜨리는 것일 수도 있다. 인성, 인품, 인격은 그냥 보여 주는 것이다.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제자가 보고 배우게 하는 것이다.... 중략...
가장 가난한 부모는 돈이 없는 부모가 아니라 물려줄 정신세계가 없는 부모다.
<조훈현의 고수의 생각법 62~63페이지>
절대 공감합니다. 많은 어른들이 부모들이 젊은 세대나 자식에게 그렇게 살지 말어, 이렇게 살어라고 입으로 훈계합니다. 그런데 그런 훈계를 하는 나이든 사람과 부모는 젊은 사람에게 꼰대로 비춰질 뿐입니다 왜냐하면 나이든 사람이나 부모의 행동은 정 반대로 하면서 말만 이렇게 살아라라고 하기 때문이죠. 언행불일치를 젊은 사람들은 귀신 같이 압니다.
말로 하지 마세요. 몸으로 보여주세요. 백날 입으로 책 좀 읽어라!라고 아이들을 다그치지 말고 부모님이 먼저 거실 TV를 끄고 책을 읽는 모습을 보여주면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따라서 책을 읽게 됩니다. 아빠가 공중도덕을 잘 지키면 아이들도 공중도덕을 잘 지킵니다. 아이들은 스펀지 같은 존재들이니까요.
조훈현 바둑 고수가 "가장 가난한 부모는 돈이 없는 부모가 아니날 물려줄 정신세계가 없는 부모다"라는 말에 뜨끔하면서도 동시에 큰 공감을 하게 되네요. 점점 물질 세계에 흡수되고 있는 한국에서는 더더욱 저 문장을 마음에 세기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책은 이런 식의 정신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참 많습니다. 아무래도 수많은 전략과 전술을 예측하고 대비하고 공격해야 하는 바둑 고수가 정신 수양하는 법을 잘 알기 때문이겠죠. 특히 세고에 선생님과 조훈현 그리고 조현현의 제자인 이창호로 이어지는 바둑의 유산은 감동스럽습니다.
'조훈현 고수의 생각법'은 바둑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생각보다 흥미로운 바둑계의 흥과 망 그리고 그 뒤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승부와 바둑계에 대한 훈수도 가득 담깁니다. 특히, 일본 바둑이 폐쇄적으로 흐르는 모습에 한국인의 시선이 아닌 바둑인의 시선으로 쓴소리를 하는 모습도 보기 좋네요. 특히 제가 바둑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 복기입니다.
저는 잘 몰랐는데 바둑은 대국이 끝나면 승자와 패자가 앉아서 복기를 합니다. 복기를 할 때 그냥 복기 하는 것이 아닌 상대에게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이에 승리자의 전략과 전술이 밝혀지기도 하는데 그 전략 전술을 배운 패자는 조금 더 진화를 하게 됩니다. 보통의 세상에서는 한 수 알려 달라고 하면 돈을 받거나 자신의 노하우라면서 비법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맛집의 비밀을 알려주는 맛집이 거의 없듯이요. 그런데 바둑은 다릅니다. 복기를 하면서 자신의 전술을 말해줍니다. 특히 이창호 9단은 호텔방으로 찾아온 중국 바둑 기사에게 친절하게 복기를 해줘서 중국인들에게 큰 인기를 끕니다. 바둑은 한,중,일 국가 대항전이 가장 흥미롭지만 바둑 고수끼리는 경쟁자라기 보다는 동료의식이 무척 강합니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세고에 선생님 같은 큰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세고에 선생님이 외국인인 조훈현을 거두어들이지 않았다면 한국 바둑은 성장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반대로 한국 기원이 중국 여성 바둑기사를 받아 들이고 키운 것도 경쟁자이지만 동료라는 인식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죠
이외에도 조훈현의 바둑 게임 제작에 참가한 이유나 한,중,일 바둑 삼국지와 호주의 바둑 고수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롭습니다. 특히 최근에 바둑의 중심점이 일본에서 한국을 지나 중국으로 향하는 모습도 잘 읽힙니다.
여기에 차민수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롭습니다.
차민수는 드라마 올인의 주인공인 전문도박인이지만 그전에는 바둑 고수였습니다. 평소에 친분이 있던 조훈현과 군대에서 만나서 대결을 한 일화도 소개되네요. 읽으면서 알았는데 조훈현이 저 군대 및 부대 선배시네요. 어쩐지 군대에 있을때 가끔 조훈현 9단 이야기가 나왔는데 같은 부대 출신인 줄 책을 읽으면서 알았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수시로 느낀 것은 바둑 고수 조훈현을 넘어서 생각 고수 조훈현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은 것에 집착하지 않고 큰 그림으로 세상을 보는 인자한 노인의 시선이라고 할까요? 자신을 밟고 넘어가야 하는 제자를 키우면서 그 길을 막지 않고 비켜주는 대인배, 그리고 그 대인배는 하나의 정신적 유산이 되어서 다른 바둑 기사들에게 전수되는 모습을 보면서 깊이 있는 생각에 큰 느낌을 받았습니다.
기승전 잔소리라는 느낌보다는 삶의 훈수로 느껴지는 내용이 많네요. 훈수는 말 그대로 훈수 일 뿐 따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훈수가 도움이 되는 것은 확실하죠.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멘토를 찾고 나를 훈수해 줄 사람을 찾고 있는 것 아닐까 하네요
바둑을 좋아하는 분도 저처럼 좋아하지 않는 분들도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바둑 이야기와 함께 삶의 이야기가 가득 담겨 있는 책입니다. 특히 세고에 선생님 이야기는 감명스럽네요.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저절로 머리를 숙이게 하는 이유를 알게 해주네요
바둑의 인기가 사라져가고 있는 현재, 작년에 바둑을 삶에 빗댄 드라마 '미생'으로 바둑 열기가 살짝 올라갔습니다.
드라마 미생에서 조훈현 바둑 기사를 볼 때 너무 반가웠는데 그 영향이었는지 이런 책도 내셨네요. 가볍게 읽어 볼만 한 책 "조훈현 고수의 생각법'입니다.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 받아서 주관적으로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