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에게 좋았던 단 하나는 2014년이라는 악몽을 숫자로나마 칸막이를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 좋았습니다. 저에게 있어 2014년은 내 인생 최악의 한 해가 아녔을까 할 정도로 잊고 싶은 사건 사고가 너무 많았습니다. 세월호 사고와 신해철의 의료사고에 의한 사망은 저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습니다.
신해철은 제가 가장 좋아했던 뮤지션이자 철학자였습니다. 10대부터 20대 초 중반까지 그가 쓴 노래의 가사와 인터뷰 기사와 방송을 들으면서 신해철의 달변을 통한 통찰력 높고 질 높은 생각은 저에게 롤 모델과 멘토가 될 정도로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특히, 뛰어난 멜로디와 그 어떤 가수나 작사가도 범접할 수 없는 깊이 있는 사유가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가사는 앞으로도 어떤 가수도 그 주옥같은 가사를 만들지 못할 것입니다.
며칠 밤을 그의 노래를 들어도 허망한 가슴은 메어지지 않았습니다. 흐린 창문 사이로 하얗게 별이 뜨던 그 교실에서 듣던 신해철의 노래를 이제는 더 이상 들을 수 없네요. 달변가이자 뛰어난 문장력을 구사하는 신해철이 직접 쓴 자서전 한 권 정도가 나왔으면 했는데 불행 중 다행스럽게도 신해철의 PC에 'book'이라는 폴더에 신해철이 오랫동안 틈틈이 쓴 글들이 있었고 이 글들을 추려서 출간한 책이 바로 '신해철'의 유고집인 '마왕 신해철'입니다.
전 마왕 신해철 세대는 아닙니다. 무한궤도 신해철 세대죠. 귀공자 같은 외모로 단 한 번에 세상을 뒤집어 놓고 수많은 팬을 생성한 신해철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가수 같았습니다. 여기에 유명 대학 출신이라는 후광까지 받으니 저는 당연히 돈 많은 집에서 곱게 자란 가수인 줄 알았고 지금까지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유고집을 들쳐보니 신해철 팬이지만 그가 수년간 진행한 심야 라디오 방송인 '고스트 스테이션'을 거의 듣지 않은 관계로 인간 신해철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내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기억을 다시 리콜시켜 놓고 내 신해철에 대한 기억에 신해철의 과거를 껴 맞추면서 책장을 넘겼습니다.
책장을 넘기면 인생의 첫 죽음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학교 앞에서 사온 병아리의 죽음을 통해서 삶과 죽음을 느끼게 하는 가사와 아름다운 멜로디로 현재의 20대 분들도 좋아하는 노래입니다. 신해철의 수많은 히트곡이 있지만 그가 떠난 후 가장 사랑받았던 노래가 바로 이 노래가 아닐까 하네요.
이 신해철 유고집 '마왕 신해철'은 총 3부로 구성 되어 있습니다.
1부는 신해철의 청년기및 음악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고 2부는 활발한 사회에 대한 쓴소리를 했던 사회에 대한 쓴소리가 가득한 신해철이 바라본 세상 그리고 마지막 3부에서는 갑작스럽게 떠난 신해철을 추모하는 팬과 유명 동료 가수와 평론가가 쓴 글이 적여 있습니다. 이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1부 그것도 어디서도 자세히 들어보지 못한 (고스트네이션에서는 했을 것 같지만) 신해철의 유년 시절과 무한궤도의 결성 그리고 1988년 대학가요제에서 우승하기까지의 자세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신해철의 꼬꼬마 시절을 자신이 묘사하는 모습이 너무나 생생해서 보면서 낄낄거리면서 읽었습니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다듬어지지 않은 글의 흔적이 가득합니다. 탈고를 거치지 않는 날 것 그대로의 느낌? 책 전체는 신해철 특유의 자유로운 발언과 자유로운 욕설(심하지는 않음)을 곁들이면서 아주 쉽고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하는 편안한 구어체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아주 쉽게 읽히며 동시에 신해철 본인이 옆에 앉아서 자신의 유년 시절과 대학가요제까지의 이야기를 맥주를 시켜 놓고 밤새 듣는 듯한 생생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불같은 성미와 도색 잡지를 보다가 걸렸지만 어머니를 설득해서 도색 잡지를 되돌려 받았던 이야기와 놀랍게도 대학가요제 대상을 타고도 큰 칭찬받지 못한 대학가요제 수상 후 이야기와 무한궤도가 결성되기까지의 과정을 신해철 특유의 오버스러운 말투가 그대로 활자화된 듯한 느낌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글은 이성과의 첫 경험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첫 경험 이야기입니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자신의 자서전(신해철이 직접 셀렉팅을 하고 탈고를 했어도 꼭 넣었을 듯, 그게 신해철이니까)에 이성과의 첫 경험을 적나라하게 적을까요? 비록 사창가에서의 첫경험이었지만 그 경험담을 진솔하고 꾸밈없이 적어내는 신해철의 모습을 보면서 역시.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네요.
신해철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항상 사회 비판적이고 모두가 찬성 할 때도 혼자 반대표를 던지는 반골 기질이 강한 투사였습니다. 다만, 이런 모습이 솔로 앨범을 낼 때는 잘 보이지 않았다가 그룹 넥스트를 결성하면서 점점 사회 참여를 하는 행동이 짙어지게 됩니다. 음악 이야기는 모든 앨범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 않습니다, 아마 시간이 더 있고 제대로 글을 썼다면 제가 가장 좋아했던 신해철 1집과 2집에 대한 신해철 본인의 생각을 들을 수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이 부분은 빠져 있네요. 대신 내가 잘 모르던 무한궤도 멤버들과 대학가요제 결선 과정을 생중계하듯 빽빽하게 묘사를 합니다. 여기에 대마초 사건도 살짝 거론되고 잠시나마 참여했던 대학 시위 그리고 유명 가수가 된 후 수많은 억측으로 만든 스캔들 등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해철이의 추천 명곡 15선과 해철이의 추천도서 25선은 꽤 진지하게 읽었습니다. 신해철은 영화를 좋아하지 않지만 SF 소설 광팬이라고 하는데 저도 SF소설로 책 읽기의 즐거움을 알았습니다. 신해철이 추천한 책들은 즐겨찾기 해놓고 봐야겠습니다.
2부 마왕, 세상에 맛서다에서는 음악가가 아닌 독설가 신해철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신해철이 어떤 사안이나 사건에 대한 신해철만이 할 수 있는 쌍욕을 섞어가면 직격탄을 날리는 통쾌한 직설 화법이 가득합니다. 몇몇 글들은 예전에 읽어 본 것도 있고 가끔 들었던 고스트 스테이션에서 들었던 내용도 있습니다.
2부 내용은 이 책과 함께 거의 신해철이 10년 간 진행 한 '고스트스테이션'이라는 라디오를 팟캐스트로 들어 볼 것을 권합니다. 3부는 추모의 글이 적혀 있습니다.
이 중에서 제 눈시울을 붉히게 한 것은 신해철이라는 감성 풍부한 아티스트를 만든 신해철의 어머니의 글입니다.
하느님, 제가 언제 대단한 아들, 훌륭한 아들을 원했습니까?
난 단지어린 손주들과 버릴 곳 하나 없는 알토란 같은 어미 옆에서 같이 떠들고 웃어줄 그냥 아들이 필요한 것뿐인데 그것이 그리도 큰 욕심인가요?
어쩌면 신해철은 아들 신해철이 아닌 가수 신해철로 더 오래 살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신해철 어머니로부터 잠시 빌려 쓴 것 같은 느낌이 들더군요. 어머니의 원망 어린 글을 보니 다시 신해철이라는 거목이 쓰러졌음을 새삼 깨닫게 되네요. 전체적으로 덜 다듬어진 듯한 느낌입니다. 어떤 흐름을 가지고 책이 만들어진 것이 아닌 편곡을 거치지 않은 작곡 상태의 글들을 그대로 담아서 약간 튀는 것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신해철 팬으로서 이런 책으로나마 잘 몰랐던 신해철의 옛이야기와 그의 생각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신해철은 이타주의자였습니다. 자신에게 날아올 돌팔매질을 알면서도 다른 사람의 억울함과 고통을 대변해주고 실제로 돌팔매질을 많이 당했습니다. 자신의 이익보다는 비록 자신이 욕을 먹더라도 사회가 한 뼘 더 자라게 할 수 있는 자리라면 마다하지 않고 찾아갔습니다.
노무현 정권을 지지하고 찬조 연설을 했지만 이라크 파병을 반대하고 문신의 법제화, 대마초에 관한 100분 토론 등 그는 자신의 뛰어난 언변이 필요한 약자나 소수자를 위해서 자신의 이미지가 구겨지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갔습니다. 어쩌면 내가 마음 아팠던 것은 가수 신해철이 아닌 사회운동가 신해철의 부재가 더 아픈 것 같네요
그는 떠났지만 수많은 아름다운 가사가 담긴 노래와 이 한 권의 책이 그를 기억하고 기억하고 또 기억하게 할 것입니다. 민물장어로 태어나 바다로 가고자 했던 영원한 아웃사이더였던 신해철. 아웃사이더 냄새가 가득한 책이 바로 '마왕 신해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