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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사진/사진전시회

대한민국이 잊고 사는 것들 - 사진전 나는 대한민국에 살고 있어

by 썬도그 2010.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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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에게 -

‘나는 대한민국에 살고 있어’

 

20살이 채 되기도 전, 난 카메라 한 대를 울러 매고 어슬렁거리는 낭만의 삶을 택했어.
인생은 그렇게 아름답기만 한 줄 알았지.
하지만 내가 카메라를 메고 둘러본 세상은 그리 낭만적이지만은 않더군.

1998년 나는 내가 분단국가에 살고 있음을 알았지. 중국 연변지역에서 바라본 북한에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반공포스터에 자주 등장하던 머리에 뿔 달린 괴물은 없었고, 황폐하고 적막한 침묵이 흐르는 곳이었던 것 같아. 난 연변에서 숨어 지내는 꽃제비 아이들이 벌린 손에 가슴이 와르르 무너졌어. 내 어렸을 적 보았음직한 친구들이 먹지 못해 채 자라지 못한 손을 내밀며 나에게 하루 끼니를 때울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했지.

친구야, 난 세상에 태어나 내가 그렇게 미안했던 적은 아마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아. 그때까지 난 북한이란 곳이 실제로 존재하는지조차 모르고 지냈지. 무관심했단 말이야. 그러나 그 아이들을 보고는 이념이 달라 서로 싸우다 3.8선을 긋고 아직도 내가 옳다, 니가 그르다, 넌 나쁜놈, 난 좋은놈 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 난 서글프기 그지없어. 그냥 우리 아이들이고 우리 형제들인데 말이야.

난 그때 어떤 정의감 같은 것 때문이었는지 이 사실을 좀 더 알려야겠다는 마음으로 다시 중국을 찾아 숨어 지내는 탈북아이들을 만나며 사진을 찍기 시작했어. 하지만 셔터를 누르는 일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고, 사진을 찍을 때마다 어떤 죄책감에 싸여야 했지. 난 처음으로 사진 찍는 일을 택한 걸 후회했던 기억이나. 지금도 그때 만난 아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멍해지네.

내가 사실 이렇게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한건 얼마 되지 않았지. 어느 날 TV에 나온 어떤 여성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을 보고는 사실 많은 충격에 빠졌어. 아, 세상을 본다는 것은 저런 관점이 있는 거지…. 그 후 나는 광주에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쉼터에 다니며 설거지도 하고 할머니들의 말동무도 해드리며 자주 그곳을 왕래했어. 그러던 어느 날 지금은 돌아가신 박순덕 할머니께서 나에게 다시 카메라를 들 수 있는 용기를 주셨어. 그때까지만 해도 난 내 카메라로 어디를 봐야할지를 몰랐었거든. 할머니는 사진 찍는 놈이 와서 사진은 안 찍고 왜 엉뚱한 짓만 하냐며 내 카메라 앞에서 손수 포즈까지 취해 주셨지. 그때부터 난 세상을 보는 다른 눈을 선물 받았어. 그때가 1997~8년 때쯤이었고, 지금은 박두리 할머니를 비롯한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지만 아직도 일제강점 당시 일본에 받은 상처는 고스란히 남아 해결되지 않은 채 시간만 흐르고 있는 거야. 900회를 넘은 일본대사관 앞 수요시위에도 그때 그 지식인은 참여했는지 궁금하네. 어느 신문사 기자라고만 알고 있는 그 사람은 취재 목적이 아닌 그저 할머니들과 한목소리를 내기 위해 매번 그곳을 찾던 것 같았는데….

친구야, 나는 그런 대한민국에 지금 살고 있어.

언젠가 성남의 비탈진 언덕을 카메라 한 대를 메고 어딘가 분주히 떠나던 나를 보고 울음이 왈칵 쏟아졌다고 했지? 그 울음의 의미는 무엇이었는지? 다른 사람들이 별로 관심 갖지 않는 재미없는 일들에 매여 종종거리고 다니는 내가 안쓰러워서였나? 아니면 '세상을 바꾸고 싶다'던 나의 그 부질없음에 흘린 눈물이었나?

친구, 내가 그랬잖아. 이제 알겠다고. 세상을 바꾸고 싶으면 나를 바꿔야 한다는 걸 이제 알았다고. 나에 대한 끝없는 성찰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원동력임을 알았어.

사진을 찍으며 제일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라면 러시아의 황량한 벌판에서 채소 한웅큼씩을 내놓고 팔고 있던 고려인들을 취재할 때였던 거 같아. 백야의 시베리아. 덜컥거리던 소련재 트럭을 타고 옛 고려인들의 흔적을 찾아 뒤질 때, 10시간에서 20시간은 기차를 타야 다음 행선지에 도착하던 기억, 재래시장에서 만난 고려인들, 우즈베키스탄 김병화 농장에서 만난 고려인 할머니, 할아버지들, 바이칼 호수… 모두 행복한 기억이네.

러시아에서 만난 고려인들은 나에게 어떤 자부심 같은 것을 안겨주었어. 이제까지 사진기를 통해서 보던 세상은 일제식민지 시절의 뼈아픈 잔상과 6.25 전쟁이 남긴 분단의 아픔, 그리고 21세기 대한민국에서 행해지고 있는 외국인들에 대한 인종차별 등이었어. 그것들은 나에게 적지 않은 상처를 주었지. 하지만 고국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그리움으로 전통과 언어를 지키며 살고 있던 고려인들은 고된 현실을 이겨가면서 뜨거운 민족애를 가슴에 지니고 살고 있었어. 냉전시대에 남한이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다던 구소련의 여가수는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르다 잡혀가는 일이 있은 후 우리말을 후손들에게 가르치는데 앞장서고 있대. 이렇게 우리는 뜨거운 가슴을 갖고 있었어. 그랬기 때문에 선조들은 우리에게 목숨 바쳐 독립된 나라를 물려주고 피 흘려 민주주의를 안겨줄 수 있었던 것 같아.

친구야, 난 세상을 살며 약간의 비열함도 배웠어.

어떡하면 힘 있는 자들에게 잘 보여 좀 편한 길을 갈 수 있는지도 알거 같고, 어떡하면 이 철저한 자본주의 체제에 적응하며 잘 나가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도 어렴풋이 알거 같아. 어느 날 봉천동의 마지막 달동네가 철거된다는 소식에 나도 그곳을 한번 찾은 일이 있어. 그 길엔 어린 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장난감들이 괴물 같은 포크레인에 밀려 황폐한 모습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어. 난 그때 빨갛게 칠해진 벽면의 구호들을 등지고 나도 큰 포크레인에 밀릴 것 같은 공포감에 얼른 그곳을 떠났지. 그러면서 톨스토이의 ‘사람에게는 얼마의 땅이 필요한가’를 되 뇌이며 버스에 올랐어. 욕심, 집착… 그것에 대한 질문이었겠지?

성남의 가파른 언덕을 오르다보면 세상의 단편들을 볼 수 있어. 난 모퉁이 한쪽 허름하게 자리 잡은 맥주집 단골이었지. 저쪽 신시가지 높고 잘빠진 건물 안에 있는 미끈한 어떤 술집보다 나는 그곳을 좋아했어. 거기선 하루 일과를 마친 사람들의 땀과 푸념이 섞인 에세이들이 줄줄이 엮여지지. 큰 길에 하루가 멀다하고 생기는 성인용 온라인 게임방에 희미한 지푸라기 희망을 걸고 도박을 하던 사람들의 몰락. 치솟는 전세값에 둥지를 더 높은 지대로 틀수밖에 없던 신혼부부들. 싸움이 잦고 오토바이 굉음으로 한밤중 한번은 깨야하는 곳. 올라가다 올라가다 다시 외각으로 밀려나는 사람들은 방송에서 끝없이 쏟아내는 일등 신화들에 주눅 들려 죄지은 사람처럼 살아가. 그곳이 우리가 사는 동네야.

‘가난한 사람들에게 권력을!’ 한 나라의 대통령이 내건 캐치플레이즈. 극심한 빈부격차를 해소시키고자 절대 권력 거대공룡과 싸우고 있던 베네수엘라. 가난한 사람한테만 돈을 빌려주는 그라민 은행. 아무도 믿지 않았던 그라민 은행의 원금 회수율. 그것은 사람에 대한 믿음이 없었으면 절대 시작 할 수 없던 일이었을 거야. 이런 시스템들에 내가 관심을 가진 건 성남을 통해 본 우리사회의 극심한 양극화 때문이었어. 최고가 못 되더라도, 돈이 많지 않더라도 사람이기 때문에 대우 받고 사랑받는 세상을 갈망했던 것 같아.

산청, 부모님이 사시는 지리산 자락에 앉아 있자니 바람이 꽤 좋군. 이곳도 60년 전 좌익과 우익이 치열하게 대립하던 곳 중의 하나였어. 아버지가 젊었을 적 겪었던 6.25전쟁을 나는 자주 듣고 있어. 지금까지도 이 작은 마을에는 각 집마다 좌익과 우익의 명패들이 한국전쟁의 잔흔처럼 남아 있어. 비료를 준다고 도장을 찍으라더니 나중에 보도연맹으로 분류돼 영문도 모르고 학살당하는 게 전쟁이라는 것. 전쟁 발발 60년이 되는 해, 아직도 이 무고한 사람들에 대한 어떤 명확한 해결도 나고 있지 않아. 그런데 국민들은 월드컵에 미쳐 날뛰고 있을 때 미국에게 전시작전권 전환을 슬그머니 연기해주고 자기들끼리 박수치는 쇼를 봐야하는… 이런데도 우리는 우리가 이 지구상의 하나뿐인 분단국가임을 잊고 살며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망각하는 죄를 짓고 있어. 이제 이런 일들은 정치가들의 구호로만 작용하고 있을 뿐 모두 집단 최면에 걸린 듯 무관심이란 무서운 질병을 앓고 있지.


산청집에서 키우는 개가 강아지 네 마리를 낳았어. 너무도 귀여운 네 마리 강아지에게 나는 세.계.평.화. 라고 이름을 지어주었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이런 거라네, 친구.

난 지금 그런 대한민국에 살고 있어.

2010.7  사진작가 김지연


사진의 마력은 세상에 존재하지만 우리가 존재한다고 알지 못하는 존재들을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우리앞에 들이민다는 것에 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걸 어렴풋이 알지만 그 실체를 보지 못한 굶어 죽어가는 아프리카 혹은 우리주변에서 밥굶고 지내는 아이들 혹은 불법체류자라는 낙인이 찍혀  단속에 조마조마하면서 사는 외국인 노동자들.  굶어죽지 않기 위해 서슬퍼런 압록강을 건너서  꽃제비로 사는 탈북 아이들.   외모와 언어만 보면 분명 한국인이지만 러시아 한복판에 사는 고려인들

이런 존재들을  사진작가 김지연은  카메라로 담아  서울 한복판 인사동에 있는 관훈갤러리에 전시회를 가졌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이곳이 김영섭 사진화랑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름이 바뀐건지 제 기억의 변조가 생긴건지 관훈갤러리로 바뀌었네요. 원래 관훈갤러리인제 제가 잘못 알고 있었던것 같기도 하구요.


관훈갤러리는 올때 마다 느끼는건데 오래된 건물 냄새가 나면서 그 냄새와 운치가 결코 싫지가 않습니다. 이런 오래된 건물을 오히려 서울시에서 잘 보존하고  홍보했으면 하네요.  전형적인 일제시대 풍 건물 계단을 올라갔습니다.



전시장으로 향하는데  카메라 모터드라이브 소리가 들려옵니다.  사진작가 김지연씨가  카메라기자인듯한 분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네요.




2층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사진이 가득했습니다.



종군위안부 김순덕 할머니, 1998




얼마전 일본총리가 이전보다 강한 사죄의 말을 했었는데  정말 사죄한다면  이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무릎끊고 사죄해야 합니다
독일 메르켈 총리처럼  홀로코스트 박물관에 가서 사죄를 해야죠.  그냥 고개만 까딱이면 안됩니다. 하지만  일본수상 칸의 행동이 이전 총리들보다 많이 변했으니 그 변화에 주목해 보고 싶습니다. 



탈북한 어린이, 1999

2년전에 본 탈북자 어린이의 이야기를 담은 크로싱을 보면서 어떻게 지근거리에 있는 땅에서 저런 잔혹한 풍경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같은 민족 같은 언어를 쓰는 동족이라는 사람들이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사는 것을 보고 많이 당혹해 했습니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런 현실을 알고 있었죠.  그러나 우리는 외면하기 바빴고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고  그 현실을 자신의 반공정신에 이용해먹을려는 무리들도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굶는 북한주민에게 쌀을 보내줄려는 모습은 사라지고  자신의 주장 즉 무찌르자! 공산당을 외치기 위해 탈북주민들과 현 북한주민의 참혹한 현실을  이용하는 무리들도 별로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 무리들은  북한주민의 기아를 해결할려는 목적보다는  자신들의 생존이유를 증명할려는 모습같아 보여서요

생존이유요? 뭐겠어요.  북한정권 부서트리기 위해서  생존하는거죠.

위 아이의 사진에 가슴이 먹먹해 졌습니다. 자신의 크기만한 아기 인형을 안고서 얼굴을 커텐으로 가리고 있네요.


탈북자 아이들 즉 꽃제비들은  중국 국경인근에서  한국인 단체의 도움으로 생명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리라라는 글귀를 보니  그 한국인 단체는 기독교 단체인듯 합니다.

궁금한게  영화 크로싱에서도 그렇고 한국의 기독교 단체는  이 탈북자들을  정말  많이 돕습니다.
영화 크로싱에서 차인표는  아내에게 줄 의약품을 준다는 선교사의 말에 솔깃해서  한국으로 본의아니게 망명하게 됩니다.
아내에게 줄 의약품을 원한거지 한국망명을 원하는것은 아니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차인표는 아내와 생이별을 하게 됩니다.

한국에 오게 되어 성경책을 쥐게 된 차인표. 그는 어느날 분노의 울부짖음을 짓죠. 차인표 연기 참 많이 봤는데 최고의 연기가 쏟아져 나옵니다.   북한에서 아내의 치료약을 찾기 위해서 목숨걸고 압록강을 건넜는데  한국에서는 그 약이 보건소에서 공짜로 나눠주는 모습에 울부짖습니다.

탈북자를 돕는 기독교 단체의 숭고한 정신은 안겠지만 부디  자신들의 종교를 저 미개척지인  북한주민들에게 심기 위해서  그들을 돕는 즉  목적이 기독교 전파고  탈북자들을 돕는것이 수단이 된 모습은 결코 아름답지 않고 예수님도 그런것을 원하지 않을 것 입니다.
종교의 색을 좀 연하게 했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반면 한국의 불교는 기독교에 비해 조용합니다. 워낙 기독교가  종교 설파에 대해서 적극적인 모습이기에 달라 보일 수도 있겠네요.

탈북어린이가 그린  백두산 천지이니다. 남북한의 국기가 있고 한쪽은 중국국기가 있습니다.   중국국기 밑에 영원한 ??라고 적혀 있는데 무슨 글짜인지 모르겠더군요.


하늘 같은 마음을 지닌 사내대장부가 되자!
참 기개가 되단합니다.  하늘 같은 마음을 가질려면 하늘과 닮아야 겠죠.  말고 순수한 아이의 모습이 보입니다.





하나님  나의 기도를 응원해 주세요!  종교를 갖는다는 것은 좋은것 입니다. 기댈 누군가가 있다는  자체만으로  신의 존재의 유무를 떠나서  좋은 것이지요.   하나님과 함꼐 저도 응원 합니다.


사진들은  탈북자 아이들을 보호하는 시설의 풍경을 담고 있는데  하루하루 살아가기도 힘든 모습들이 담겨 있어서 가슴이 너무 아팠습니다
그 나마 이런 아이들을   이전 정권에서는  도와줄 통로가 좀 있었지만 지금은  다 폐쇄되었고  개성공단 구출작전을 가정한 훈련을 하고 있는게 현실이네요

완벽하게 남남이 되어버렸습니다


못난 위정자들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은 언제나 어린이들이네요. 이런 생각도 해봤어요
태어나기 전에 똑같은 신체와 똑같은 조건으로 5년동안 테스트를 통해서  태어날 나라를 선택할 수 있게 하면
아이들이 그렇게 까지 불쌍하게 느껴지지 않겠지만  뭔 죄가 있다고   태어나자 마자 고통속에 살아야 하나요

이런 모습을 볼때마다 신이 있다면 와서 직접 보라고 말하고 싶을때가 많습니다.



또 하나의  잊혀진 존재들이 바로 이주노동자들입니다. 지금은 많은 사회적 인식 변화가 있어서  그나마 한시름 놓고 봤습니다.


제가 사는 아파트에도 인도에서온 핫산이라는 분이 있는데  이분 상당히 쾌할해요.  마트 아주머니와 친구가 되었더군요.



고려인 할머니, 우즈베키스탄, 2002년

또 하나의 잊혀진 존재들이 고려인들입니다.  90년대 초 김희애가 주연한 카레이스키가 생각나네요
구 소련에 의해 강제로 중앙아시아에 떨거진 고려인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제 기억으로는 소련이  조선족들의 근면성실함을 알고  일부러 척박한 중앙아시아에 강제로 보냈다고 하는데   그곳에서 한국의 언어를 보존하면서  사는 분들입니다.

일제시대때 일본군의 만행을 피해서 연해주로 갔건만 거기서 다시 소련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간 분들입니다.
나라가 없는 설움이라는 바로 그런것이죠. 

고려인 할머니는 영락없이  시골 할머니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작가는 할머니의 정체성을 위해서 할머니가 먹는 것들을 앞에 배치합니다
우리의 먹거리와 사뭇다르죠. 사는 곳이 다르기 때문이죠



사진작가의 소명의식은 그런것 입니다. 우리가 잊고 사는것을 기록하고 보전해서 후세에게 알리고 동시에 동시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 입니다. 점점 사진이 겉멋이 들어가고  치장을 하고  포토샵질로  거짓을 사실인척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진의 가장 강력하고 거룩한 힘은 존재성을 증명하고  그 어떤 확성기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  알림 기능입니다.
수 천단어의 수사적 표현이 필요 없습니다. 그냥 사진으로 담고  그걸 세상에 알리면 됩니다. 참 쉬운일 같지만  우리가 잘 모르는 존재들은 쉽게 접근될 수 있는 곳에 있지 않습니다.  그 쉽지 않음이 물리적 거리만을 말하는것은 아닙니다. 마음의 거리를 좁히는것도 쉽지 않죠.


대한민국 사용보고서입니다
대학진학률 세계 1위(이러니 대졸 실업자가 엄청난거죠 ㅠ.ㅠ).
초고속인터넷 품질 1위,
조선산업 경쟁률 1위.
연간 노동시간 OECD 회원국중 1위. 
자살률 OECD 회원국중 1위
2009년 세계행복지수 대한민국 68위
언론자유 지수 175개국 중 69위
세계 유일 분단국가

이게 대한민국입니다.


어제 사진전을 보면서 귀동냥으로 들었는데  김지연 작가님은 전업 사진작가는 아니라고 하네요.  사진만해서 대한민국에서 먹고 사는 분들 특히 이런 다큐사진을 하는 분들은 더더욱 많지 않습니다.

회사를 다니면서 휴가때  혹은 이직을 할때 틈나는 대로  중국과 우즈베키스탄 성남등을 방문하면서  카메라로 세상을 담았습니다.
그 열정에 놀랍기만 합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사진만으로 먹고 살기는 힘든 대한민국임을 또 한번 깨닫구요.

일본만 해도  사진집을 내면 많이 팔린다고 하는데 한국은  DSLR판매지수가 높은 나라지만  작가들이 사진집을 내면 수백권만 팔려도 많이 팔렸다고 합니다.  카메라 렌즈에  악세사리에 투자하는 돈은 절대 아깝지 않으면서 사진문화를 풍성하게 할  사진전이나 사진집 사진에 관련된 책(대부분 DSLR정복기 같은 메뉴얼 책만 읽죠)의 소비가 늘지 않습니다.

여러가지로 생각하게 하는 전시회였습니다. 인사동 가신다면 꼭 한번 들려보실것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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