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혁명을 꿈꾼 적이 없습니다.. 체 게바라는 테러리스트일 뿐입니다. 그러나 요즘 난 요즘 20대에도 없던 혁명을 꿈꾸고 있습니다. 사람은 나이 들수록 혁명보다는 안정을 원합니다. 특히 아이를 가지게 되면 혁명정신은 요단강 건너갑니다..
우리들 선배들이 그랬고 우리들이 그랬습니다. 혁명이란 단어는 어쩌면 만년 20대 일 것이다. 20대의 가진 것 없음이, 자신이 책임질 가족이 없음이 혁명을 일으키는데 큰 요건이 됩니다.
우리는 언제 혁명을 꿈꿀까?
우리가 추구하는 유토피아와 현실이 너무 동떨어져 있을때?
아님 우리 편의 힘이 너무 미약하여 거대한 힘을 가진 정부를 전복시킬 수 없을 때?
우리의 주장을 대중들이 개무시할 때?
촛불 들고 수십만 명이 모였는데 정부가 콧방귀도 뀌지 않을 때?
혁명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평화적인 혁명
그리고 폭력을 동원한 혁명 당신은 어떤 혁명을 추구하겠습니까?
작년 미국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시위때 이 두 가지 갈래길을 봤습니다.
촛불을 들고 청계나 서울광장에서 외치자라는 평화적인 부류와 이렇게 평화적으로 해봐야 정부나 청와대가 들어줄 것 같으냐며 거리로 나가자며 가두시위를 독료했던 사람들 파워블로거들 중에 가두시위를 옹호하는 분들이 많았고 그런 모습을 반대했다가 다구리도 맞았죠. 촛불문화제는 가두시위로 변질되고 가두시위는 폭력적인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그렇다고 외국 적군파처럼 총을 쏘고 폭탄을 터트리는 것은 아닌 전경차 부수고 조선일보 건물에 낙서를 하는 정도였죠. 그러나 폭력도 항상 상대적인 법 내가 보기에는 폭력은 맞지만 그래도 평화적이라고 보는데 정부는 폭력시위라고 도매급으로 매도하더군요.
저는 혁명을 꿈꾼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촛불이 사그라들자 정부와 검찰과 경찰이 중학교에 가서 촛불시위에 참가한 학생을 조사한 모습과 미네르바를 구속하는 모습과 유모차를 끌고 나온 유모차부대와 예비군들을 조사하고 시위대를 보호하려고 참가한 자동차행렬의 자동차를 몬 분에게 면허정지를 내리는 과도한 공권력의 남용을 보면서 혁명을 꿈꾸게 되더군요
사실 경찰서에 불 지르고 싶은 생각이 요즘같이 많이 생긴 것은 태어나서 첨입니다.
정부가 강하게 나올수록 혁명심은 더 커지게 됩니다. 정부는 이제 잠잠해졌네라고 오판하고 있지만 지금 민심은 99도씨입니다. 언젠가 누군가가 1도만 올려놓으면 민심은 다시 터지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고 경찰서에 방화를 하겠다는 것은 아니고 그런 생각이 태어나서 첨 들었습니다. 뭐 요즘 세상이 하수상하여 생각만 해도 잡아가는 생각이기도 하죠. 그래도 내 머릿속 생각을 밝혀봅니다. 독일영화 바더 마인호프는 혁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집 근처에서 편하게 보려고 했더니 서울에서 단 두 곳에서만 개봉하고 한 곳은 예매도 안됩니다.
흠. 이런 불건전한 영화는 대중들이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본가인 극장주들의 판단이었겠죠.
영화 바더 마인호프는 독일 적군파의 연대기를 다룬 영화 빕니다. 러닝타임도 긴 150분의 영화이지만 당신이 촛불을 들었던 사람이라면 한순간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영화의 내용은 이렇다. 스포 있음
67년 이란의 전체군주의 왕과 왕비가 서독을 방문합니다. 이란의 국민들은 굶어 죽어가는데 초호화 바캉스를 보내고 그런 게 헌법으로 보장되어 있다는 마리 앙투아네트 같은 말을 해서 좌파의 신경을 건드렸던 왕비
그런 왕비를 좌익 언론인인 마인호프는 조롱합니다. 그리고 빵봉지를 쓰고서 그런 이란 전제군주를 조롱하죠.
그러나 서독에 사는 이란사람들은 좌인 청년들과 싸움이 붙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경찰들이 싸움을 말리지 않습니다. 마인호프는 피투성이간 된 여자를 끌고서 경찰에게 병원에게 보내달라고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몽둥이입니다.
경찰봉에 맞고 발로 차이고 최루가스에 취한 시위대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흩어집니다.
그러다 한 청년이 형사가 쏜 총에 맞아 죽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체게바라도 처음부터 폭력혁명을 꿈꾸진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드네요.
그냥 자기주장이 강한 청년들일뿐인데 거기에 경찰이 강경진압으로 혁명전사로 만듭니다.
그런 경찰의 강경진압 속에 바더라는 폭력적인 혁명전사가 태어납니다.
또한 사회주의를 꿈꾸는 리더인 한국으로 치면 한총련 회장이 거리에서 반공주의자에게 총격을 맞고 쓰러집니다.
이런 사건을 지켜본 바더와 여자친구는 체게베라의 말대로 가만히 있고 행동하지 않으면 세상은 바뀌지 않다고 생각하고 동지를 모읍니다. 동지들은 쉽게 모아집니다. 자본주의가 버린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에 바더를 지지하는 사람도 많아집니다. 그리고 백화점에 불을 지릅니다. 낮이 아닌 밤에 질렀기에 민간인의 피해는 없습니다.
그리고 바더와 여자친구는 잡힙니다. 영화를 보면서 생경스러웠던 것이 보통 우리나라 같으면 방화범으로 잡히면 항소심을 하든 말든 계속 구치소에 있어야 할 텐데 바더와 그 일당들은 다음 항소심까지 자유롭게 지냅니다. 거기에 외국까지 나가죠.
참 우리랑 많이 다르더군요. 우리도 중범죄 저지르고도 풀려나나요. 뭐 장자연 전 소속사 대표는 2 억내고 구치소에서 나왔던데요. 반대로 미네르바는 계속 구속수사하고요 쩝 60년대 독일보다 못한 한국이네요
이후에 바더는 계속 혁명의 계획을 꿈꾸다가 어처구니없게 과속으로 걸려 경찰에 잡힙니다. 감옥에 간 바더
그런 바더를 구출하기 위해 진보언론인인 마더호프가 동참합니다. 보통은 아이가 있으면 혁명에서 멀어지니다. 솔직히 아이가 있는 가장이 화염병을 돌리든 게 자연스럽지는 않죠. 그런데 바더나 마인호프나 둘 다 아버지이자 어머니입니다. 그러나 혁명을 꿈꾸는 자에게는 아이들의 안위가 걱정되지만 큰 터럭은 되지 않습니다.
마인호프의 말이 생각나네요
‘하나의 돌을 던지는 것은 범죄지만 천 개의 돌을 던지는 것은 정치적 행위이다. 차 한 대를 불태우면 범죄이지만 천대의 차를 불태우는 것은 정치적 행위이다.
마인호프는 놀라는 척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되는 것이었죠. 그러나 마인호프는 바더 일행을 따라갑니다. 이때부터 적군파 1기가 시작됩니다. 바더와 마인호프는 목적지는 같지만 표현방식이 약간 다릅니다.
둘은 폭력적인 혁명을 추구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래서 경찰서를 폭탄으로 날리고 서독주둔 미군의 사령부를 날려버립니다. 뻥뻥, 심지어 바더 마인호프를 재판하는 재판관의 와이프에게 중상을 입히기도 하죠.
거치는 게 없습니다. 자본주의의 표상들은 제거의 대상입니다. 하지만 절대로 민간인을 다치게 하지는 않습니다.
도덕성만은 지키죠.
그러나 이 원칙을 어긋나는 일이 일어납니다. 한국의 조중동 같은 보수일간지인 빌트지를 만드는 스프링어회사에 폭탄을 설치하고 터트립니다. 이 사건은 적군파와 무관한 동조자들이 일으킨 사건이지만 바더는 실수가 있었을 뿐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마인호프는 다릅니다. 스프링어 사장을 죽이는 것은 모르겠지만
아무 죄도 없는 스프링어사에서 일하는 노동자들까지 죽였어야 하냐고 따지죠.
이 부분에서 많은 생각이 들더군요.
스프링어사는 한국의 조선일보인데 조선일보 사장인 한국의 볼디모트(이름을 말하면 블록 당함) 방사장을 욕하는 것과 그 밑에서 일하는 조선일보 기자와 행정직들을 어떻게 봐야 할까? 저는 방사장을 넘어서 조선일보 기자들까지 욕하고 싶지만 또 따지고 보면 먹고사니즘에서 난 자유로운가? 먹고 사니즘앞에서 난 불의를 눈감은 적 없는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좀 혼자 짧게 그러나 깊고 강하게 생각해 봤습니다.
영화는 바더 마인호프일당이 행하는 테러들을 담담하게 담습니다. 감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독일적군파(RAF)의 이야기를 미화하지도 그렇다고 빨갱이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한 편의 다큐를 담듯 중간중간 실제 당시 사건 화면과 방송화면을 넣습니다.
그러다 한두 명씩 혁명동지들이 잡혀갑니다. 바더와 마인호프도 잡혀가죠. 그리고 독방에 갇힙니다.
이제 일망타진했다고 독일정부는 자축합니다. 그러나 독일 연방경찰청장의 생각은 다릅니다.
그들의 잡혔다고 테러가 없어질까? 그들의 얘기를 들어줘야 폭력이 멈추지 못할까?
부하직원은 말합니다. 그럼 테러로 인해 죽은 사람들의 가족들의 슬픔을 외면하자는 것인가요?
그런 말은 아니고 이 좌익들의 행동은 처벌하되 그들의 생각만은 들어줘야 한지 않냐고 말합니다
독일 연방 경찰청장은 적군파를 다스리는 것은 경찰봉이 아닌 이해심이라고 말합니다. (ㅠ.ㅠ 한국의 경찰청장이 좀 이랬으면)
사실 저도 혁명을 꿈꾸지 않았고 촛불시위할 때도 가두시위를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정부가 강경하게 나오니까 혁명을 꿈꾸게 되더군요.
독일의 경찰청장은 이 모습을 꿰뚫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생각들은 들어주는 관용은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모로 한국의 경찰청장과 비교가 됩니다.
바더 마인호프 일당이 다 잡혀서 좌익들의 활동이 끝난 줄 알았던 정부 그러나 바더 마인호프 일당은 감옥 안에서 독방에 가두는 모습을 항의합니다. 그러다 자신이 선택했지만 바더의 압력이 있었던 바더 마인호프 일당 중 한 명이 자살을 합니다. 단식운동을 하고 음식을 거부하다가 죽게 되죠. 이 모습을 보고 다시 적군파가 결성됩니다. 바야흐로 적군파 2기, 적군파 2기는 요인암살을 일삼습니다.
바더 마인호프 일당은 법정에서 재판관에게 돼지, 비열한 고양이, 쥐새끼라고 말하면서 법정 모독을 하죠.
이 영화 참 보면서 놀라웠던 것이 법정에서 피고인들이 담배를 피고 욕을 해도 큰 제재가 없더군요.
더구나 독방에 살다가 이들의 법정에서의 주장이 국민들에게 먹혀들어갔는지 여론에 의해 이들 일당이 같은 감옥에 모이게 까지 해줍니다. 이들의 혁명은 체포되었다고 끝난 게 아닙니다.
적군파 2기들은 자본주의의 아이콘들인 은행장과 정부관리들을 납치하고 사살하죠.
신의에 찬 적군파들 혁명은 곧 다가올 듯합니다.
그러나 점점 혁명이 이루어지기 힘들 것을 적군파 1기인 바더 마인호프일당이 느낍니다.
폭력적인 혁명을 하면 국민들이 동조해야 하는데 동조를 안 합니다.
마치 김일성이 남한을 침공하면 남한 내에 불만세력들이 죽창을 들고 관리들을 찌를 줄 알았는데
오히려 피난 가거나 북한군과 싸우기 위해 학도병이나 의용군에 뛰어듭니다
점점 그들도 느끼기 시작합니다. 이상하다. 왜 혁명은 이루어지지 않나? 이런 회의감에 바더와 마인호프가 말다툼을 심하게 하고 결국 마인호프가 자살합니다. 하지만 적군파추종세력인 적군파 2기들은 자살이 아닌 타살이라고 주장합니다. 서독정부가 죽였다는 것이죠. 테러는 더 빈번해지고 요인납치 암살도 다시 시작됩니다.
그러다 유럽에 있는 독일대사관을 적군파 2기들이 점령하고 인질극을 벌임면서 자신들의 선배인 적군파 1기들을 풀어줄 것을 요구하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고 대사관 건물만 파괴하고 테러는 불발로 끝나게 됩니다.
적군파 2,3기는 다시 바더를 감옥에서 탈출시키기 위해서 비행기 납치를 합니다.
그리고 아랍국가에 하이재킹 한 비행기를 볼모로 독일정부와 협상을 합니다.
그러나 아랍국가들이 이상하게 자신들에게 비협조적입니다. 남예맨은 협조한다고 하는데 세상이 적군파를 원하지 않음을 깨닫기 시작하고 바더와 일당은 모두 자결합니다. 그리고 적군파 2 리더는 말하죠. 마더호프가 정부가 죽인 게 아닌 소신대로 자살을 한 것이라고 알려주고 적군파는 와해됩니다.
영화평
저는 혁명을 원합니다.
하지만 폭력을 동원한 혁명을 원하지 않습니다. 폭력을 동원한 혁명이 성공한 적도 많습니다.
프랑스 시민혁명은 시민들이 봉기해서 자유를 쟁취했습니다. 하지만 실패한 혁명이 더 많습니다
체게베라가 혁명의 아이콘으로 전 세계 젊은이들이 티셔츠로 입고 다니지만 그도 결국은 볼리비아에서 무장항전하다가 죽게 됩니다. 젊음은 혁명을 하기 쉬운 조건에 있습니다. 가진 것도 없고 세상도 맘에 안 들고 살기는 힘들고
거기에 무모한 객기도 있습니다. 그래서 혁명의 선봉대들은 다들 20대분들이죠.
그러나 혁명의 성공요건은 폭력이 아닙니다. 바로 대중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6.10 항쟁도 넥타이부대의 공감대를 이끌었기에 성공했습니다.
만약 지난 87년 6.10 항쟁 때 경찰을 죽이고 관공서를 불태우고 은행을 털고 하는 적군파식 행동을 했으면 시민들이 싸늘하게 쳐다봤겠죠. 적군파의 쓸쓸한 뒤안길을 보면서 저렇게 시민들과 공감하지 못하고 자신의 행동만이 옳다고 하는 집단의 결말의 씁쓸함을 느끼게 해 주더군요
바더 마인호프의 폭력적인 혁명을 옹호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한국의 20대의 혁명을 꿈꾸지도 혁명이라는 단어를 꺼내지도 못하는 자본에 노예가 된 모습도 좋지 않습니다. 한국의 20대들에게 혁명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요구한다고 되지도 않고) 적어도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정도는 생각하면서 살았으면 하네요. 도서실에서 토익공부하는데 전부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네요.
20대분들에게 꼭 권해드리고 싶은 영화입니다.
한 번쯤은 세상을 뒤집어 버리자고 하는 사람들의 생각도 들쳐볼 수 있는 폭넓은 사고를 가졌으면 합니다.
바더 마인호프는 우익들에게는 한마디로 빨갱이 영화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 개봉 못할 것이라고도 했죠.
그래도 개봉했다는 게 약간의 위안이 되네요.
한국이 경찰국가가 되었지만 그래도 북한보다 나은 점은 이런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점점 북한과 한국이 닮아지는 것은 왜일까요. 한국과 북한의 차이점이 경제력의 차이뿐이라면 우리는 과연 지난 시절 잘 살아온 것일까요?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이 영화의 큰 주제는 이겁니다.
때리면 때릴수록 불만은 더 커지고 불만은 혁명을 불러일으킨다고요.
어렸을 때 읽었던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어느 선비가 길을 걷다가 돌멩이가 있길래 발로 찼습니다.
그런데 돌멩이가 두배나 커졌습니다. 그래서 또 한번 찼더니 돌맹이가 바위가 되었고 선비는 열이 나서 바위를 발로 차다가 바위는 더 커지고 결국은 길을 막아 버렸습니다. 선비는 바위 때문에 앞으로 가지 못해 낭패스러워할 때
스님이 와서 바위를 달래주고 원래대로 돌려놓습니다.
한국의 경찰과 검찰이 새겨볼 이야기입니다. 국민들을 지금처럼 계속 패고 까다가는 언젠가는 그 폭력이 되돌아올 것입니다.이 영화는 재미가 크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2009년 경찰국가가 되어가는 모습의 시의성에서 별을 큼직하게 주고 싶습니다. 2년 전만 해도 이런 영화 별세개 드리지만 2009년 경찰국가가 된 한국에서는 별 4개를 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