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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향기/추억을 길어올리는 우물

민주주의의 최후의 마지노선 명동성당

by 썬도그 2009.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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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에 대한 추억은 달콤합니다. 대학교 1학년때  동아리 친구들과 명동으로 사진출사를 갔습니다. 그리고 당시 짝사랑하던
여자동기와 함께 명동성당에 갔었습니다.  카톨릭신자라서  아무 성당에 들어가서 미사를 보면 된다고 하더군요.  교회만 다녀봤던 나와 둘이서 성당에서 미사를 첨 경험했는데 교회와 다르게  앉았다 일어났다를 참 많이 하더군요.

첫 만남이 설레임 때문이었는지 명동성당에 대한 추억은 너무나 좋습니다. 더구나 명동성당은 아무나 들어가고 나와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개방적이구요. 
거기에 이런 멋진 고딕풍의 성당을 보기 쉬운것도 아니구요.


내가 기억하는 명동성당의 이미지가 마냥 좋은것은 아닙니다. 철없던 중학교 시절 TV에서는 연일 시위대의 과격한 행동을
보여주었습니다. 대통령은 용공분자 어쩌고 떠들어되고   나라가 망한다고  한탄하는 어른들도 있었구요.
TV에서는 대학생 형들이 성난 물소떼처럼 이리저리 몰려다녔습니다. 왜 저 형들이 누나들이 저러는지 알수가 없었습니다.
누구하나 아렬주지 않았습니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지금 이 과정이 민주화 과정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공무원 특유의 복지부동하고 있었죠.  세상과 담쌓은 선생님들  그 담너머를 기웃거리던 중학생은  정말  뭐가 선이고 뭐가 악인지
알길이 없었습니다. 세상을 보여주는 창은 오로지  TV하나였습니다. 삼촌이 대학생이었지만  시위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했었습니다. 하지만 늙으신 외할머니에게 걱정이 될까봐 시위를 안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87년 6월 항쟁의  정점은  이 한장의 사진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스크럼을 짜고  그 더운 아스팔트 바닥에 누은 형,누나들은 입에 마스크를 쓰고  한목소리를 냈습니다.  호언철폐
호헌철폐

신촌에서 종로에서 광화문에서 시위가 계속되었습니다. 지방대학생들은 전세버스를 타고 상경했습니다. 그리고  옥죄여 오는 공권력에 맞서서  뒤로뒤로 물러섰습니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최후의 마지노선으로 명동성당으로 향했습니다.

명동성당이 왜 민주주의의 성지가 되었을까요?    왜 그당시 형과 누나들은  명동성당 속으로 들어가 무시무시한 군화발과 최루탄을
피했을까요?  저는 이상했습니다.  아니  왜 저 명동성당은  전경들이 들어가지 못할까 하구요?  

무소불위의 정권이 왜 저곳은 못들어갈까 하구요?   제 순진한 생각으로는  교회같은 종교시설엔 공권력이 못들어가는줄 알았습니다.
뭐 그런 이유도 있었겠지만 김수환추기경이 나를 밟고 가야 대학생들을 잡아갈수 있다는 말 한마디가  민주주의 마지노선을 만들어 냈습니다.

저 많은 대학생들은  저곳에서 몇날 몇일을 지냈습니다.  갈아입을 옷도  음식도 없었던 이곳에 각지에서 음식물과 생필품이 도착했습니다.


명동성당이 없었다면 우리가 6.10항쟁을 통해 6.29 선언을 이끌어 낼수 있었을까요?   아마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그런말을 하더군요. 무관심은 가장 큰 죄중에 하나라구요.

종교인이 뭔 사회참여야 왜 정부에 감놓아라 대추놓아라해 그냥 종교행사나 하고 당신들이 믿는 신에게 기도나 하지.!!!

하지만 김수환추기경은 세상을 그저 내려다 보지만 않았습니다. 직접 그 세상속으로 뛰어들어갔죠. 은퇴후에는 보수적인 발언을 몇번 하셔서 진보세력에게 욕도 많이 먹기도 했지만  그래도 김추기경이 있었기에  우리가 아주 깔끔하진 않지만 성공적인 민주주의가 정착된것이 아닐까요?  뭐 지금은 다시 민주주의가 사라지는것 같지만요.

김수환추기경의 애도물결이 명동을 꽉 채웠다고 합니다. 국가의 큰 어르신 한분이 돌아가신 이상의 의미가 있는듯 합니다. 점점 존경할만한 인물들이 사라지는 시대라고 하죠.  탈권위주의 시대의 그림자일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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