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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향기/책서평

죽음이 사라진 세상이 과연 행복할까? (서평)죽음의 중지

by 썬도그 2009.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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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생각나네요.  10월에 입대한 후 11월과 12월 정말 정신없었던 훈련병 시절  휴일의 얇은 휴식시간에 창밖을 보면서
편지를 쓰곤 했습니다. 정말 엄청난 양의 편지를 썼었죠.  사랑하는 사람에게 친구에게,  지금도 친구들은 그 이야기를 합니다.
이 자식은  군대때 편지 보내면  무슨 에세이집을 하나 보더더라고요.   제가 왜 그렇게 장문의 다량의 편지를 달빛 아래서 썼을까요?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저는  충격속에서 지냈던 것 같습니다.  내가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 중  하나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바로 자유입니다.  제 행동 하나하나가 제약을 받고  내 삶이  완벽하게 수동적으로 변한  그 충격에   난파된 배에서 구조신호를 보내듯  여기저기에  구해달라는 소리를 편지에 적어서 보냈습니다. 자유를 완벽하게 뺏긴 자만이 자유의 소중함을 알 수 있습니다.


  삶에서 어느 단어하나 혹은  사물 하나가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도 너무나 흔하고 당연해서 누구도 크게 생각
하지 않았던 아주 기본적인 언제나 그 자리에 우리가 손 내밀면 있는 것이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서 사라진다면요.  더구나 그게 너무나 무섭고 더럽고 추악한 것이 사라진다면요.


포르투갈 작가인  주제 사라마구가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시력의 부재를 통해,  눈이 먼 세상 사람들을 통해 인간성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했다면 이 신작 죽음의 중지에서는  죽음의 부재를 통해 죽음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집니다. (첨엔 진지하다가 마지막엔 위트가 있어요)


소설가 주제 사라마구는  우리 삶에서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것을 (갑자기 뜬금없이 아무 설명도 없이)  결여, 부재를 통해 삶을 통찰하는 재주를 가진 작가입니다. 포르투갈이 배출한 세계적인 작가, 몇 년 전 TV에서 도서 소개 프로그램에서  한 패널이  재미도 있고 생각거리도 주는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인 주제 사라마구가 쓴 눈먼 자들의 도시를  극찬을 하더군요.  보통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가 쓴 책은 별 재미가 없어요. 제가 몇 년 전에  터키 작가인 오르한 파묵의 책을  노벨상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책을 사 봤다가  한 1/3 읽다가 덮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극찬하는 모습에 혹했다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말에 눈먼 자들의 도시를 구매하기를 미루었고 결국 못 읽었습니다.

그리고 작년에 눈먼자들의 도시라는 영화를 보고  한동안 충격에 빠져 지냈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너무나 두렵고 무섭고 내 벌거벗은 모습을 들킨 것 같아  당혹스럽고 창피했습니다.
세상 모든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눈이 먼다는 가정으로 이 영화는 시작되었고  결국 추악한 인간의 본모습을 그려냅니다.

영화를 보고난 후 눈먼 자들의 도시와 눈뜬 자들의 도시를 인터넷서점에서 구매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신작 죽음의 중지를 4일동안에 걸쳐서 읽었습니다

책 내용은?


먼저 이책을 읽기 전에 조언 몇 마디를 해야 하겠네요.
이 책은 (눈먼자들의 도시에서도 그랬듯이) 책 전체에  느낌표나  물음표 큰, 작은따옴표가 없습니다.  책 안에 문장부호는  단 두 개
쉼표와 마침표뿐입니다.  따라서 주제 사라마구 책을 읽을 때는  읽는 연습이 좀 필요합니다.  글 자체가  만연체라서  한 문장이 호흡이 깁니다. 까닥 잘못하다간   이전 마침표나 쉼표까지 올라가 다시 읽어야 합니다.  거기에 문장부호가 딱 두 개 , (쉼표)와.(마침표)뿐입니다.  솔직히 이 주제 사라마구의 글을 첨 접하면  읽기가 너무 힘듭니다. 진도도 잘 나가지 않고요.   좀 괴롭죠.

하지만  이 특이한 문장체에 익숙해지면  읽는데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서두가 좀 길었나요?   이제 본격적으로  죽음의 중지에 대해서 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죽음의 중지를 처음 들었을 때.  중지 [中止]가 가운데 손가락인 줄 알았습니다. 죽음의 가운데 손가락?  저만 이런 생각을 했나요?  뭐 하여튼 책 제목을 잘못 이해하는 오류를 범했네요.  


이 책의 내용을 대충 거론하자면     책 첫 페이지엔 이런 말이 쓰여 있습니다. 다음날, 아무도 죽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새해가 되자 소설 속에 나오는 나라(포르투갈로 생각이 듭니다)에서  갑자기 죽음이 사라졌습니다. 교통사고를 나서 사지가 찢겨도  그 상태로 살아있습니다.   오늘, 내일 하던 노인분도  그런 혼미스러운 삶을 계속 연장하는 것이죠.
처음에는 이 죽음의 부재에 당황스러워하던 사람들과  이웃나라들의 시기가 들려옵니다. 포르투갈이 영생의 국가가 된 것입니다.
이웃국가들은 시기하고 질투하지만  그 질투와 시기는 사라집니다.  현실적인 문제가 계속 발생하기 때문이죠.

사람이 죽지 않는다는 것 죽음이 사라지자  아이러니하게도 종교인들이 싫어합니다.  죽음이 있기에  믿음을 증폭시키고 믿게 할 구실을 만들었던 종교인들이 당혹해 하고 반겨하지 않습니다. 장의사들은 또 어떤가요.   그러나 신기한 게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가면 죽음은 되살아나서  죽기로 예정된 사람은 바로 죽습니다. 말도 안 된다고요.  이 책은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과학적으로 해석하려고 하면  낭패스러운 표정만 짓다가 책을 덮습니다.  이해는 나중에 하셔도 됩니다. 읽다 보면 그런 질문을 했던 모습까지 사라집니다.

책은  2/3까지 죽음이 사라진 세상을 그립니다.  그리고 갑자기 죽음이 위안화 됩니다.  형이상학적인 죽음이 형이하학으로 뜬금없이 나옵니다.  위에도 말했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라는 뜨악한 표정 짓지 마세요. 중요한 것은 죽음이라는 큰 주제입니다.
마지막 부분은 말하지 않을게요.  작가의  죽음에 대한 관념이 묻어나기에  독자의 책 읽는 재미를 죽일 수 없죠.


익숙해질 수 없는 마침표. 죽음

나에게 죽음이란 너에게 죽음이란 인류에게 죽음이란?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셨어요?  인간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진실을 알게 된 나이 이후에 죽음은 항상 우리 곁에 머무릅니다.
우리가 밥을 먹을 때도  친구와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추억을 나눌 때도  술 먹고 맛이 가서 꼭지가 돌아서  헤롱 거릴 때도  사랑하는 사람과  달콤한 시간에 젖어서  이 순간을 영원히~~라고 마음속으로 읇조릴때도    죽음은  가만히 우리 곁에 앉아서 우리 눈을 들여다 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너무나 행복한 순간 이대로 죽었으면 ~~~  저뿐 아닐 거예요. 이런 생각을 하는 분들이요
그런 이야기가 있죠. 한국사람들은 죽음을 너무 쉽게 입에서 내뱉는다고.   야!! 그거 죽음이네.  죽인다. 죽여주는데
미국에 사는 교포분들이 너 죽여버릴 거야를 영어로 말해다가   미국 경찰에  체포되었던 이야기들  미국인들과 우리 한국인들이 바라보는 죽음은 똑같지만  그 무게의 차이에서 오는 문화적 차이로  체포되었다는 이야기.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수많은 식자들이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 죽음을 직접 몇 번 느끼면서 죽음에 친숙해집니다.  저도 나이 들어서 몇 번의 장례식을 통해서  죽음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두렵고 떨리고 무섭기만 한 죽음이 친숙하지는 않지만 거북함을 많이 줄일 수 있었습니다.  죽음은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익숙해질 수가 없습니다.    인생에서 단 한번 오기에 (두 번, 세 번 온다면 사람이 아니겠죠

항상 두렵고  무섭습니다.   이 책에서는  그런 죽음에 대한  현실적인 물음과 상황을 잘 묘사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이 사라진 7개월간 일어나는 모습을  덤덤하게 그려내면서  결코 죽음의 부재가  좋은 게 아니라고 독자에게 말해줍니다.

형이하학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죽음이  자신의 실험 아닌 실험을 통해  가장 죽음다운 죽음을 인간들에게 선물해줍니다.
갑작스러운 죽음인 급사를 배재시키는 것이죠.  교통사고로 급작스러운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인지하고 정리하고  유언을 남기지 못하는  매정한 모습을 제거하고  1주일 전에 편지로 죽음을 알려줍니다.
어떠세요?  죽음이 어느 날 당신에게 1주일 후에 당신이 죽는다고 자줏빛 서류에 쓰인 편지를 보낸다면요.
오늘 지인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니 자긴 깔끔하게 그냥 확 죽는 게 낫지 1주일이라는 죽음이 예고된 시간을 가진다면  추잡스럽고
그 1주일이 고통스러울 것이라고요.   저도 생각해 봤습니다. 어느 날  제 책상 위에 자줏빛 서류가 있었을 때  그 생의 남은 1주일을 어떻게 보낼까 하고요.   한 이틀은 눈물만 흘리다가  하나씩 정리를 하겠죠. 그러나 급사는 정말 끔찍할 것 같아요. 너무 허무하잖아요.
정리할 시간도 안 주고 매정하기도 하고 나의 존재의 크기를 아는 기회가 되기도 하고요.


이 죽음의 중지는 죽음을 중지시켰다가 예고 죽음제를 실시했다가 하는 죽음의 여신인 아트로포스의 운명의 장난질을
너무 어둡지 않게  재미있고 그러나 가볍지 않게 그립니다.  그리고  영생이 과연 좋기만 한 걸까?  죽음이 없는 인생이 과연 행복할까?
라는 큰 쉼표 같은 물음표(책에 없는 문장부호인)를 독자에게 던집니다.

책은  쉬운 책은 아닙니다. 쉽게 읽히는 책도 아닙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해 너무 바쁘게 살아서 생각하지 못했던  현대인들에게
이봐!!  너무 살려고만 아등바등 되는 건 아니야?  죽음도 삶의 일부라고  삶에 힘든 어깨에 친구의 손길처럼 살짝 올립니다.
그렇다고 죽음 예찬론서는 아닙니다.  삶의 일부로써 인식, 인지하고  거부하지는 말아달라는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보여줍니다.

경쾌한 장송곡 같은 소설 그게 바로 죽음의 중지인 듯합니다.
이 맑은 하늘 아래서 웃으면서 장송곡을 한번 불러보는 느낌을 얻었던 책입니다. 

책은 처음과 끝의 문장이 똑같습니다.  다음날 아무도 죽지 않았다.  그리고 긴 물음표를 던집니다. 정말 당신은 이 세상에서 죽음이 사라지고 인류 모두가 영생하는 모습을 원하는가요? 라구요.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하는 모습을 보면서 죽음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모습에 큰 감명을 받고 있는 하루하루네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가 생각나게 하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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