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산동과 성수동은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먼저 두 곳 모두 준공업 지역이어서 공장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두 곳 모두 공장들이 떠나고 그 자리에 지식산업센터가 많이 들어서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점은 성수동은 기존 공장과 가정집을 리모델링해서 다양하고 핫한 공간들이 엄청나게 늘어가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대림창고입니다. 성수동 가보면 핫플레이스임을 절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준공업 지역인 독산동은 여전히 공장이 많습니다. 다만 최근에 공장들이 하나 둘 씩 떠나고 있는데 떠난 자리에 다양한 문화공간과 상점들이 들어서는 것이 아닌 오피스텔이 들어서고 있습니다. 가산 2,3단지 배후지역으로 퇴근한 후 걸어서 30분 안에 도착할 수 있는 배드타운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러다 보니 공장에서 오피스텔로 변경되었을 뿐 삭막함은 변하지 않네요. 조금이라도 변화가 있었으면 좋으련만 지금같이 오피스텔만 올라가면 큰 변화는 없을 겁니다. 그럼에도 공장보다는 오피스텔이라는 주거 공간이 늘면 자연스럽게 냄새나고 퀴퀴한 공장 대신 잘 가꾼 공간들이 늘어갈 것으로 보입니다.
독산1동 공장 지대에 예쁜 갤러리가 있습니다. 바로 '예술의 시간'입니다. 한 업체 기숙사 건물을 리모델링한 건물로 2층과 4층을 갤러리 공간으로 꾸몄습니다. 3층은 카페 독산입니다. 마실 겸 동네 산책하다가 새로운 전시회가 있어서 커피 한 잔 할겸 들렸습니다.
영일 프레시전 기숙사 건물이었는데 지금은 갤러리와 카페 공간으로 변신했습니다. 변신한지도 한 2년이 넘었네요.
예술의 시간은 매년 신진작가 공모 전시를 개최합니다. 이 공모전 이름이 '아티스트 프롤로그'입니다. 프롤로그는 책의 첫머리라고 할 수 있는데 작가의 시작을 알리는 첫 장을 만들어주는 전시회네요.
4월 7일부터 5월 28일까지 꽤 오랜 시간 전시를 합니다.
종로 인사동이나 강남 갤러리 거리가면 신기하게도 전시회를 꼴랑 1주일만 해요. 1주일이면 바쁘거나 깜박하면 못 봐요. 이렇게 짧게 하는 이유는 대관료 때문도 있고 개인전이 많아서 오래 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갤러리도 1주일 단위로 돌려야 수익이 나니까요. 그런데 이 '예술의 시간'은 영일 프레시전이 운영하기에 길게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신진작가도 발굴하고요. 이번 전시회에서 첫장을 장식하는 작가는 권빛샘, 김영진, 김한나, 한재석, 희박입니다.
회화, 설치, 조각, 사운드, 영상 등 다양한 장르의 작가들이 선정되었습니다.
권빛샘
88년생인 권빛샘 작가는 이름만 봐도 80년대 생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당시 한글이름 유행해서 예쁜 한글이름이 꽤 많았어요. 권빛샘 작가는 고독, 공포, 불안을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그 감정은 스스로 태어난 것이 아닌 다른 사람과의 관계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기쁘고 행복감도 느끼지만 불쾌, 불안, 고독, 공포도 느끼죠.
그림들은 관계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네요. 텐트나 커튼 바깥은 다른 사람이 존재하는 공간, 그 안은 나만의 공간, 하루에도 나만의 공간, 타인의 공간, 공공장소를 지나가는 우리들은 마치 나! 너! 우리를 매일 같이 지나는 우리와 같습니다.
권빛샘 작가의 그림에는 망원경으로 누군가를 관찰하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마치 영화 이창을 보는 듯하네요. 그냥 다가가서 보면 되지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먼 곳의 사람을 보는 관찰 또는 관음의 도구가 망원경입니다. 그래서 보통은 우리는 망원경으로 잘 보지 않죠. 스파이나 정찰이나 몰래 봐야 하는 사람들이 주로 사용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 관찰 도구는 현재 젊은 세대들의 모습 같아 보입니다. 관계 맺기는 싫고 그렇다고 홀로 되고 싶지도 않고 어쩌라는 건지?라는 생각도 많이 듭니다. 양가적이죠. 관계 맺어서 겪는 고통도 싫고 고독도 싫고요. 적당한 거리 유지가 중요합니다.
2층 공간 반을 권빛샘 작가의 유화 그림들이 가득했습니다.
사람만 관찰하는 건 아닙니다. 부엉이도 사람을 관찰합니다.
복도 끝에 큰 그림이 있는데
타조인 줄 알았습니다. 머리를 땅에 박고 자신이 안 보이면 남도 안 보인다고 생각한다는 타조. 혼자 있고 싶지만 외롭고 싶지 않아서 반만 자신을 드러냈네요. 뭐 타조 이야기는 낭설이라고 하죠.
한편으로는 뭘 관계를 무 자르듯이 나, 너, 우리라고 구분하고 살까? 뭐가 그렇게 관계 맺기가 공포스러울까? 심지어 전화통화도 두렵다는 10,20대들을 보면 헛웃음이 나올 때도 많습니다. 뭐 전화도 해본 사람들이 많이 하지 안 해보면 또 두렵긴 해도 의사전달은 대면> 음성> 채팅 이잖아요. 작품을 보면서 현재의 젊은 세대들의 삶의 행태도 좀 생각해 봤습니다.
김한나
모서리입니다.
모서리를 모아서 마름모를 만들었습니다.
구석입니다. 김한나 작가는 중심에서 밀린 주변부를 관찰하고 이들을 그러모읍니다. 구석 또는 자투리들은 쓸모가 없고 무관심의 지역입니다. 그러나 그런 무관심한 무쓸모 한 것들을 모아서 중심에 놓았습니다.
세상 모든 것은 다 쓸모가 있다는 말이 생각나네요. 다 쓸모가 있지만 당장 쓸모가 있는 것과 항상 쓸모가 있는 것과 가끔 쓸모가 있는 것의 차이가 있죠. 인사이더가 정답이고 아웃사이더는 오답이라고 생각하는 현실 반영 작품 같기도 하네요. 자발적 아웃사이더가 인사이더 추종자보다 월등하게 잘 났다고 생각합니다.
희박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이자 작가였습니다. 영상이 틀어져 있고 앞에 전시물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게 뭔가 하면서 영상을 보다가 헤드폰을 썼습니다.
영상 작품 제목은 <옥순의 방>은 작가의 외할머니인 최옥순 할머니를 촬영한 영상물입니다. 4개의 꼭지로 이루어진 영상물인데 한 없이 봤습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최옥자 할머니의 유년시절 고생담을 듣다보면 어떻게 견디셨을까? 할 정도로 혹독한 삶을 사셨습니다. 가장 인상에 남았던 이야기는 일제 시대에 돈벌이를 하러 오사카에 갔습니다.
마치 요즘 인기 높은 드라마 <파친코>의 선자처럼요. 오사카 공장에 취직해서 돈을 벌다가 어느 날 조선이 해방이 되었다면서 조선인들은 나가라고 했습니다. 이때 나간 사람도 있고 그냥 모른 척 계속 남았던 조선인도 있었다고 하네요. 할머니는 나가라고 해서 나갔지만 안 나간 사람들도 계속 공장 다니면서 돈 더 벌었다고 불만을 토로하시더라고요.
이게 어떻게 보면 가장 흔한 시선이 아녔을까 해요. 우리는 일제강점기 시절에 조국 잃은 슬픔에 매일 같이 눈물을 훔치며 살았을 것 같지만 실제 삶은 그러지 않았겠죠. 일제 건 조선이건 대한제국이건 자기 먹고살게 해주는 것이 중요했으니까요. 어린 시절 일본에서 살다가 강제로 대한민국에 왔더니 한국어보다 일본어를 더 잘하는 모습에 사람들은 니뽄진이라고 배척했다고 합니다. 조선 사람이 조선말도 어수룩하고 일본말을 유창하게 한다고 일자리도 안 줬다고 합니다.
그럼 할머니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침묵입니다. 한국말을 유창하게 못하고 그렇다고 일본말을 잘하면 일본인이라고 손가락질하니 침묵하고 예, 아니오만 말하고 손가락으로 대화를 했다고 합니다.
영상을 보면서 서글픈 생각도 많이 들었습니다. 어디 최옥자 할머니만 그런 삶을 사셨겠어요. 그 파란만장한 대하소설 한 권 이상 나오는 그 시절의 삶들이 다 그랬죠. 정말 요즘 삶과 비교할 수 없는 굴곡이 많았던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대한민국 격동기였습니다.
할머니가 남긴 유품이자 노동의 흔적입니다. 전시장 입구에 있는 <부개동에서 수집한 다섯 개의 잔>은 깨진 사기그릇을 맞추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깨진 것을 다시 모으고 붙이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외할머니의 편린 같은 기억들을 모아서 붙이고 이어서 큰 흐름을 만들고 기록하고 전달하는 모습 자체가 깨진 이야기를 이어 붙이는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할머니는 돌아가셨지만 희박 작가님의 작품 속에서 영원히 살아가실 것 같네요.
2층 갤러리를 나가면서 작가분들 프로필을 보니 권빛샘, 김한나, 희박 작가님이 경원대(현 가천대) 출신이시네요. 흥미롭네요. 3분이 동문이라니.
4층으로 올라갔습니다.
한재석
금속 모빌을 밀면 불규칙한 피드백이 반복된다고 했는데 작품 건드리라는 소리인지 뭔지 모르겠네요. 건드렸다가 문제 발생하면 안 되잖아요. 그냥 뚱하게 보고만 있었습니다. 건드리면 불협화음인지 피드백이 스피커로 나온다고 하는 듯한데요. 모르면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따라서 아무튼 안 건드리는 걸로 결정하고 패스.
김영진
포토그램 작품입니다. 감광지 위에 물체를 올려놓고 노광한 후 인화하는 방식입니다. 어린시절 청사진 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인화지 위에 인터넷에 뜬 사망 기사나 아동학대로 사망한 아이들 기사를 나비 모양으로 접은 후에 포토그램으로 찍어냈습니다.
폭력으로 사망한 아이들과 익명의 죽음이 기사들을 발췌해서 그 죽은 이름과 이야기를 나비처럼 접어서 담았습니다.
나비가 되어서 저 하늘에서 맑은 삶을 살길 바라는 모습처럼 보이네요.
표현력도 좋고 의미도 좋습니다. 또한 아이디어도 좋고요. 사회비판적인 시선도 좋습니다. 김영진 작가님은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네요.
4층 복도에 뜬 태양입니다. 저것도 작품일까요? 작품이네요. 한재석 작가의 '바운싱 볼'입니다. 저 태양이 저녁해인지 아침해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저걸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세상은 동영상인데 우리는 순간만을 캡처해서 왈가왈부를 합니다. 웃기는 행동들이죠. 순간을 보고 어떻게 전체를 판단합니까? 그게 사진의 맹점입니다. 그래서 사실이 중요한 보도 사진은 아래에 정확한 캡션을 넣어야 합니다. 그래야 오해를 안 사죠.
예를 들어 저게 일출인지 일몰인지 구분이 안 가면 캡션에 일출이라고 적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걸 안 적을 때가 있고 적었다고 해도 퍼 나른 사람이 캡션을 무시하거나 같이 안 퍼 나르면 논란의 사진이 되죠. 저런 논란을 깨는 것이 동영상이자 맥락입니다. 5분짜리 동영상을 보여주면 저게 내려가는 해인지 오르는 해인지 알 수 있죠.
요즘 뉴스를 보다 보면 SNS를 하다 보면 맥락 파괴 논란이 너무 많습니다. 맥락에 따라서 같은 현상도 사실도 사진도 이야기도 달라집니다. 따라서 맥락에 따라서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고 인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다 가지치기하고 하나에만 집중해서 비판하는 억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나저나 저 해는 일몰이 맞을 겁니다. 화장실 가다가 본 작품으로 내려가는 해가 확실합니다!
2층에는 작품 감상 후기를 모집하고 있네요. 참 여러모로 이 <예술의 시간>이 있어서 독산동이 한층 밝아졌습니다.
여러모로 참 고마운 공간입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존재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