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은 추억팔이 전문 드라마 채널이 아닐까 할 정도로 추억이 새록새록한 드라마를 아주 잘 만듭니다. 대표적인 드라마가 바로 응답하라 시리즈로 응답하라 1997, 응답하라 1994, 응답하라 1988가 대표적입니다. 좋은 드라마죠. 저도 이 응답하라 시리즈 할 때는 그 시절 추억에 젖어서 즐겨봤습니다. 그런데 뭐든 패턴이 비슷하면 질리게 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보고 싶은 생각이 거의 없었는데 유일하게 볼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 이유는 김태리입니다.
김태리는 영화 <아가씨>에서 보자마자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로 발돋움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김태리는 출연하는 드라마나 영화들이 꽤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습니다. 김태리 참 연기 잘합니다. 믿고 보는 배우 중 하나죠.
그럼에도 스토리에 대한 기대는 없었습니다. 1997년을 배경으로 한 흔한 꽁냥꽁냥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 다릅니다. 뭔가 매콤합니다. 1997년 배경이 허투루 사용한 것이 아닌 IMF라는 한 시대를 변화시킨 거대한 경제의 파고를 담고 있습니다.
IMF라는 경제 쓰나미를 소재로 담은 '스물다섯 스물하나'
남주혁이 연기하는 백이진은 22살 청년으로 재벌 2세급으로 잘 살다가 IMF 직격탄을 맞고 가족이 뿔뿔히 흩어졌습니다. 군대에 입대했지만 동생들을 먹여 살릴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의가사 전역을 합니다. 22살 한창 꿈을 꿔야 하는 대학생이어야 하는 백이진은 여러 알바를 뛰면서 근근이 버티며 살고 있습니다.
김태리가 연기하는 나희도는 18세 고등학생 펜싱 선수로 고유림처럼 되고 싶고 라이벌이 되고 싶은 꿈 많은 여고생입니다. 신문 배달을 하던 백이진과 나희도는 서로 반말을 놓으면서 첫 만남을 가집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냥 흔한 추억팔이 로코물인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IMF 라는 소재가 크게 담깁니다. 특히 백이진이 빚쟁이들이 찾아와서 하소연을 하는 장면에서 평생 행복하게 살지 않겠다며 속죄하는 모습은 이 드라마가 예사 로코물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또 나희도가 봅니다. 쾌활이 만랩인 나희도는 우울해 있는 백이진 손을 잡고 즐겁게 해 주겠다면서 자신이 전학 가기 전의 학교 교정에서 수도꼭지를 돌려서 위로해 줍니다.
2화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이 드라마 챙겨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유는 이 드라마의 제목이 어디서 많이 들어봤다 했는데 자우림의 '스물다섯 스물하나'를 그대로 사용한 제목이고 2화 엔딩 장면에서 주제가 같은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주요 촬영지가 전주입니다. 이 굴은 전주시 한벽굴로 지금은 사라졌지만 일제 시대 지어진 전라선 기차가 지나던 터널이었습니다. 이 장면이 너무 아름답기도 했지만 '스물다섯 스물하나' 노래 가사가 가슴을 울려서 한 문장씩 음미해 봤습니다.
아! 작은 탄식이 나오네요. 그냥 제목만 보고 가끔 듣긴 했고 지금까지도 25살 남자가 21살 여자 만나는 이야기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니네요. 노래 가사 음절 하나하나가 저를 아프고 슬프게 하네요.
그때는 아직 꽃이 아름다운 걸
지금처럼 사무치게 알지 못했어
우 너의 향기가 바람에 실려 오네
우 영원할 줄 알았던
스물다섯 스물하나
요즘 이 노래만 듣고 있네요. 가사 중에 위 부분에서 큰 공감을 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꽃이었던 시절, 자신이 꽃이라는 걸 잘 모릅니다. 그러다 꽃이 아닌 시절이 되면 그때가 꽃이었다고 생각하죠. 어른들이 흔히 하는 말로 좋을 때다 하는 말을 나이 들고 알게 되죠.
이효리의 말처럼 내가 꽃이었을 때는 꽃을 좋아하지 않다가 꽃이 아닌 시절이 되면 꽃을 좋아하게 된다는 말처럼 제가 요즘 꽃을 좋아하고 꽃 사진 찍기에 열심임을 최근에 알게 되고 늙음을 크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젊은 시절이 크게 그립거나 돌아가라고 하면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많지 않습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가면 또 짜증만 엄청 내고 있을 거예요.
청춘은 책임질 것이 적은 대신 확정된 것도 적어서 불안이 가득해요. 20대 치고 금수저가 아니면 불안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은 거의 없을거에요. 대신 넘어저도 일어날 수 있는 체력과 활력과 기회가 있잖아요. 대신 상처도 엄청 많은 나이이기도 하고요.
다만 이제는 청춘이라는 것이 다시 올 수 없다는 생각이 슬프게 하죠. 자신이 꽃이었던 그 시절을 돌아보게 하는 드라마가 '스물다섯 스물하나'입니다. 이는 드라마 속 두 주인공인 백이진과 나희도의 나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억을 간직한 시절이기도 하죠.
특히 몸의 나이가 가장 절정일 때가 20대 초반이고 이때의 몸의 활력과 건강은 평생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돌아갈 수 없다는 그 자체가 주는 힘은 그리움으로 전환됩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꽃띠 시절 정서를 그대로 담은 드라마가 '스물다섯 스물하나'네요.
엄마의 일기장을 훔쳐본 딸의 시선으로 담은 '스물다섯 스물하나'
드라마는 엄청난 재미와 감동을 주는 드라마는 아닙니다. 다만 이 드라마가 라떼는 말이야~~라는 잔소리로 시작하는 갱년기 엄마와 그런 엄마의 사춘기 시절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사춘기의 나희도의 딸을 연결하는 방식이 너무 좋네요.
넌 젊어봤냐. 난 늙어봤다 말처럼 10대 자녀를 둔 지금의 엄마 아빠들은 다 10대를 지나왔습니다. 그 지나오는 과정은 각지 다르지만 몸의 나이와 영혼의 나이의 부조화에서 오는 사춘기 반항과 절망 혼돈과 짜증을 지금의 10대만 겪었던 것이 아닌 20대도 30대도 40대도 50대도 60대도 겪었던 경험임을 알게 해주는 드라마가 되었으면 하고 그렇게 진행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건조한 드라마는 아니고 표정 부자인 김태리와 호숫물 같은 남주혁 두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맑게 보이네요. 여기에 전주 한옥 마을을 배경으로 한 촬영지의 아름다움도 가득합니다. 봄에 어디든 가보자라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2년 동안 국내 여행 한 곳도 못 가봤는데 올봄에는 코로나도 줄어들 듯하고 해서 남도 지방을 여행해 볼까 합니다.
그 코스 중에 전주를 꼭 다시 들려봐야겠어요. 10년 전에 갔을 때는 한옥마을 근처만 갔는데 그 주변에도 가볼 만한 곳이 엄청 많네요. 자전거 대여해서 드라마 촬영지도 들려봐야겠습니다. 노래가 드라마를 만들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에 더 놀랍게 보는 드라마이기도 합니다. 오랜만에 정독하는 드라마 하나 생겨서 좋네요. 기상청 사람들은 군대 기상대 시절 생각나게 해서 좋았는데 너무 로맨스가 강해서 점점 재미가 없어지는데 이 드라마는 대놓고 멜로 구도가 없어서 좋네요. 부디 담백하게 그 시절을 담은 청춘드라마였으면 딱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