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년 군입대 후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있을 때였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교육관으로 이동하기 전에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한 교관이 북한 핵 개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전까지 재래식 무기의 대결이었던 남북한 군사 대결이 갑자기 핵이 등장합니다. 핵은 비대칭 전략으로 한국은 스스로 핵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이에 한국은 북한의 핵에 큰 우려를 냈습니다. 북한이 영변에 원자력 발전소를 만들고 거기서 나온 플로토늄으로 핵을 만들고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에 주변 국가들은 우려를 표시합니다. 북한은 순수한 전기 생산을 위한 원자력 발전소라고 말 했지만 주변 국가는 믿지 못했습니다. 이에 한국, 미국 등이 주축이 된 KEDO가 만들어져서 북한에 경수로 원자력 발전소를 만들어주고 미국은 중유를 공급해 주는 조건으로 북한의 핵개발을 보류시켰습니다.
이게 93년의 풍경입니다. 지금이야 북한이 핵을 넘어서 핵 미사일까지 있다는 걸 누구나 다 압니다. 또한 핵 무기도 10개 이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죠. 이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배경으로 한 영화가 <공작>입니다.
북한에게 총 쏴 달라고 부탁한 총풍을 배경으로 한 영화 <공작>
그러나 영화 <공작>의 실제 이야기는 1996년 총선과 1997년 대선에 있었던 총풍 사건이 주인공인 영화입니다. 영화는 1993년부터 시작됩니다. 코드명 흑금성인 박석영(황정민 분)은 군정보부 출신의 사업가입니다. 안기부(현 국정원) 해외실장인 최학성(조진웅 분)의 제안에 따라서 다시 국가를 위해서 북한에 침투할 스파이로 키워집니다. 일부러 사업하다가 큰 빚을 지는 등 몇 년에 걸쳐서 신분 세탁을 합니다.
중국에서 사업가로 알려지기 시작한 박석영은 북한이 개발하고 있다는 영변 핵 발전소 근처까지 접근해서 북한의 핵 개발 상황을 알아내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를 위해서 북한과 연줄이 있는 조총련계 사업가와 가까이 지내던 중 한 통의 전화가 옵니다. 북한 대외사업부를 맡고 있는 북한 고위간부 리명운(이성민 분)는 외화벌이를 위해서 유능한 남한 기업가인 박석영에게 직접 연락을 합니다.
당연히 리명운은 박석영의 과거를 다 알고 있습니다. 남한 정보부 출신의 기업가라서 여러가지 요구를 합니다. 이후 두 사람은 다른 곳에서 만나서 북한의 다른 고위 간부들과 함께 합니다. 2차 테스트까지 마친 박석영은 점점 북한 고위층의 신뢰를 받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신뢰를 쌓아가던 중 북한의 VIP와 독대하는 기회가 생깁니다. 이 과정에서는 좀 더 심한 신분 검증을 합니다.
박석영은 북한을 배경으로 한 광고 사업을 제안하면서 이 사업을 통해서 북한은 큰 돈을 벌 수 있다고 제안을 하고 김정일은 사업을 허락합니다. 박석영은 김정일의 허가를 받고 북한에서 아름답다고 소문난 관광 명소를 카메라로 담으면서 사전 답사를 합니다. 하지만 이는 철저히 북한 속을 구석구석 살피기 위한 계략입니다. 박석영의 최종 목적지는 영변입니다. 영변에 있는 핵시설을 가능하면 가장 가까이 근접해서 북한이 핵 개발을 하는 지 중단된 상태인지를 알아내야 합니다.
여기까지 보면 남한 정보원의 북한 침투기를 그린 첩보 스릴러로 보입니다. 그러나 영화는 후반 들어서 다른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바로 1996년 총선 전에 터진 북한군의 도발입니다. 흥미롭게도 제가 군에서 전역한 후 며칠 후에 터진 사건으로 저에게는 큰 기억이 없던 사건입니다. 아마도 전역 후에 친구들과 술독에 빠져 살던 시기같네요.
1996년 4월 총풍 사건을 찾아보니 신문 1면을 넘어서 신문 반을 차지할 정도로 큰 사건이었습니다. 총풍 사건은 북한군이 비무장지대인 판문점 인근에 박격포 부대 및 무장 요원을 배치했고 한국군은 그에 상응하는 대응을 했던 사건입니다. 또 다시 한반도 전체에 전운이 감돌던 일촉측발의 사건이었습니다.
지금이야 이 사건이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이 북한에 돈을 주고 휴전선 전체에 전운이 감돌고 전쟁의 기운을 불어 넣어 달라고 했던 용납할 수 없고 이해가 안 가는 사건으로 밝혀졌지만 지금도 이 사건은 참으로 기이한 사건이자 현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신한국당 무뢰배들의 수준을 여실히 드러낸 사건입니다.
국가를 위해서 뛰던 흑금성과 여당을 위해 뛰던 안기부의 대립
안기부는 국가 최고의 권력 기관으로 하늘의 나는 새도 떨어트릴 수 있는 돈과 권력을 가진 정보집단체입니다. 정권과 상관 없이 우리의 안전을 가장 위협하는 존재를 감시하고 분석하고 대응하는 음지에서 일하는 집단이죠. 문제는 이 안기부(현 국정원)가 국가와 민족이 아닌 정부 여당의 선거에 도움이 될 만한 행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안기부 해외실장인 최학성은 정부 여당의 압력과 안기부장의 압력으로 당시 정부 여당인 신한국당 총선과 대선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계획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 국민들이 가장 걱정을 많이 하는 부분은 안보입니다. 안보는 사람의 공포를 먹고 자랍니다. 한국인에게 가장 공통적인 공포는 북한입니다. 북한이 불바다 운운하면 사재기를 하는 등 큰 공포를 집어 먹습니다. 지금이야 북한이 불바다 발언을 해도 콧방귀도 안 뀌지만 1990년대 당시는 서울 불바다 발언에 라면이 동이 날 정도로 큰 공포를 느끼던 시절입니다.
이 영화 <공작>을 보면 그 서울 불바다 발언이나 심지어 KAL기 폭파 사건인 김현희 사건도 다 남한 정부의 공작이 아니였을까 할 정도로 한국 집권 여당은 북한을 상당히 잘 이용했습니다. 잘 이용하다 못해 서로가 자국민을 사로 잡기 위해서 잘 이용했죠. 그 대표적인 예가 이 영화 <공작>의 배경이 된 1996년 총선 전의 총풍 사건입니다.
국가주의자인 박석영은 판문점에서 일어난 총풍 사건에 대해서 안기부 해외실장에게 물어보지만 최학성은 자세히 말해주지 않습니다. 자신의 작전인 대북침투 후 영변 핵 개발 탐사 계획이 총풍 사건으로 흐트러질 것 같아지자 박석영은 베이징에서 한국 안기부와 북한 고위층이 만나는 호텔을 감청을 합니다.
여기서 상관인 최학성과 박석영이 생각하는 국가관이 갈립니다. 최학성은 여당이 국가라고 생각하는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이고 박석영은 여당이건 야당이건 상관하지 않고 국가만 생각하는 국가주의자입니다. 국가의 안보는 정치가 개입되어서는 안되는 영역이라고 생각하고 허락도 받지 않고 1997년 대선 전에 김정일을 만나러 북한으로 갑니다.
영화는 최학성과 박석영 2명을 내세워서 어떤 사람이 국가를 위한 행동을 하는 사람인지 관객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빨갱이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나라를 통째로 북한에 팔아 넘길 것이라고 생각하는 철저한 반공주의자 최학성이 올바른 행동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웃겼던 것은 철저한 반공주의자 최학성이 빨갱이 집단체인 북한의 고위 간부를 만남을 넘어서 북한에게 휴전선에서 총을 쏴서 남한 대선에 개입 해달라는 부탁을 하는 모습 자체가 아이러니컬합니다.
더 놀라운 건 이런 사건이 가상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가 잘 몰랐던 과거에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라는 겁니다. 이 사건이 김대중 정권에 밝혀진 이후에 이름이 국정원으로 바뀌지만 똥개가 똥을 끊지 못하듯 이명박 박근혜 정부 당시 국정원은 댓글 공작을 통해서 또 다시 대선에 개입합니다. 국정원이라는 집단체 자체가 국가의 안위 보다는 보수 정당의 후원 단체 같은 느낌입니다.
사상은 다르지만 국가를 위하는 마음은 같았던 박석영, 리명운
사상이 달라서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사이지만 그 생각의 방향은 달라고 생각의 깊이와 신념이 같으면 서로가 동질감을 느끼게 됩니다. 남한의 흑금성 박석영이 있다면 북한엔 리명운이 있습니다. 두 사람은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는 원리 원칙주의자입니다. 단돈 10달러에 팔려 나가는 북한 주민들의 현실을 마음 아파 하는 리명운. 하지만 체재를 비판하는 사람은 가차없이 잡아 넣는 잔혹함도 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모두 개인과 자신이 속한 집단체의 안위 보다는 국가를 위하는 생각은 동일합니다. 기회주의자인 남한 안기부 최학성과 북한 정무택과 원리원칙주의자인 박석영과 리명운을 배치해서 이념은 달라도 곧은 신념을 가진 사람들을 도드라지게 담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기회주의자들이 만든 계략에 많이 속아왔습니다. 밑도 끝도 없이 북한을 탓하고 북한을 욕하고 북한을 비난하면서 반사 이득을 얻었던 정치 잡단체의 민낯을 보여주면서 이런 일이 다시는 한반도에서 다시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밀도 높은 고품격 첩보물 <공작>
정말 영화를 잘 만들었습니다. 총 한 번 쏘지 않고 서로를 속고 속이는 아주 밀도 높은 첩보물입니다. 007이 첩보 요원을 액션 스타로 만들었지 실제 첩보 요원들은 격투기 보다는 끊임 없는 기다림과 회유와 계략이 기본입니다. 이런 실제 첩보물의 스릴을 제대로 전한 영화가 2014년 제작된 <모스트 원티드 맨>입니다. 이 영화도 첩보 세계를 적나라하게 담은 뛰어난 수작입니다. 이 <모스트 원티드 맨>과 괘를 같이 하는 영화가 <공작>입니다.
다른 점은 <공작>은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과 우리의 역사의 이면을 담고 있다는 점이 다릅니다. 영화는 박석영이 어떻게 북한에 침투하는 지와 침투하는 과정에서의 검증 과정과 서로에게 신뢰를 구축해가는 과정 등등이 아주 밀도 높게 담겨 있습니다. 언제 정체가 발각 될까 하는 조마조마함과 안기부 요원이 어떤 노력을 통해서 북한의 정보를 빼내는 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금단의 땅인 북한 자체가 하나의 감옥이자 비밀의 공간인데 여기를 드나드는 자체가 영화 전체에 습한 기운을 자박자박 깔아 놓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동들이 날이 선 면도날 위를 걷는 느낌입니다. 윤종빈 감독이 연출을 정말 잘 했습니다. 총 한 번 쏘지 않지만 그 어떤 첩보 영화보다 흥미롭습니다. 이 밀도 높은 스릴에는 배우들의 역할이 컷습니다. 황정민이야 워낙 잘 하니 기대도 안 했고 실망도 안 하는 준수한 연기를 해서 식상한 면이 있지만 리명운 역할을 한 이성민 배우의 진면목을 또 다시 느낄 수 있는 영화입니다. 정말 정말 연기 잘 합니다. 조진웅도 인상 깊은 연기를 합니다.
그렇다고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닙니다. 가장 아쉬웠던 것은 탈것에 대한 CG입니다. 촬영 장소 섭외는 아주 잘 했고 북한을 담은 건물과 거리 처리는 아주 잘 했습니다. 문제는 비행기, 기차, 헬기 같은 탈 것에 대한 CG가 조악합니다. 특히 고려항공 여객기 CG는 장난감을 이용해도 이것 보다 낫겠다 싶을 정도로 조악합니다. 실제 여객기의 이륙 장면을 봤다면 이런 어설픈 CG로 만들지 않았을텐데 너무 물리감이 떨어져서 눈쌀이 지푸려지네요. 하지만 이건 영화의 재미를 해칠 정도의 위치도 역할도 아니기에 큰 문제는 아닙니다. 다만 조금 아쉬울 뿐이죠.
흑금성이 추진했던 북한을 배경으로 한 광고 사업은 김대중 정권 때 완성이 됩니다. 영화 후반 카메오로 출연한 이효리가 북한 배우 조명애와 함께 삼성전자 애니콜 광고에 출연합니다. 당시 이 광고는 꽤 화제가 되었던 광고로 통일이 곧 다가올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지난 9년 동안 통일 대신 전쟁의 공포에 떨었습니다. 영화 <공작>은 남북한 정권이 어떻게 국민을 속이고 서로를 정치에 이용했는지에 대한 고발장 같은 영화입니다. 이미 다 밝혀진 이야기지만 모르고 있는 분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이 있죠.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강력한 공포의 대상이었던 남과 북. 이제는 새로운 관계로 남북한 정상이 함께 백두산이 오르는 시대가 되었네요
부끄러운 과거를 담은 고발장 같은 영화이자 다시는 총풍 사건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긴 좋은 영화입니다. 물론 흑금성의 실제 모델인 분이 쓴 책을 바탕으로 해서 흑금성을 미화하는 부분이 있고 그런 부분은 감안해서 봐야 하지만 명명백백한 부끄러운 우리의 과거를 밀도 높게 담은 아주 좋은 영화 <공작>입니다. 추천하는 영화입니다.
별점 : ★★★★
40자 평 : 남북한 정치인들의 공작으로 속고 살았던 과거에 대한 고발장이자 부끄러운 반성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