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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영화창고

부와 가난의 대물림의 문제를 정면 비판한 영화 버닝

by 썬도그 2018.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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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이 칸 영화제에서 큰 상을 받길 바랬지만 아쉽게도 받지 못했습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본 감독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유사 가족 이야기 <만비키 가족>이 대상을 탔습니다. 이창동 감독의 <버닝>이 수상을 하지 못했지만 다른 감독도 아닌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가 대상을 탄 것은 무척 기쁘네요. 사실 영화제에서 큰 상을 받았다고 무조건 좋은 영화고 안 받았다고 무조건 대상보다 떨어지는 영화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번 칸 영화제의 심사위원들의 면면을  보면 어느 정도 수상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상은 그냥 하나의 상징일 뿐입니다. 게다가 다른 감독도 아닌 이창동 감독 아닙니까? 국내 유명 감독들은 많습니다만 제가 가장 좋아하고 높이 인정하는 감독은 이창동 감독입니다. 왜냐하면 이창동 감독은 한국 사회의 병든 모습을 영화로 고발하는 감독이기 때문에 좋아합니다. 그래서 전 이창동 감독을 다큐 감독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동산 개발 광풍의 쓸쓸하고 씁쓸한 뒷골목을 담은 <초록물고기>를 지나 항상 부채의식을 가지게 하는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을 적나라하게 담은 <박하사탕> 그리고 근 10년 안에 본 영화 중 최고의 영화라고 생각하는 영화 <시>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오늘날 우리들의 추악한 얼굴을 담았습니다. 영화 <시>를 조조로 보면서 저처럼 혼자 관람하러 온 바로 앞줄에 앉은 여자 관객 분처럼 영화 끝나기 20분 전부터 펑펑 울었습니다. 너무 울어서 눈물이 닦고 마르길 기다렸다 나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같은 시간 다른 세상을 사는 청춘의 서글픔을 담은 영화 버닝

개봉하자마자 보려고 했지만 시간이 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현학적이다 이창동 영화답지 않게 서사를 이해 못하겠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지 모르겠다 등 아쉬운 소리가 많이들렸습니다. 동시에 메타포(은유)를 음미하기 위해 2번 이상 보는 N차 관람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영화 후반 한숨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옆에 관객이 저를 쳐다 보네요. 보던말던 한숨을 몇 번 더 내쉬었습니다. 

영화가 생각보다 깁니다. 무려 2시간 30분입니다 그러나 한 순간도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나만 재미있게 본 건가 했는데 같이 엘레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던 20대 여자분이 어머니와 통화하면서 영화 괜찮고 재미있게 봤다고 하는 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네요. 네! 강추하는 영화입니다. 특히 20대 분들이라면 꼭 보라고 강권하고 싶습니다. 

종수(유아인 분)은 군대를 갔다온 후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20대 청년입니다. 20대 문과졸업생답게 취직은 하지 못하고 택배일을 하면서 자기 앞가름만 겨우 합니다. 어머니는 어렸을 때 집을 나갔고 누나는 결혼을 했습니다. 자취를 하다가 최근에 아버지가 불같은 성질을 이기지 못해서 공무원을 폭행했다가 폭행죄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게 그날도 택배 차량을 몰고 물건 배송을 하다가 나레이터 모델을 하고 있는 고향 친구인 해미(전종서 분)를 만납니다. 해미는 종수에게 술 한잔 하자고 말을 건냈고 종수와 해미는 술을 마십니다. 

해미는 아프리카로 여행을 갈 예정이라면서 자기가 여행을 가 있는 동안 고양이 보일을 맡아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해미는 남산 밑 후암동에서 자취를 합니다. 해미는 종수에게 여행 가 있는 동안 가끔 보일에게 먹이를 주라고 부탁을 하고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납니다. 아버지가 구치소에 있어서 파주의 고향집으로 돌아온 종수는 부끄러움이 많은 고양이 보일의 먹이를 주러 해미네 집에 들립니다. 그러던 중 해미에게서 전화가 옵니다. 내일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오는데 마중 나와달라고 합니다.

낡은 트럭을 몰고 공항에 도착한 종수는 해미를 기다렸는데 해미는 여행에서 만난 오빠인 벤(스티븐 연 분)과 함께 공항 게이트에 나옵니다. 벤은 자신이 잘 아는 식당이 있다면서 함께 식사를 하자고 권합니다. 술자리에서 해미는 여행지에서 본 노을의 아름다움을 설명하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 벤은 자신은 어른이 되고 나서는 한 번도 운 기억이 없다면서 세상은 즐기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벤의 모습을 이상하게 여긴 종수는 조심스럽게 직업이 뭐냐고 묻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그냥 노는 거예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금수저인 벤. 벤은 그렇게 술에 취한 해미를 포르쉐에 태우고 사라집니다. 그렇게 벤과 해미 종수는 수시로 만납니다. 벤은 매너가 아주 좋은 사람으로 해미와 종수를 금수저 모임에 초대를 하고 같이 놉니다. 종수는 벤이 해미를 노리개로 여기는 것 같아 불쾌하지만 여유롭고 교양 있고 매너 좋은 벤을 거부하지 못합니다. 

며칠이 지나 종수는 집에서 마지막 남은 송아지를 돌보다가 해미에게 온 전화 한 통을 받습니다. 벤 오빠와 지나가다가 파주 고향에 왔는데 종수네 집에 잠시 들리겠다고 합니다. 포르쉐를 몰고온 벤과 해미와 함께 석양을 보면서 대마초를 함께 핍니다. 해미가 술과 대마초에 취해서 잠시 잠들어 있는 동안 벤은 자신의 비밀을 하나 말합니다. 세상 모든 것이 재미이고 노는 것과 일하는 것은 구분이 없다고 말하는 생각하는 개츠비 같은 벤은 2개월에 한번씩 쓸모없고 많은 비닐하우스를 태운다고 합니다. 

벤도 그런 행동이 범죄행위라는 것을 알지만 한국 경찰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면서 오늘 파주에 온 것도 불 태울 비닐하우스를 찾기 위해서 왔고 점찍어 둔 비닐하우스가 있다고 말합니다. 깜짝 놀란 종수는 그게 나쁜 행동이라고 말을 하지 못합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종수는 해미와의 연락이 끊어집니다. 이후 종수는 벤의 주변을 맴돌면서 해미에 대해서 묻습니다.


금수저와 흙수저로 태어난 이유가 있을까?

파주 집에서 노을을 같이 바라보던 벤은 종수에게 이런 뉘앙스의 말을 합니다.  

"비가 많이 내려서 홍수가 났고 사람들이 떠내려 가는데 비에게 잘못을 물을 수 있을까?"

전 이 대사가 이 영화 <버닝> 전체를 대변하는 대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금수저들을 부러워하면서 동시에 비난하고 싶어합니다. 자수성가한 사람은 그 사람이 정치인의 발을 핥든 편법을 사용했든 크게 성공하기까지 온갖 노력을 했다는 그 자체를 높이 평가합니다. 우리가 분노하면서 동시에 부러워하는  사람들은 아무런 노력도 없이 태어나니 아버지가 재벌이고 아버지가 유명인인 일명 금수저들이죠. 그렇다고 금수저를 무조건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모 항공사 재벌 2세처럼 갑질을 대놓고 하는 금수저는 갑질을 하는 행동을 비난하는데 금수저라는 배경이 비난을 더 증폭제가 됩니다. 

우리 인간은 인류가 생긴 이후로 평등하게 태어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다만 평등하게 태어나지 않은 결함을 정치와 사회 시스템을 통해서 태어남의 불평등을 줄이고 노력한 만큼 열매를 얻을 수 있는 세상으로 만드는 것이 가장 건강한 사회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탄생하면서 인류는 자본을 축척하기 시작합니다. 축적된 자본은 다시 사회로 환원되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식에게 물려주면서 재벌2세가 탄생합니다. 재벌2세는 이제 흔한 단어가 되었고 이제는 재벌3세를 넘어서 재벌4세가 나오고 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금수저를 소비하는 방식은 극단적입니다. 돈을 무기 삼아서 흙수저 주인공에서 갑질을 하는 악인으로 그리거나 신데렐라 같은 여주인공과 사랑을 이루는 백마탄 왕자입니다. 이런 묘사는 비현실적입니다. 영화 <버닝>의 벤이 가장 현실적인 금수저 아닐까요? 직업이 없으면서 세상 모든 것을 즐기는 태도. 하루 먹고 살기도 어려운 사람에게 앞에서는 매너 있게 행동하면서도 뒤에서는 하품을 하고 조롱하는 듯한 태도! 실제로 우리가 겪는 금수저들은 그런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아닐까요?

마치 어린 아이가 개미와 잠자리를 재미로 잡아서 짖누르고 날개를 찢으면서 희열을 느끼지만 개미나 잠자리는 삶을 위협받고 죽는 모습처럼 느껴집니다. 이를 금수저의 매너 뒤의 비열함을 종수는 잘 압니다. 뭔가 잘못되었다고 이건 올바른 행동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정작 벤 앞에서는 당신이 해미를 노리개로 삼았잖아!라고 말하지도 못합니다. 


벤은 비와 같은 존재입니다. 비로 태어나서 홍수를 일으켜서 사람을 죽였지만 비가 무슨 죄가 있겠냐고 항변하는 벤. 금수저로 태어났다고 비난을 받아야 하냐고 말하는 벤의 태도에 종수는 벤에게 할 말이 있지만 직접 말하지 못하고 주변을 서성입니다.

영화 <버닝>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모습은 모든 것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흙수저라는 재물을 가지고 노는 듯한 신의 위치에 있는 벤이 성채와 같은 높은 빌딩 피트니스 센터에서 운동을 하면서 길거리에서 우유로 허기를 달래는 종수를 내려다 보는 모습은 현재를 사는 청춘들을 대변하는 듯합니다. 누군 금수저로 태어나서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태도와 흙수저로 태어나서 왜?라고 묻는 듯 하늘과 같은 높은 곳에서 운동을 하는 벤을 올려다 보는 종수의 구도가 마치 현재의 한국 사회를 보는 듯한 모습입니다.

종수는 자신이 흙수저인 이유를 벤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러나 금수저인 이유도 흙수저인 이유도 알 수 없습니다. 세상 자체가 그렇게 생겨 먹었습니다. 그럼에도 종수는 그 이유를 벤에게서 찾고 싶습니다. 그러나 벤의 숨겨진 비열함을 느낄뿐 벤이 악인이라는 증거가 하나도 없습니다. 특히나 보이는 것만 믿는 종수에게 벤을 비난하고 의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보이는 것만 믿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2018년 한국을 그대로 담은 영화 <버닝>

종수는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현실주의자입니다. 해미는 중학교 때 종수가 길을 건너서 자기에게 다가와서는 못생겼다라고 말한 그 기억을 종수에게 전해줍니다. 종수는 당황합니다. 그러나 해미는 성형을 해서 너무나 예뻐졌습니다. 같은 해미지만 예뻐진 해미에게 종수는 사랑을 느낍니다. 이런 모습은 또 있습니다. 해미가 키우는 보일이라는 고양이를 잠시 맡아 달라는 해미에게 종수는 상상의 고양이가 아니냐고 넌지시 말합니다. 그러나 먹이를 주러 온 해미의 집에 매번 보이지 않는 보일에 의심을 하지만 고양이 똥을 보고 해미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해미가 말한 자기네 집 앞에 있던 우물에 빠졌던 이야기에 혼란을 느낍니다. 해미가 사라진 후 해미의 가족이 운영하는 식당에 가서 우물 이야기를 했더니 해미 어머니와 언니는 해미가 거짓말을 잘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16년 만에 만난 종수의 어머니는 마른 우물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일까요? 우물에 대한 논란과 해석은 참 많습니다. 해석에 정답은 없죠. 전 해미와 이해관계가 있는 해미 가족의 말이 미덥지가 않네요. 하지만 가족에 대한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저와 반대로 해미 가족의 말을 믿고 수십 년 만에 만난 아들 앞에서 돈을 꿔 달라고 하는 종수 어머니 말을 거짓말이라고 느낄 분도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또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 <버닝>을 해미의 실종 사건으로 여기는 스릴러 영화로 볼 수 있습니다. 그게 가장 보편적 해석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도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의문이 들게 합니다. 따라서 이 영화는 스릴러 영화일 수도 있고 한국 사회의 부익부 빈익빈, 부의 대물림, 가난의 대물림을 은유 가득한 시선으로 비판한 영화로 볼 수 있습니다. 전 스릴러 영화로도 보이지만 제가 사회 비판적 사고를 좋아하고 그런 시선을 추종하다 보니 이 영화 <버닝>을 쓰디 쓴 사회비판 영화로 보여지네요. 

보는 사람에 따라서 영화 <버닝>은 다양한 시선과 내용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 영화 <버닝>을 단숨에 올해 최고의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영화 <쓰리빌보드>처럼 좀 더 명확하고 명징한 내용으로 담아도 좋은 영화이지만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서 관객에게 여러 각도로 곱씹어 보게 한 모습이 좀 더 좋은 영화로 느껴지네요


욕망에 관한 영화 <버닝>

종수 입장에서 보면 영화 <버닝>은 욕망에 관한 영화입니다. 해미는 아프리카 여행 이야기를 하면서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 이야기를 합니다. 리틀 헝거는 1차원적인 의미 그대로 배고픈 사람이고 그레이트 헝거는 삶의 의미를 찾으면서 채워지지 않는 삶에 대한 배고픔을 말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종수에게 있어 해미는 성욕을 채우는 리틀 헝거였습니다. 종수에게 있어 벤은 부에 대한 욕망을 상징하는 또 다른 리틀 헝거였죠. 그러나 해미를 사랑하면서 그레이트 헝거가 됩니다. 동시에 개츠비 같이 벤에게서도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그레이트 헝거가 됩니다. 

배고픔에는 왜가 없습니다. 뇌에서 배가 고프다는 신호를 보내니까 배가 고픈 것입니다. 그러나 삶의 배고픔에는 왜가 있습니다. 왜 나는 흙수저일까? 왜 저 사람은 아무 노력없이 금수저일까? 왜 저 사람은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반사회적 행동이자 위법행위를 하는데도 죄책감이 없을까? 난 무엇 때문에 살까? 왜 취직이 안 될까? 왜 이 세상은 불공평할까?라는 생각 속에서 종수는 점점 그레이트 헝거가 됩니다. 

이 배고픔은 종수를 옥죄입니다. 종수는 리틀 헝거가 되어서 벤이 태우겠다는 비닐하우스의 파수꾼이 됩니다. 하지만 태움의 대상이 은유라는 것을 점점 깨닫게 되면서 그레이트 헝거가 됩니다. 


쓸모 없이 많은 잉여의 삶을 사는 청춘들을 비난하는 시선에 불을 지르다

벤이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취미를 가진 이유는 '쓸모없고 많아서 하나 태워도 누구도 관심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종수를 화나게 합니다. 마치 자신의 삶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쓸모없고 많은 잉여 인간들. 벤은 재미로 잉여의 존재를 태우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전혀 없습니다. 그 자리에서 잘못된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종수는 굴복합니다. 

이런 태도에 종수를 비난할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보다 상위에 있다고 느끼는 사람의 비리를 눈감아주니까요. 벤의 이런 말은 소리 없는 폭력이지만벤 스스로는 폭력이라고 느끼지도 않습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금수저들 끼리만 살아서 다른 계층에 대한 민감성이 없습니다. 최근 판사와 검사들의 몰상식한 행동들을 보면 벤이 생각이 납니다. 금수저로 태어나서 금수저 친구들만 만나고 지낸 판사와 검사들이 흙수저의 삶을 이해하는 판결을 할 수 있을까요? 점점 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세상에 종수와 혜미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벤, 종수, 해미가 많아질수록 세상은 더 각박해질 것입니다. 

종수와 해미는 시골길 같습니다. 대부분 가로등이 없어서 종수의 트럭 헤드라이트로 밝히면서 가야 합니다. 반면 벤의 삶은 도시의 도로입니다. 헤드라이트를 꺼도 가로등이 많아서 위험하지 않습니다. 이런 부의 차이가 나는 삶이 현재의 한국 사회의 삶입니다. 종수와 해미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해미가 답을 줍니다. 판토마임을 하던 해미는 "있다고 믿는 게 아니라 없다는 걸 잊어 버리는 거야" 없어서 스트레스 받지 말고 없다는 걸 잊어 버리라고 말합니다. 

벤은 있는데 나는 없다고 슬퍼하지 말고 없다는 걸 잊으라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상대적 박탈감에 대한 고통에 대한 작은 혜안이네요. 동시에 희망도 줍니다. 벤은 종수에게 말합니다. 외롭게 살아온 해미가 자신이 믿는 유일한 사람이 종수라는 말에 벤은 부러움을 느꼈다고 합니다. 누군가에게 거짓이 아닌 믿음이 되는 나무 같은 삶이 벤과 같은 모든 것을 가진 조물주 같은 금수저의 부러움을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정말 좋은 영화 또 보고 싶은 영화이자 배금주의에 물들고 병든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분들에게 강력 추천하는 영화입니다. 통쾌함도 있습니다. 다만 사회에 대한 민감도가 낮은 분들에게는 지루한 영화일 수 있습니다

별점 : ★★★★★

40자 평 : 양극화로 치닫고 있는 자본주의의 첨단을 걷고 있는 병든 한국 사회를 비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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