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었을 때는 사람 이름을 참 잘 외우고 한 번 본 사람은 잊지 않았습니다. 덤바 수라고 인간이 기억할 수 있는 사물과 사람의 숫자인 200명을 훌쩍 넘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특징을 잘 알고 이름도 잘 기억했습니다. 매일 같은 일상이지만 매일 같은 날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세상을 흡수하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긴 중년이라는 계절이 다가옵니다. 매일 같은 사람을 만나고 같은 말을 하고 루틴화 된 일상의 연속입니다. 이런 긴 중년이라는 계절을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로 느껴질 때 갱년기까지 찾아옵니다. 우울이 일상이 된 중년. 이 중년이라는 터널을 지나는 주인공을 담은 영화가 아노말리사입니다.
프로골리 증후군을 앓고 있는 듯한 주인공
아노말리사는 BBC의 영화 컬럼을 기고하는 컬럼리스트가 2016년 올해의 영화 2위에 올려서 보게 되었습니다. 무슨 영화이기에 이리 후한 평가를 했을까요? 이 영화는 스톱 모션 애니입니다. 그런데 얼굴 눈가에 줄이 쭉 가 있어서 대번에 이건 인형이구나를 알 수 있습니다. 마치 구체 관절 인형 같은 느낌입니다. 보통, 스톱 모션 애니는 인형이 아닌 실제 모습을 축소한 모습을 보이려고 하기에 이렇게 이질 적인 모습으로 인형을 만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나! 인형이에요. 사람 아닙니다!라를 드러내 놓습니다. 이런 당찬 모습은 또 있습니다.
주인공인 '마이클 스톤'은 고객 관리에 대한 베스트셀러 저자로 전 미국이 다 알고 있는 유명 작가입니다. 미국 전역을 돌아 다니면서 고객 관리에 관한 강의를 합니다. 그날도 신시내티에 도착한 후 강연을 준비하기 위해 호텔을 하룻 밤을 묶게 됩니다.
마이클은 호텔에 도착한 후 집에 전화를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머리가 긴 남자 목소리가 들립니다. 응? 동성애자인가? 그것도 아이를 키우는? 그렇게 동성애자로 이해하려고 할 때 이상하게도 모든 사람들의 목소리가 남자 목소리이자 동일한 목소리입니다. 이게 뭔 소리인가?라는 생각에 바로 검색을 해보니 마이클은 모든 사람들을 동일한 얼굴과 목소리로 인식하는 '프로골리 증후군'을 앓고 있는 듯합니다. 그렇다고 병에 걸렸다고 나오지는 않습니다. 단지, 주인공이 모든 사람을 동일한 목소리로 인식을 합니다.
이는 병에 걸려서 인식 장애가 생긴 것일 수도 있지만 전 그것보다 권태기에 빠진 한 중년이 겪은 깊은 권태로 느껴지네요. 나이가 들면 들수록 새로운 만남은 줄어들고 루틴화 된 일상이 계속됩니다. 다람쥐 챗바퀴 돌듯 회사, 집, 회사, 집을 왔다갔다하면서 세상 모든 사람이 비슷하게 보여지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을 하나의 객체로 인식하기 시작하면 사람에게 온정을 쏟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합니다.
모든 사람이 비지니스 관계로 만나는 고객들일 뿐이죠. 마이클은 가족마저도 무미건조한 객체로 느끼는 심한 권태를 느끼는 사람입니다. 비록 자신이 쓴 책에서는 고객을 진심으로 대하고 감정적으로 대하라고 하지만 정작 자신은 모든 사람에게서 외떨어진 섬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이런 심한 외로움을 동반한 권태 속에서 옛 애인을 호텔 로비에서 만나지만 추한 모습만 보이고 떠나 보냅니다.
다른 목소리가 들리다
그렇게 지루하고 긴 호텔 방에서 보내는 어둠 속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립니다. 모든 사람의 목소리가 똑같지만 선명한 여자 목소리가 귀에 들리자 복도에 나가서 이방 저방을 두드리며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았습니다.
이름은 리사. 리사는 중학교때부터 함께 지낸 단짝 친구와 함께 마이클의 강의를 듣기 위해서 신시내티에 왔습니다. 명사 마이클을 보자 두 여자는 반가워하고 영광스러워합니다. 그렇게 다시 호텔 로비에서 이런 저런 잡담을 하다가 마이클은 리사에게 프로포즈를 합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리사는 다른 목소리를 지녔고 그 다른 목소리에 반해서 평생을 함께 할 것을 약속합니다. 그리고 애칭도 즉석에서 만들어줍니다. 잘 정돈된 권태로운 세상에서 다른 목소리를 지닌 리사에서 혼돈이라는 뜻희 아노미와 리사를 섞어서 아노말리사라는 애칭까지 지어주죠. 그렇게 두 사람은 원나잇 스탠드를 보냅니다.
사랑과 삶의 가장 큰 적은 권태
그런데 다음날 일어나보니 리사의 목소리 뒤에 남자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마이클은 당혹스러워합니다. 새로운 사랑, 새로운 무엇인가를 느꼈는데 다시 권태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이는 우리의 삶을 은유하는 듯합니다. 사랑도 그렇죠. 처음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것이 사랑스럽고 새롭고 신기하고 매력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함께 살면서 이에 붙은 고추가루에 인상을 쓰고 평소에 하던 행동임에도 권태기에 접어들면 그런 평소의 행동 하나 하나에 짜증이 납니다. 삶도 그렇죠. 똑같은 행동을 수년 째 하다 보면 삶에 대한 의욕 저하가 발생합니다. 여기에 중년에 찾아오는 호르몬 감소로 인한 우울이라는 공기가 매일 같이 마십니다. 불안과 우울의 복합 감정은 나 자체를 붕괴시킵니다.
결국, 마이클은 강의를 망쳐버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옵니다. 이젠 모두가 똑같이 생겨서 더 짜증이 납니다. 그럼에도 마이클은 갈 곳이 없습니다. 마치 우리들의 중년이 겪는 삶의 권태기를 그대로 담은 영화가 '아노말리사'입니다. 물론, 이런 권태는 저도 요즘 자주 느낍니다. 그래서 사진이라는 취미를 가진 것을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취미 하나 제대로 없는 중년은 위험합니다. 일상이 지루해서 일탈을 할 수 있으니까요. 가족에 올인하지 않고 나만의 시간,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는 행동을 꾸준하게 하면 권태로 인한 삶의 붕괴는 덜 일어날 것입니다.
생각보다 그렇게 좋다고 느끼지는 못했습니다. 애니 자체가 호텔방과 로비에서만 이루어져서 지루한 면도 많습니다. 베드씬이 강해서 청소년 관람 불가라고 하지만 그 장면을 넣지 않았어도 청소년이나 젊은 분들이 보기에는 공감가는 내용이 많이 않아 보이네요. 사랑에 대한 권태를 느껴 본 분들에게는 괜찮은 영화지만 보편적인 추천은 어렵네요.
다만, 목소리 하나로 삶의 무늬를 담은 아이디어는 무척 좋네요.
별점 : ★★★
40자 평 : 매일 같은 얼굴, 같은 목소리를 듣고 사는 권태로운 당신을 담은 자화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