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아온 길을 돌아 볼 때 순차적으로 뒤돌아 보는 것이 아닌 가장 찬란했던 순간들부터 뒤돌아 보게 됩니다. 그 찬란했던 순간이 10대였던 분들은 10대 시절을 먼저 돌아보고 20대면 20대의 순간들을 돌아봅니다. 저 같은 경우는 20대 초중반이 가장 찬란했었습니다. 지금의 20대는 고등학교의 연장선상이 되어서 학업과 취업 스트레스가 가득한 나이가 되었지만 90년대 초에 20대를 보낸 대학생과 직장인들은 그 90년대 초의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를 한껏 들이켰습니다.
1994년 한국 최초의 문민 정부인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을 통해서 2명의 전직 대통령이 법정에 서는 등의 대대적인 혁신 작업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가벼워졌고 세상은 앞으로 나아간다는 강력한 희망의 빛으로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젊은이들은 무거운 시대와 국가에 대한 걱정 대신 자신의 패션을 치장하는 영혼의 르네상스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20대를 칭하는 신조어들이 신세대와 X세대입니다. 외부의 시선을 거부하고 이렇게 입으면 좋거든요!라는 유행어를 만든 젊은이들이 거리에 넘쳤습니다. 동시에 고도산업화의 후유증인 '성수대교 붕괴'와 '삼풍백화점 붕괴'라는 비극이 일어나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20대 초라는 파릇한 나이에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했고 매일매일 약속이 있을 정도로 하루하루 즐거움에 취해있었습니다. 그러나 90년대 당시에는 지금처럼 즐기고 놀 곳이 많지 않았습니다. 데이트나 가장 만만한 여가 장소는 영화관이었습니다. 2016년 지금도 영화관람이 가장 흔한 여가 활용 장소지만 90년대 초중반과 다르게 현재는 여가 활동의 선택지가 더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약 3시간의 시간을 즐겁게 보내기에는 영화관이 가장 가성비가 높아서 지금도 가장 흔한 여가 활동이 '영화관람'이 되었네요
20년 전 다이어리 속에서 발견한 서울극장 영화표들
새로 산 책들이 많아서 책장을 정리하다가 눈에 많이 익은 다이어리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꺼내보니 친구가 전역 선물이라고 선물한 시스템 다이어리네요. 90년대 중반에는 '시스템 다이어리'가 크게 유행했습니다. 지금은 스마트폰에 일정이나 메모를 다 입력하고 다녀서 다이어리를 사용하지 않지만 당시는 다이어리에 일정과 전화번호부, 메모와 일기와 신용카드와 공중전화카드, 학생증을 넣고 다녔습니다.
다이어리만 펼쳐봐도 그 사람의 성격이나 사는 방식을 살짝 엿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녹이 슨 똑딱이 버튼을 보니 정말 오래된 '시스템 다이어리'네요.
다이어리에는 90년대 당시 적은 다양한 메모가 있었습니다. 추천 도서도 있고 사진 관련 서적에 대한 서평이 담긴 신문기사를 오려 놓은 것도 있고 다양한 과거의 흔적이 담겨 있네요.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다이어리에 적인 텍스트들이 추억의 마중물이 되어주네요.
다이어리 중간에는 90년대 중후반에 본 영화표들이 잔뜩 꽂혀 있네요. 한 장 한 장 꺼내보니 명보극장, 대한극장, 지금은 사라진 동숭시네아트와 서울극장에서 본 영화표가 가득 나오네요. <포레스트 검프>, <폭로>, <당신이 잠든 사이에>, <랜섬>, <아마겟돈> 등의 영화표를 보면서 같이 영화를 봤던 친구나 여자 후배들의 얼굴이 떠오르네요.
영화의 거리 종로3가 -을지로 3가 - 충무로
<2006년 피카디리 영화관>
20년 전 다이어리를 보다가 영화 로드가 생각났습니다. 제가 영화에 푹 빠졌던 것은 1988년 고등학교 1학년 때입니다. 짝꿍이 영화 잡지 <스크린>을 학교에 가져와서 같이 봤습니다. 헐리우드 스타들이 담긴 풀컬러 화보에 반해서 그 친구와 함께 영화 참 많이 보러 다녔네요.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마치고 대한극장, 명보극장, 단성사, 피카디리에서 보고 싶은 영화를 참 많이 봤습니다. 당시 중고등학생들이 시험 끝나고 즐길 수 있는 유일한 해방구가 롤러장과 영화관이었는데 범생이들은 대부분 영화관을 갔습니다. 그 친구와 처음 본 영화가 배리 레빈슨 감독의 <피라미드의 공포>였습니다.
1988년은 지금처럼 한 영화를 롤러코스터처럼 30분에서 1시간 단위로 출발 시키는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한 영화관에서 1개의 영화만 상영하는 시대여서 하루에 총 5번 정도 상영만 합니다. 따라서 영화관에 도착하면 바로 영화를 볼 수 없고 보통 3시간 이상 기다려야 했습니다. 운이 없으면 밤 8시 것을 봐야 하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전화 예매가 있던 시절도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영화 1편을 보려고 하루 반나절 이상을 투자해야 했습니다. 고생이라면 고생이지만 영화를 보기 위해서 4시간 이상 투자해야 하는 그 시간이 저에게는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대한극장에서 오후 4시 영화를 끊은 후에 2시간을 어떻게 때울까 하다가 친구가 다른 영화관을 가보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그렇게 충무로 대한극장을 지나 인쇄골목길을 지나서 지금은 사라진 스카라 극장과 지금은 뮤지컬 공연장으로 변신한 명보 극장(명보 아트홀)을 지나서 을지로의 국도 극장을 지나 종로 3가에 도착했습니다.
종로 3가에는 유명 개봉관들이 가득했습니다. 개봉관이라는 단어를 지금의 10,20대 분들은 잘 모를 거에요.
개봉관이란 영화를 가장 처음 개봉하는 곳으로 서울에서는 충무로와 종로 일대의 대형 영화관을 개봉관이라고 합니다. 이 개봉관에서 한 영화를 개봉한 후에 재미없는 영화는 몇 주 또는 몇 개월 후에 영등포나 청량리와 같은 서울 부도심의 2류 개봉관인 재개봉관에서 좀 더 싼 가격으로 개봉을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도 내려가면 서울 변두리에 많은 3류 개봉관에서 상영합니다. 3류 개봉관은 동시개봉관이라고 하는데 저렴한 가격에 2편의 영화를 보는 1+1 영화관이었습니다.
싼 가격에 2편을 볼 수 있지만 좌석제도 아니고 영화관에서 담배도 필 수 있어서 너구리 굴 같았습니다. 게다가 1,2류 개봉관에서 수백회 이상을 상영한 후 3류 개봉관에 도착한 필름은 필름에 하얀 줄이 가득한 비가 내리는 영화들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학생들에게는 인기가 높았습니다. 그러나 전 3류 개봉관보다는 종로 3가에 몰려 있는 개봉관을 많이 찾았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누구보다 먼저 영화를 보는 것을 무척 좋아해서요. 종로 3가에는 <피카디리>, <단성사>, <서울극장>이 있었습니다. 이 3개의 개봉관은 대한극장과 함께 가장 재미있고 인기 있는 개봉 영화를 많이 상영했었습니다. 충무로에서 을지로 3가를 지나서 종로 3가까지 이어지는 영화관 거리를 왕복하는 것이 영화 예매를 한 후 영화 보기 전의 일과였습니다.
<단성사 건물>
종로 3가의 영화관들은 멀티플렉스관과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CGV라는 거대 자본의 공습으로 인해 전국에 개봉관이 보급되면서 옛 명성을 이어가지 못하고 사라지거나 쇠락해지고 있습니다. 단성사 같은 경우 국내 최초의 영화관이자 영화 <장군의 아들>에서도 나온 영화관이었는데 리모델링 후 멀티플렉스관으로 다시 태어났다가 경영 악화로 현재는 개점 휴업 상태가 되었습니다.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네요.
<CGV 피카디리 1958>
피카디리는 영화배우들의 핸드 프린팅이 있던 곳이였습니다. 또한 영화 <접속, 1997년 개봉>의 마지막 장면이 촬영된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도 현재는 롯데시네마를 지나서 CGV에 위탁 운영을 하고 있습니다. 피카디리의 옛 정취는 다 사라졌습니다. 안타까운 풍경이죠.
서울은 참 변화무쌍한 도시입니다. 그래서 잠시 한 눈을 팔면 어제의 풍경이 사라지고 새로운 풍경이 생깁니다. 이렇게 새로운 것, 새 건물을 추구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추억의 마중물이 되는 장소와 공간과 건물이 다 사라지고 있습니다. 종로 3가 개봉관 풍경도 추억의 마중물이 되지 못하고 추억의 발화점 역할도 못하는 말라버린 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추억의 샘이 마른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생기 있는 추억의 샘이 흐르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서울극장>입니다.
서울미래유산에 선정된 서울극장
서울은 추억이 매일 같이 파괴되는 도시입니다. 내가 뛰어놀던 놀이터와 마을 입구가 사라지고 빨대같이 편의성만 가득한 거대한 아파트만 늘어가고 있습니다. 고도성장기에서는 이런 풍경이 자연스럽고 발전의 상징이었습니다. 오래된 것은 무조건 천시하는 문화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도성장기가 끝나고 뒤를 돌아보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우리가 살아온 흔적을 되돌아볼 수 있는 흔적이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오래된 것이라고 무조건 없애기만 했던 우리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반성하고 옛 기억을 간직한 공간과 건물을 지정해서 미래 세대에게 전달해줄 곳을 발굴합니다. 서울시는 문화재로 등록되지 못한 근현대 역사를 간직한 문화유산을 지정했습니다. 그렇게 미래 세대에게 전달한 가치가 있는 유,무형의 모든 것을 '미래유산'으로 지정했습니다.
'미래유산'에는 건축물, 서적, 예술품, 공산품과 음악, 의식, 기술, 시장과 마을 골목 같은 공간 등을 지정했습니다.
2013년부터 '미래유산'을 발굴하기 시작해서 2015년 현재 378개의 문화유산을 발굴했습니다. 서울시의 이런 작업은 무척 중요하고 감사합니다. 옛 것이라고 무조건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이야기를 품고 있는 보호할 가치가 있는 유,무형의 존재들을 지정해서 미래 세대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서울극장입니다.
서울미래유산 바로가기 : http://futureheritage.seoul.go.kr/
서울극장은 다른 멀티플렉스관과 달리 건물 전체가 영화관입니다. 작은 마당 같은 공간부터 영화관이 시작이 됩니다.
이점부터 다른 멀티플렉스관과 다릅니다. CGV나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같은 영화관들은 쇼핑물 꼭대기 층이나 지하 층에 지라잡고 있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내려와야 합니다. 영화관이라기보다는 쇼핑몰의 부속 건물 같은 느낌입니다.
# 서울극장의 역사
서울극장 입구에는 Since 1964로 되어 있습니다. 1964년이면 역사가 52년이 되었네요. 그러나 서울극장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것은 1978년입니다. 서울극장은 70년대 당시 영화 제작사인 '합동영화사'를 설립한 (故) 곽정환 회장이 대한극장이 운영하던 2류 개봉관인 재개봉관인 '세기극장'을 인수한 후 이름을 '서울극장'으로 바꾸고 재개봉관보다 격이 높은 개봉관으로 만듭니다. 어떻게 보면 영화사가 영화를 제작하고 배급 상영까지 하는 현재의 일원화 시스템과 비슷합니다만 개봉관이 1,2개 밖에 되지 않아서 일원화의 폐해가 심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1984년 서울극장은 국내 개봉관 중 가장 많은 관람객인 100만 5천명의 관객을 동원해서 그해 관객동원 1위를 차지했습니다.
#국내 최초 멀티플렉스관
국내 최초 멀티플렉스관을 1998년에 만들어진 CGV 강변 11이라고 합니다. 무려 11개의 스크린이 있어서 한 곳에서 다양한 영화를 골라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3개 스크린을 제공한 서울극장을 국내 최초의 멀티플렉스관으로 인정하고 싶습니다.
1978년 1개관으로 시작한 서울극장은 1989년 국내 최초로 3개관을 갖춘 멀티 상영관으로 변신을 합니다. 1관은 칸느, 2관은 아카데미 3관은 베니스라는 이름까지 있었습니다. 제가 이때부터 서울극장을 들락거리기 시작합니다. 단관이었을 때는 영화를 본 기억이 없지만 3개관으로 변신한 후 많은 영화를 봤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89년 개봉한 '첩혈쌍웅'입니다. 당시 어머니가 충무로 제일병원에 입원해 있어서 여름방학 보충수업을 마치고 버스를 타고 병원에 자주 갔었습니다. 병간호를 하다가 영화 로드를 걸어서 서울극장에서 혼자 '첩혈쌍웅'을 본 기억이 아직도 나네요. 당시 여러가지로 참 힘들었는데 영화를 보고 잠시 위안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첩혈쌍웅'이 잊히지 않아요.
3개관이었을 때 이 행복한 나눔 가게가 있던 곳에 매표소가 있었어요.
3개관으로 운영하다가 곽정환 회장은 서울극장을 더 크게 확장을 합니다. 옆에 있던 건물과 집을 사들여서 1997년 4개관을 추가합니다. 이렇게 총 7개관 4,000석 규모로 확장합니다. 이후 2002년에 4개관을 더 추가해 현재의 11개관의 대형 복합상영관으로 확장합니다.
서울극장은 80,90년대 영화관에서 가장 시설이 좋은 영화관이었지만 2천년대 들어서면서 CGV와 롯데시네마 같은 거대 자본이 영화 산업에 뛰어들면서 상대적으로 쇠퇴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CGV와 롯데시네마가 제작 배급 및 상영 산업에 뛰어들면서 영화관들의 시설이 엄청나게 좋아집니다. 앞 관람객이 큰 머리 관람객에 대한 공포를 제거한 계단식 좌석과 편한 좌석은 영화 관람의 편의성을 증폭시킵니다. 그러나 동시에 영화 관람을 문화 향유가 아닌 소비 산업으로 전환시켜서 여가보다는 편의점에서 컵라면 먹는 느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여기에 평균적 재미만 추구하는 TV드라마 같은 보편적인 재미만 제공하는 지루한 영화들이 난무하는 영화들을 양산하는 전초기지가 되어버립니다.
영화관 시설은 좋아졌지만 대신 지리멸렬한 영화들을 양산하는 문제를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는 마치 신체 발육은 좋아졌으나 깊이 있는 사고를 하지 못하는 요즘 세태와 크게 다르지 않네요.
오랜만에 찾아간 서울극장에서 발견한 추억들
다이어리에서 발견한 서울극장표를 보고 서울극장을 오랜만에 자주 찾았습니다. 매주 1편 이상의 영화를 보지만 집 근처에 있는 영화관이나 단골 영화관을 주로 애용해서 자주 찾지는 못합니다. 1년 전에 '서울극장'에서 영화 시사회를 본 이후로 처음 찾게 되네요
서울극장 앞에는 다양한 분식과 주전부리를 파는 가판대가 있습니다. 이 가판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네요. 영화를 보고 나오면 항상 출출했는데 고소한 냄새를 못 이기고 많이 사 먹었던 기억이 나네요.
서울극장의 외형적 변화는 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페인터스라는 미술 퍼포먼스 공연을 하네요. 어쩐지 서울극장 로비에 갔더니 중국어가 많이 들려서 의아해했습니다! 중국인들이 한국 영화를 볼 수 있나? 아님 화장실을 이용하려는 건가? 했습니다. 영화관에서 뮤지컬이나 퍼포먼스 공연을 하는 것이 낯선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런 공연을 하는 것을 보면 서울극장이 어렵다는 방증이 아닐까 합니다.
실제로 멀티플렉스 체인점이 아닌 대한극장과 서울극장 같은 단독으로 운영하는 영화관들은 수익을 내지 못하거나 겨우 견디고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 극장은 다른 곳보다 영화관람료도 1천원 이상 저렴하고 다양성 영화를 많이 상영하기 때문에 없어져서는 절대로 안되는 영화관들입니다.
로비는 큰 테이블 2개와 S가 새겨진 천장이 보입니다. 예전에는 여기에 의자가 있었는데 그걸 싹 치웠네요. 의자는 구석진 자리에 옮겨 놓았더군요. 대기할 때 앉아 있을 자리가 많지 않긴 하지만 주변에 갈 곳이 많고 스타벅스 등이 있어서 크게 불편하지는 않습니다.
로비 벽면에는 작은 영화 박물관이 있네요. 대형 영사기와 카메라 그리고 편집기까지 전시하고 있는데 필름 시대의 향수를 느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인터스텔라'같은 경우 필름 상영을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상영관이라서 필름으로 인터스텔라를 보려는 관객들이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아시겠지만 아무리 디지털로 영화가 촬영 상영되지만 필름만의 은은한 빛과 색감을 디지털이 완벽하게 재현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매표소도 로비 안쪽으로 들어왔습니다.
요즘은 매표소에서 표를 끊기보다는 PC나 스마트폰으로 예매를 하고 표를 찾는 분들이 대부분이라서 매표소에서 긴 줄을 서는 풍경은사라졌습니다. 그럼에도 서울극장은 노인 관람객도 많아서 직접 매표를 하는 분들도 꽤 있다고 하네요.
서울극장을 응원하는 이유는 다양성 영화 때문입니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는 저예산 영화인데 이런 영화들은 영화관이 강력한 지원이 없으면 상영관을 확보하기 쉽지가 않습니다. 대한극장과 서울극장은 이런 작은 영화에도 상영관을 쉽게 열어주고 이렇게 무대인사까지 제공합니다.
서울극장은 독립영화 전용관은 '인디스페이스'와 시네마데크 전용관인 '서울아트시네마'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자본에 밀려서 상영관을 찾기 어려운 작은 영화와 독립영화들을 상영하는 상영관을 제공해서 시네필들의 영화에 대한 갈증을 채워주고 있습니다.
인디스페이스 전용관은 작은 쉼터도 마련해 놓고 있습니다.
영화 보기 전에 잠시 쉬면서 다양한 영화에 대한 갈증을 풀 수 있는 공간이네요. 이런 공간도 현 서울극장 사장인 '고은아' 대표님의 의지가 있었기 때문일 듯하네요
바뀐 것은 또 있습니다. 영화표가 영수증같이 변해버렸네요. 이런 변화는 참 안 좋은 변화에요. 영화를 마치 편의점에서 컵라면 사 먹는 느낌이랄까요. 저 같이 영화표를 모으는 사람들은 모으는 재미가 사라졌어요.
상영 10분 전 계단이 열렸습니다.
20년 전 내 집처럼 들락거렸던 서울극장은 추억 속 그대로였습니다. 특히 이 금속으로 된 봉은 그때의 기억을 되살아나게 하는 마중물 같은 역할을 하네요
요즘은 입구에서 관람객이다 빠져나간 후에 영화관으로 올라갈 수 있지만 예전엔 문 밖에서 기다렸습니다. 영화를 보고 씩씩거리면서 화를 내는 관람객을 보면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었습니다. 예전엔 참 넓어 보이던 곳인데 지금 보니 상당히 좁은 공간이네요.
서울극장은 예전 영화관처럼 상층과 하층이 있는 영화관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전 상층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상층에서 내려다보는 재미가 쏠쏠하죠. 그런데 한 번은 상층 가장 앞자리를 예매를 했습니다.
상층에는 떨어지지 않게 난간이 있는데 이 높이가 상당히 높습니다. 저는 스크린이 잘 보였지만 같이 영화를 보던 여자 후배는 키가 작아서 화면 반만 봤다고 하네요. 지금처럼 빈자리가 있어서 옮길 수 있던 시절도 아니었습니다. 주말에는 재미있는 영화는 거의 다 매진이었으니까요.
계단을 보니 추억이 새록새록 하네요.
하층에서 영화를 관람했습니다. 하층 입구는 약간의 굴곡이 있습니다.
꽤 오래된 영화관이라서 계단식 극장이 아닙니다. 앞 좌석과의 높낮이가 크게 높지 않습니다.
스크린은 여느 상영관 못지않게 크네요. 무대도 있는데 배우들의 무대인사하기도 좋네요
앉아보니 역시나 앞 좌석에 사람이 앉으면 화면을 가릴 수 있겠네요. 지금은 이런 곳 거의 없죠. 최신식 시설은 아니지만 90년대는 최신식이었습니다. 좌석 높낮이에 대한 불편함이 있지만 영화 보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오히려 전, 작은 영화, 독립 영화, 자본이 꺼려하는 정치적 색채의 영화를 높은 관용으로 품어주는 서울극장이 너무 좋네요.
주 거래 영화관은 아니지만 앞으로는 대한극장과 함께 자주 애용해야겠습니다. 이런 서울극장이 아직 종로3가에서 버텨주는 것이 감사하네요.
제가 서울극장에서 가장 재미있게 본 영화는 1995년 개봉한 <당신이 잠든 사이에>입니다. 당시 빅스타였던 '산드라 블럭'과 '빌 풀먼'이 출연한 아주 잘 만든 '로맨틱 코미디'영화였습니다.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로맨스. 상층에서 봐서 더 기분 좋게 봤던 것 같기도 하네요. 지금은 20년 전 영화 관람료는 5,000원이었네요. 세월 참 빨리 흘러갑니다.
영화라면 버튼 한 번으로 알약 한 번으로 마법 한 번으로 95년으로 돌아갈 수 있지만 현실은 그걸 허용하지 않습니다. 돌아갈 수 없기에 더 아련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것일 수도 있겠네요. 서울시는 이 서울극장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했습니다. 자본 논리에 의해 사라져가는 유무형의 것들을 지키는데 서울미래유산 지정이 큰 힘이 되었으면 합니다. 저 또한, 이 공간을 지지하는 데 조그마한 힘이 되로록 하겠습니다.
서울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를 다 보고 나왔지만 내 머리에서는 추억이라는 영화가 계속 상영되네요. 이 추억이라는 영화는 평생 계속 상영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