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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영화창고

영화 곡성은 거대한 믿음에 대한 이야기(스포있음)

by 썬도그 2016.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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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곡성은 영화에 대한 다양한 시선과 이야기와 평이 존재합니다. 이미 어제 영화 곡성에 대한 리뷰를 썼지만 오랜만에 리뷰를 또 한 번 써봅니다. 이번 리뷰는 스포가 있기 때문에 영화를 다 보신 분들만 읽어보세요. 


영화 곡성은 믿음에 대한 이야기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는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누가복음 24장 37절 ~ 39절>

영화는 이 성경 문구를 인용하면서 시작합니다. 이 문구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내용입니다. 나홍진 감독은 이전 작품인 <추격자>에서 영화의 범인을 초반에 보여주는 담대함을 보여줍니다. 영화 <곡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반에 던져 준 힌트 가득한 문장에서 영화의 결말을 이미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관객들(저를 포함) 그 문장이 뭘 의미하는지를 잘 모릅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아! 그 첫 문장이 이런 의미였구나를 알게 되죠.

이 첫 문장은 영화 <곡성>에 대한 주제와 메시지가 다 담겨 있습니다. 영화 곡성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믿음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골이라는 폐쇄적 커뮤니티가 가져다 준 믿음의 오류

우리는 어떤 말, 그것도 충격적인 말을 들으면 처음에는 반신반의합니다. 그 말을 한 사람이 신뢰도가 높으면 믿음이 더 가지만 평소에 숱하게 거짓말을 한 사람의 말은 개뻥이라고 가볍게 무시합니다. 그러나 낯선 사람이 이상한 이야기를 하면 우리는 그걸 믿어야 할까요? 믿지 말아야 할까요?

영화 <곡성>이 이해하기 힘든 이유는 바로 믿음이 가지 않는 일들과 이야기가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영화 초반에 동네 마을 사람들이 전하는 카더라 통신이 난무합니다. 누구네 집 아이가 그랬다잖아. 누구네 집에서 살인이 일어났데 식으로 전해 듣는 이야기가 난무합니다. 이는 시골이라는 폐쇄적 커뮤니티의 전형성을 극명하게 잘 담고 있습니다.

같은 소문도 도시와 시골의 전파 속도는 다릅니다. 도시는 같은 동네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나도 뉴스를 통해서 들으면 들었지 옆집 아주머니가 우리집에 놀러와서 전하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즉 도시에서는 소문이 전파하기에는 칸막이들이 꽤 많습니다.

반면, 시골에서는 친척 지간에 한 다리 두 다리  건너면 거의 다 아는 사람들에 동창에 형 동생하는 지연이 강력한 결계를 이루기 때문에 대부분의 이야기를 소문으로 듣습니다. 소문이 좋은 점도 있지만 안 좋은 소문은 한 가정을 한 사람을 편견과 매도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시골이라는 곳이 정이 많은 곳이긴 하지만 반대로 아는 사람에게는 강력한 정을 주지만 외지인들에게는 동네 사람과 다른 시선을 보입니다. 영화 <곡성>에서 일본인에 대한 동네 사람들의 시선을 보면 안으로 끌어 들이려고 하지 않고 카더라 통신의 배척의 대상 또는 관찰의 대상으로만 생각합니다.  같은 마을 사람으로 보려고 하지 않는 모습이죠. 

여기에 천우희가 연기하는 무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보는 여자이지만 경찰에게 돌맹이를 던지는 모습에 초면에 나와 다른 사람이라면서 미친년이라고 생각해 버립니다. 이런 폐쇄적인 커뮤니티는 직접적인 검증보다는 간접 화법으로 세상을 묘사합니다. 이 간접 화법 속에서 편견과 오해가 무럭 무럭 자라납니다. 

같은 말이라도 전해 전해 들으면 왜곡되듯이 영화는 실체를 왜곡 시키는 카더라 통신이 관객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사건의 본질을 방해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무엇보다 동네 소문을 그렇게 무서워합니다.  



근거 없이 입소문만 듣고 수사를 하다

경찰 종구는 이런 카더라 통신만 믿고 연쇄 살인극의 범인이 일본인이라고 어느 정도 결론을 내립니다. 원래 이 경찰이라는 직업은 그렇게 감정만 가지고 수사를 하면 안됩니다. 과학 수사 시대 아닙니까? 과학이라는 논리정연하고 명명백백함을 백그라운드로 삼아서 수사를 해야 하는데 사람들이 입소문만 가지고 일본인이 뭔가가 있다고 단정 지어버립니다. 

물론, 탐문 수사 형태로 진행되었고 마을 사람들의 입소문이 그렇게 틀린 것은 아니긴 하지만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용의자라고 해도 너 범인이지하면 안됩니다. 그러나 종구는 수사를 할 마음 보다는 이미 여론 재판이 나 있는 일본인 이 나쁜 놈을 잡아서 족치려는 생각을 가지고 산속에 사는 일본인을 찾아갑니다. 

보통 그렇게 찾아가면 일본인이 집에 없으면 기다렸다가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이러저러해서 수사 협조를 부탁한다면서 취조를 하던 질문을 하던 해야 하는데 다짜고짜 빈집을 허락도 없이 수사를 합니다. 이는 마을 사람의 입소문과 자신의 잘못된 신념이 발화되어서 법을 어기는 행동을 합니다. 만약 일본인이 무고한 사람이었다면 종구는 아주 큰 잘못을 한 것입니다. 잘못된 믿음이 애먼 사람을 잡을 수 있겠다른 생각이 들게 하네요. 



의심이 사라진 세상에 피어나는 현혹이라는 꽃

여기서부터 강력한 스포가 시작됩니다. 지금이라도 영화 안 본 분이라면 뒤로 버튼 눌러주세요. 
저 솔직히 황정민이 나온다고 해서 안 보려고 했습니다. 영화관만 갔다하면 황정민이 나오니 이제는 질려 버리네요. 배우 황정민 자체가 싫다기 보다는 공해처럼 많이 나오는 황정민이라는 이미지가 싫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영화 <곡성>에서는 많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출연 분량은 작지만 그가 제대로 관객을 홀려버립니다. 

무당 일광은 종구의 아픈 딸을 치료하겠다면서 굿을 합니다. 굿을 하기 전에 이 무당의 얼마나 영험한 지를 사람들은 모릅니다. 이에 일광은 그런 의심을 단박에 잠재우는 일을 행하죠. 저기 있는 장독을 가져오라고 하더니 그걸 깹니다. 놀랍게도 그 안에 죽은 까마귀가 들어 있었습니다.

종구와 일가족은 이 영험한 행동 하나 때문에 철석같이 믿어버립니다. 그러나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일광은 일본인이라는 악마의 하수인입니다. 즉, 일광과 일본인이 짜고 친 고스톱이라는 소리죠. 영화를 자세히 떠올려 보면 왜 일광이 느닷없이 사각팬티가 아닌 일본인들이 예전에 입었던 훈토시를 입었는지 왜 왼쪽 차선으로 운전을 했는지가 담겨 있습니다.  영화 곳곳에 한 통속이라는 장치를 심어 놓았지만 대부분의 관객이 이걸 놓칩니다. 

이걸 놓친 관객들은 일광의 영험함에 큰 기대를 합니다. 
그리고 일광과 일본인 주술사(악마)의 주술 배틀이 일어납니다. 이 부분은 좀 논란이 있죠. 대부분의 관객은 일광이 살을 날려서 일본인을 죽이려고 하는 것으로 압니다. 저도 그렇게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일본인이라는 악마의 하수인인 일광은 살을 날릴 이유가 없었습니다. 또한 일본인은 일광에 맞서는 것이 아닌 트럭에서 숨진 사람을 좀비로 만들기 위해서 주술을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일본인이 주술을 하다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교차로 보여주니 오해하기 딱 좋죠. 일본인이 괴로워한 이유는 천우희가 연기한 착한 무당 또는 지박령 때문입니다. 일본인이 거의 반 죽음 상태에 있을 때 천우희가 싹 지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주술 배틀이 아닌 천우희가 교주라고 할 수 있는 일본인에게 살을 날립니다. 영화는 이 부분을 명확하게 담지 않는 것이 참 아쉽긴 하네요. 

종구는 이런 것도 모르고 1천만원의 돈을 내고 영험한 무당의 굿을 지켜봅니다. 이미 검증은 끝났기 때문이죠. 
사기꾼들이 이런 수법을 잘 씁니다. 떼돈을 벌 수 있다는 말 사기꾼의 말에 사람들은 의심을 합니다. 이럴때 사기꾼이 매달 수백 만원 씩 입금되는 통장을 보여주면서 그 의심의 결계를 풉니다. 통장은 현혹의 도구입니다. 일광도 그렇게 의심이 풀린 종구네 집을 휘젓고 다니면서 종구네 가족을 가지고 놉니다. 

그러다 딸이 괴로워하는 모습에 종구는 그 믿음을 깨버리고 다 꺼지라고 욕지기를 합니다. 이에 일광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니놈이 그렇지 뭐!라고 생각하는 표정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종구만 현혹 당했을까요? 이 영화가 좋은 영화인 이유는 관객까지 속여 버립니다. 물론, 감독은 여기저기에 각성재 같은 것을 뿌려 놓아서 이 놈이 사기꾼이야라고 말하고 있지만 영화의 음습함 때문에 그런 것을 주의 깊게 보지 않습니다.

같은 사기도 사람이 어렵고 힘들 때 더 사기를 잘 당합니다. 몸도 그렇죠 평소에는 외부에 대한 저항력이 높지만 아프고 병들면 면역력이 떨어집니다. 



귀신이라면 육체가 없을 것이라는 잘못된 상상에 대한 믿음

저는 귀신을 본 적은 없습니다만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듭니다. 귀신의 존재 자체는 부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과학으로 설명되어지지 않는 일들이 꽤 일어나니까요. 있는지 없는지는 언젠가는 밝혀질 수 있겠지만 현재는 그냥 귀신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있는 것이고 없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즉, 믿고 싶은 사람에게만 보이는 것이 귀신입니다. 어디 그런 존재가 귀신 뿐이겠습니까? 종교도 비슷하죠. 그래서 종교도 믿고 싶은 사람들이 믿는 것이고 저 같이 종교를 믿고 싶지 않는 사람은 안 믿는 것입니다. 다만 종교를 믿지 않지만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 저 같은 불가지론자도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귀신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명명백백한 증거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 세계에서 영혼의 세계를 맏는 사람들이 많고 이들의 형태가 각 문화권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것도 사람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동서양의 문화는 다르지만 귀신의 공통점은 뼈와 살이 없다는 것입니다.

경찰 종구는 일본인이 귀신이라면 안 보여야 하는데 직접 눈으로 보이는 사람인 점에 귀신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인식의 오류가 생깁니다. 귀신이라면 안 보여야 하는데 눈에 보입니다. 이는 관객까지 현혹시킵니다. 지금까지 몸둥아리를 가진 귀신은 보지 못했습니다. 

뭐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간 것이라면 설명이 가능하지만 영화에서는 사람이라면 육체가 있을 것이고 귀신이면 없는 것이 당연한데 이런 논리에 어긋나는 일들이 자꾸 벌어지자 종구는 딸을 살리겠다는 신념에 불타서 직접 눈으로 봐야겠다면서 동내 친구들과 함께 트럭을 타고 일본인 집에 다시 찾아갑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는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누가복음 24장 37절 ~ 39절>


이 성경 문구를 되집어 봐야 합니다. 이 말은 예수가 죽은 후에 부활하자 제자들이 영혼이 돌아온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의심의 눈초리를 안 예수는 자신은 영혼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몸을 만져 보라고 합니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일본인이 악마라고 실체를 드러낸 후 천주교 신부가 되기 전인 구제에게 비슷한 행동을 합니다. 자신의 몸을 만져 보라고 하죠. 이는 성경의 내용을 역 이용한 것입니다. 사람의 인식 체계인 귀신은 몸이 없고 사람은 몸이 있다는 인식 체계를 비꼬고 조롱하면서 동시에 관객과 주인공을 현혹시킵니다. 

그럼 귀신이 몸이 있을 수 있냐고요? 모릅니다. 세상 이치 어찌 다 알겠습니까? 다 안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림이 바로 사기꾼입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는 알면 알수록 더 모르는 것이 그나마 우리가 아는 유일한 이치입니다. 영화 <곡성>은 성경과 무속 신앙을 절묘하게 섞어 놓았습니다. 그렇다고 성경과 무속 신앙을 대척점에 놓지 않고 같은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시선으로 잘 섞어 버립니다. 



영화 <곡성>은 종교를 비판하고 옹호하는 독특한 영화

영화 <곡성>은 좀 처럼 한 곳에 모으기 힘든 존재들을 모아 놓았습니다. 무속 신앙과 기독교라는 한국의 2개의 거대한 신앙을 한 공간에서 밀어 넣었습니다. 따라서 이 영화는 종교에 관한 영화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종교에 대해서 비판하고 옹호하는 양가적인 시선도 동시에 보여주는 것도 아주 독특합니다.

 제가 기독교 교리나 무속 신앙에 대해서 잘 하는 것은 아니지만 두 신앙의 공통점은 의심하지 않는 믿음을 요구합니다. 물론, 종교는 각자의 논리가 있긴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논리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종교를 믿는 것은 논리정연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문제는 논리정연해서 종교를 믿는 것이 아닌데  종교가 논리정연하다고 억지를 부릴 때 종교는 하나의 거대한 고집이 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논리적이고 설명이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종교는 그 설명이 불가능한 영역과 비논리지만 존재하는 것과 세상 전체를 아우르면서 인간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평온감을 전하는 것이 종교의 사회적 역할입니다. 그러나 잘못된 종교인들은 이 종교가 가지는 영험함을 이용해서 인간을 현혹하고 사기를 칩니다. 

영화 전체적으로는 종교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이 가득합니다. 무속 신앙도 종교로 인정한다면 그 비판은 더 날이 서 있습니다. 천주교 신부에게 찾아간 종구에게 과학의 산물인 서양 의학을 찾아보라고 합니다. 또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봉하는 신부가 눈으로 직접 봤냐면서 직접 본 것이 아니라면 믿지 말라는 소리를 하죠. 일광이라는 사기꾼의 사기를 통해서 무속 신앙에 대한 비판도 살짝합니다.  

우리 인간은 항상 믿기 전에 근거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거짓 근거를 제시해도 그걸 구별한 능력이 없으면 이후에는 잘못된 믿음이 광끼가 됩니다. 그렇게 몇 번 사기를 당하면 누굴 믿고 누굴 믿지 말아야 할 지 헛깔리고 고민이 됩니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면 온 가족이 몰살 당할 것이라는 무명(천우희 분)의 말에 종구는 갈등을 합니다. 이 부분이 영화에서 가장 긴장이 팽팽한 부분입니다. 

일광이라는 무당의 말을 믿어야 할지 소복 같은 옷을 입은 무명을 믿어야 할지 종구는 갈등을 합니다. 그러나 결국 종구는 소심한 성격 때문인지 의심을 하다가 자신의 믿음을 올곧게 끌고가지 못합니다. 만약 일광의 살을 날리는 굿에서 딸이 혼절해도 일광을 믿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천우희의 말을 끝까지 믿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뭐가 중한지도 모르면서 뭘 알려고 하냐"는 딸의 대사는 우리 인간의 무지를 조롱하는 대사 같기도 하네요. 

합리적 의심을 하지 않아서 일광이 쉽게 종구를 현혹했지만 굳은 믿음이 없어서 결국 비극적인 결말로 치닫습니다. 
어쩌면 맹목적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라는 말 같이 들리네요. 종교도 그렇지 않을까요? 맹목적으로 종교를 한 평생 믿고 사는 사람들이 항상 의심을 하면서 사는 비종교인보다 더 나은 선택이 아닐까라는 감독의 시선을 살짝 담습니다. 


믿고 안 믿고는 각자의 몫. 합리적인 의심과 맹목적 믿음이 대폭발하는 영화

종교를 믿으려면 어느 정도 맹목성도 있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으려면 어느 정도 맹목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이 맹목성을 비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맹목성을 바탕으로 한 믿음이 세상을 올곧게 만든다면 아주 건강한 맹목성입니다.  다만, 내가 믿으니까 너도 꼭 믿으라면서 안 믿으면 지옥에 간다고 하는 것은 좋은 맹목이 아닙니다. 

영화 <곡성>은 합리적인 의심과 맹목적 믿음을 놓고 어느 것이 옳고 그른 것이 아닌 모두 장점과 단점이 있다고 말합니다. 영화 <콘텍트>처럼 과학과 종교의 거룩한 합일을 이루고 있는 영화는 아닙니다만 의심 없는 곳에서 피어난 현혹이라는 꽃을 꺾으려면 맹목적 믿음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해주네요. 

좀 이율배반적인 결말이기도 합니다만 영화 전체를 헝크러트릴 정도는 아닙니다. 내가 뭐로 보이냐고 물어보는 악마. 악마로 보인다고 하니 악마로 변하는 모습이 우리가 세상을 보는 시선이 아닐까 하네요. 보고 싶은대로 보고 믿고 싶은대로 믿고 사는 것이 세상이니까요.

어떻게 믿고 싶으신가요? 그 믿고 싶은대로 세상은 변합니다. 다만 그 가변의 폭이 넓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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