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사박물관은 이름 그대로 서울이라는 공간에서 일어났던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지난 글 서울의 옛모습을 볼 수 있는 서울역사박물관(경성 시대)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경성을 지나 해방 후 서울은 기쁨의 순간도 잠시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전국토가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남한 보다는 북한이 더 쑥대밭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미 공군이 북한 전역을 꼼꼼하게 폭파 시켰습니다. 3년 내내 제공권을 확보한 미 공군은 수 많은 폭탄을 북한 곳곳에 떨구웠고 그 때문에 북한군과 주민들은 동굴에서 생활을 하는 등 공습을 대비 했습니다.
아마도 북한 사람들이 미군을 싫어하는 이유는 적대국가이기도 하지만 이 공중 폭격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듭니다.
그 한국 전쟁 이야기는 용산 전쟁박물관에서 꼼꼼하게 볼 수 있습니다.
한국전쟁의 역사는 지나고 1960년대 부터 소개합니다. 1960년대는 박정희라는 개발 지상주의자가 대통령을 하던 시절입니다.
1963년부터 80년까지 장기 집권을 한 대통령이죠. 민주 세력에게는 독재자로 불리지만 지금의 중년과 노년층에게는 신격화 된 존재입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비판을 하지만 50대 이상 분들에게 있어 박정희라는 존재에 대한 다면적인 분석과 시선이 있어야 합니다.
분명, 박정희가 경제 개발을 잘 했고 그 경제 고도 성장기에 대한 향수가 지난 대선에 큰 영향을 주었으니까요.
무조건 비판하기 보다는 그들의 입장 그들의 삶을 통해서 바라보는 시선도 있고 그 시선에서 이해가 나오고 이해를 통한 설득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뭐. 연구에 따르면 개발 단계에서는 민주주의 보다는 독재가 더 효율적이라는 소리도 있습니다. 다만 독재만 하고 가난만 계속 이어가는 북한 같은 경우는 문제가 많죠.
1958년 서울과 1972년 서울은 확 다릅니다. 1958년은 종로구 중구, 용산구 마포구, 서대문구와 성북구와 영등포구 정도만 서울이고 지금의 강남은 경기도였습니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이 1968년 무렵에 서울을 확장 시킵니다.
구로구, 금천구, 관악구, 강남 3구를 서울에 편입시킵니다. 강서구까지 합치면 남쪽으로 거대한 확장을 시킵니다
그리고 이 확장이 지금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당시 1970년대는 저 새로 편입된 지역 대부분이 논과 밭이었습니다. 특히 강남은 평지가 발달해서 큰 논이나 밭이 많았습니다. 비판의 목소리에도 강남을 서울로 편입하게 합니다. 아마도 지방 사람들을 서울로 끌어 올리게 하는 목적도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한강도 많이 변했습니다 1960년대 한강은 저렇게 자연이 만든 하천이었는데 하도 홍수가 자주나고 해서 치수 사업을 통해 지금의 한강이 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지금의 잠실입니다. 롯데월드가 있는 석촌호수는 예전엔 잠실도라는 모래 섬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흙을 부워서 강남으로 붙여 버립니다.
그 흔적이 석촌호수입니다. 그래서 요즘 롯데월드타워에 대한 걱정이 여기서 나옵니다. 모래섬이었던 곳에 최고층 건물을 짓는 것이 걱정스럽긴 하죠. 뭐 알아서들 판단하겠지만 분명 다른 곳보다 위험스럽기는 합니다.
여의도와 밤섬은 붙어 있었는데 여기가 병목 구간인지 확 강을 넓힙니다. 그러고보면 한강은 강폭이 엄청나게 큰 강입니다. 유럽의 강에 비하면 어마무시하게 크죠. 원래부터 큰 강은 아니고 우리가 치수 사업을 통해 강을 넓혔네요. 그래서 그런지 예전에는 한강 홍수 걱정을 매년 했는데 요즘은 거의 하지 않습니다.
난지도도 모래섬인데 여기에 서울 시민의 쓰레기를 쌓다가 지금은 하늘 공원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한강 개발을 하면서 한강 둔치가 등장하게 되고 한강변에 아파트와 주택이 생깁니다. 특히 아파트는 많은 사람들이 한강을 내려다 본다는 장점 때문에 많이 세워졌는데 지금은 오히려 이 아파트 때문에 한강변의 경관을 헤치는 1등 주범이 됩니다.
강남을 영동이라고 할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 영동이라고 하면 강원도 태백산맥 안쪽과 바깥쪽을 구분하는 단어로 쓰이지만 예전에 영동하면 영등포의 동쪽 즉 지금의 강남을 말했습니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면서 강남 개발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집니다. 평지라는 잇점이 큰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영동 개발이 시작 되면서 반포 아파트나 수 많은 아파트가 강남에 죽순처럼 쭉쭉 올라갑니다. 그리고 강남 졸부들이 신 계급으로 등장합니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 공사를 담은 지도입니다. 보시면 지금의 서초구 강남구 한강변에 세워진 아파트 들이 보입니다. 반포 아파트가 대표적인 강남 아파트죠
이 지도는 익숙하고 친숙합니다. 제 방에 있던 서울 지도이고 매일 같이 들여다 보면서 서울이 이렇게 넓구나를 알 수 있었죠. 지금은 이 동네 거의 대부분을 다녀봤지만 어린 나이때는 학교 집 종로 정도만 가봤습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은 경제 개발의 정점이자 기폭제가 됩니다. 70,80년대의 고도 성장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죠.
아이다스 회장을 로비해서 따낸 올림픽이지만 결과는 좋았습니다.
호돌이라는 마스코트는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80년대는 숫자를 누르는 것이 아닌 손가락으로 전화번호에 걸고 쭉 돌리는 다이얼 식 전화기였습니다. 지금은 믿기지 않지만 예전에는 전화 신청하고 몇개월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전화 보급이 바로 바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전화선을 연결해서 다른 집과 함께 쓰기도 했죠.
DDD라는 전화로 시외 전화를 했던 것도 기억 나네요. 지방에 전화를 할 때 보통인가? DDD인가 있는데 교환수를 통해서 전화를 하는 방식이 좀 더 저렴했고 DDD는 비쌌습니다.
DDD라는 노래까지 나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놀라운 풍경이지만 80년대는 막 가정용 전화기가 보급 되던 시절이었습니다.
전화 한통을 하기 위해서 다방에서 돈을 내고 전화를 하고 공중전화 박스에서 20원을 넣고 3분 통화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7,80년대의 한국은 지금의 중국 역할을 했고 한국의 싼 노동 임금으로 싸구려 저가 제품을 미국 등에 수출을 해서 큰 수익을 냅니다. 그래서 메이드 인 코리아 하면 지금의 메이드 인 중국 만큼 싸구려 브랜드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래서 미국에 수출한 포니는 대학생들이 여름에 놀러가서 거기에 버리고 오는 차라고 할 정도로 싸고 가격이 쌌습니다.
지금이야 메이드 인 코리아하면 물건 좋은 것으로 인정 받고 있죠. 제조 강국이 된 한국은 저가 제품은 중국에 넘기고 중고가 제품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이 빠르게 성능도 좋고 기술도 좋고 가격도 싼 제품을 선보이면서 메이드 인 코리아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80년대는 지하철의 시대이기도 합니다. 80년대에 지하철 2호선과 3,4호선이 연속 개통 하면서 서울 저녁을 지하철로 갈 수 있게 됩니다. 이 지하철 개통이 서울에 큰 활력이 됩니다.
지금의 강남은 국가 주도로 이루어진 계획 개발이고 그 혜택을 현재의 강남인들이 다 받고 있습니다. 지금도 강남은 서울의 신도심으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서울의 옛 모습을 보려면 종로구와 중구로 현대의 모습을 보려면 강남으로 가라고 하잖아요.
그러나 강남은 도로도 넓고 반듯반듯해서 좋긴 한데 엄청나게 막힙니다. 그래서 강남에 갈 일 있으면 짜증부터 납니다. 강남역은 하루 종일 북적이는데 요즘은 토 나올 정도입니다.
한쪽에 설치된 빔프로젝터를 이용한 디스플레이가 아주 신기하네요 아이들이 아주 좋아합니다. 3D 맵핑을 이용한 기술인데 이 기술이 새로운 디스플레이 방식을 만들 듯 합니다.
80년대 물건들을 전시 했는데 80년대 286 컴퓨터네요.
한쪽 구석에는 80년대 뒤안 길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80년대 고도 성장기는 그냥 성장 한 것이 아닙니다. 구로공단에서 언니 누나 형 오빠들이 타이밍이라는 잠 깨는 약을 먹으면서 옷과 가전제품 등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구로디지털밸리, 가산디지털밸리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미국에 납품하는 애니를 제작하는 애니 제작사도 많고 밤샘 근무 하는 근로자들이 많습니다.
물론, 예전보다는 환경이 좋아졌죠. 위 이미지는 쪽방촌을 담은 풍경이네요. 영화 구로아리랑(89년 작)에 쪽방촌에 대한 묘사가 잘 되어 있고 신경숙의 소설 '외딴방'에 잘 담겨 있습니다.
지금은 아이들이 타이밍 대신에 붕붕쥬스 먹고 공부하고 있는데 한국은 불면증의 나라인지 잠 안자고 공부하고 일하고 정말 지겹게 일하고 공부하는 나라입니다. 놀 줄 아는 사람이잘 놀듯 한국인들은 정말 쉴 줄도 놀 줄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요즘은 캠핑족도 늘고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그나마 좀 숨통이 트입니다.
신기한 전시가 하나 있는데 피맛골의 한 음식점을 그대로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피맛골은 종로대로의 뒷길로 임금이나 고관대작이 종로로 행차를 하면 평민들은 고개를 숙여야 했는데 이게 불편해서 아예 뒷길로 다녔습니다. 그 뒷길이 피맛골입니다. 피맛골은 현재 빌딩 올려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 피맛골 음식점을 전시하고 있는데 좀 웃기더군요
아니! 빌딩 안 올리면 되지 그걸 올리고 이렇게 보관하고 전시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개발로 사라진 곳을 보여준다는 취지는 알겠지만 아직도 이런 음식점들이 꽤 많습니다. 그럼 그런 허름한 음식점들은 박물관이라는 소리인지 이런 방식의 전시는 좀 그렇네요.
이런 것은 좋습니다. 80년대 가정집을 그대로 박제하고 전시하는 것은 좋습니다. 이건 과거니까요. 과거를 재현하는 방식은 좋지만 현재를 재현해서 전시하는 것은 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80년대 아파트를 전시하는 공간은 꽤 좋네요. 아파트 단면도를 보여주는데 80년대부터 한국은 본격적인 아파트 공화국이 됩니다.
가방, 컬러학습대백과는 80년대 학생의 필수 아이템이었죠.
80년대 표준 학생 방이네요. 저 책상 저도 있었어요. 샤파 연필깎기. 추억이 새록새록이네요
거실이 있던 집에 살지 않아서 거실 문화는 잘 모르겠네요. 아파트는 거실이 있었죠. 전 주택에 살았거든요
어머니가 샤베트 해준다고 저거 사서 팥앙금을 얼려서 줬는데 맛이 정말 없었습니다. 그냥 돈 달라고 해서 가게에서 50원짜리 팥앙금 얼린 깐돌이 먹었습니다.
서울우유 먹으면 주는 저 컵도 생각나네요. 저 컵에 먹어야 우유맛이 더 좋다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죠
서초구 한 아파트를 그대로 재현했는데 서울시민들의 도움으로 이렇게 고퀄리티 재현을 할 수 있어습니다.
지금은 양문형 냉장고가 전기도 적게 먹고 용량도 커서 양문형을 많이 사용합니다. 80년대는 저런 형태만 나왔습니다. 가전제품은 역시 금성이죠. 지금의 LG전자가 럭키화학과 금성전자가 합쳐지면서 LG로 바뀌었고 금성의 DNA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지금도 백색가전은 금성이 가장 좋습니다. 80년대를 건너와서 그런지 좀 흥분하면서 글을 쓴 듯 하네요. 혹 아이들과 아버지 어렸을 때 보여주고 싶으면 서울역사박물관 2층 상설 전시장에 가보세요. 80년대 풍경을 잘 꾸며 놓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