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소리는 귀에 딱정이가 생길 정도로 많이 들었습니다. 한류가 있기 전 우리 것에 대한 자부심이 거의 없던 시절 한국이라는 나라의 특장점을 전세계에 소개하거나 우리 스스로 나라에 대한 자부심을 갖기 위해서 정부는 한국은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소리와 사계절이 뚜렷해서 아름다운 나라라는 소리를 했습니다
지금이야 공산품 잘 만드는 나라, 아이돌 가수 수출하는 나라로 더 많이 알려지고 딱히 한국을 해외에 소개하지 않아도 유튜브나 인터넷과 스마트폰 등으로 한국이 전세계에게 잘 알려지면서 이런 억지스러운 한국을 미화 시키는 수식어는 사라졌습니다. 특히, 사계절이 뚜렷해서 아름다운 나라라는 드립은 지금 들어도 실소를 하게 됩니다. 전 어려서 한국만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인 줄 알았습니다. 지금은 사계절이 뚜렷해서 여름엔 더워서 고생, 겨울은 추워서 고생하고 있습니다. 차라리 항상 일정 기온을 유지하는 지중해 성 기후에서 사는 게 더 좋죠
한국은 동방예의지국이었습니다. 이는 유교의 여러 가치 중 효에 몰빵한 듯한 조선이라는 유교 국가의 국가 시조가 현대까지 흘러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공자 스스로는 효에 대해서 그렇게 깊게 말하지도 큰 가치를 두지 않았지만 조선이라는 나라는 효라는 가치를 엄청나게 숭상함을 넘어 효 때문에 당파 싸움을 하기도 했습니다. 조상을 모시는 예법 때문에 '예송논쟁'을 하던 나라가 조선이었습니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효에 대한 정성을 넘어 극성을 부리는 모습은 좀 심했습니다. 부모가 죽었다고 슬퍼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무려 3년 동안 부모님 무덤 곁에 있는 행동은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서양 선교사들은 조선은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잡아 먹는 나라라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의 도를 지나친 효에 대한 사랑은 일제강점기를 지나 대한민국이 되면서 조금씩 탈색이 됩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유교 국가의 후손들이라는 생각이 안 들정도로 유교의 색채가 거의 다 사라졌습니다. 길거리에서 짧은 치마 입고 핫팬츠 입고 다닌다고 지팡이로 종아리를 때리는 할아버지는 사라졌습니다. 지금 그랬다가는 폭행죄로 고소 당할 수 있습니다.
어른에 대한 공경심이 사라지고 있는 한국
1. 예절 교육의 부재
어른에 대한 공경심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심해질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가장 먼저 어른에 대한 공경심은 우리가 스스로 나와서 하는 것보다는 학교 교육이나 밥상머리 예절교육을 통해서 배웁니다. 즉 가정과 학교에서 길거리에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힘든 물건 들고 있으면 도와줘야 한다고 배우죠. 왜 그렇게 해야 하는 지에 대한 설명도 듣지만 많은 교육을 통해 즉각적으로 반응 할 수 있게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가정 교육은 거의 다 사라지고 학교 교육도 인간을 만드는 교육이 아닌 대입 입시 학원 교육에만 집중하니 어르신들을 공경해야 한다는 교육은 등한시 되고 있습니다.
2. 공경할 만한 어른이 줄어들고 있다.
한국에 어른 같은 어른이 줄어들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행동할 수 있는 행동을 하는 어른들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편법과 위법 탈법을 자행하는 어른들이 참 많습니다. 하다 못해 애들 보는 앞에서 무단 횡단을 하고 공중도덕을 가볍게 무시하는 어른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개저씨, 개줌마라고 하죠.
저도 어른이지만 제 나이 또래의 어른이나 저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의 공중도덕을 어기고 이목에 신경쓰지 않는 안하무인의 행동을 요즘 더 자주 보게 됩니다. 알바생 최저임금도 등쳐먹고 10,20대의 돈을 갈취하는 악덕 업주들도 많습니다. 어른이 다음 세대에 대한 배려 보다는 자기 밥그릇만 챙기는 모습을 수시로 봅니다.
65세 이상 지하철, 버스를 공짜로 타는 것은 당연하고 어린 아이들 무상급식은 빨갱이 정책이라고 손가락질 합니다.
솔직히 창피합니다. 자기들의 권력이나 혜택은 한 줌도 놓지 않으려고 하면서 다음 세대로 향하는 복지에는 세금 퍼주다 나라 망한다고 소리를 칩니다. 이런 어른들을 보고 젊은 사람들이 공경심을 가질까요?
지난 대선도 세대간의 전쟁이라고 할 정도로 30대 이하 젊은 세대와 50대 이상의 노년 세대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거는 노년 세대의 승리로 끝나고 노년 세대는 많은 전리품을 챙기고 있습니다. 비록 기초연금을 모든 노인에게 준다고 했다가 뒤로 한발 물러섰고 이에 대한 사과를 했지만 20대 대학생들의 반값 등록금은 한 번의 사과도 없이 2년 후로 미루어버렸습니다.
이런 나라에서 젊은 세대들이 어르신들을 공경할 수 있겠습니까?
경로 우대석이 경로 지정석이 되면서 사라진 세대 간의 칸막이
<1982년 2월 동아일보>
1982년 지하철에 이어서 버스도 경로 우대증이 있는 분들은 공짜로 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다시 지하철만 65세 이상 노인들만 공짜로 타고 버스는 돈을 내고 탑니다.
이 80,90년대에는 지금처럼 지하철 끝 부분의 3칸짜리 좌석을 경로우대석으로 지정했습니다. 경로우대석이긴 하지만 강제성은 크지 않아서 자리가 비면 아무나 앉았습니다. 제 기억속의 8,90년대 지하철 기억 중에 제가 경로 우대석에 앉아서 졸던 모습도 생각나고 어르신이 타서 내 앞에 서면 자리를 비켜주던 기억도 납니다. 중요한 것은 그때는 경로 우대석이라는 푯말이 있을 뿐 강제는 아니였습니다. 따라서 경로 우대석에 앉아서 가는 젊은이들도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당시는 노인 분들이 쉽게 자리에 앉아서 갈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젊은 사람들이 벌떡 벌떡 일어나서 할머니 여기 앉으세요! 할아버지 여기 앉으세요!라는 흐뭇한 노인 공경의 풍경이 많았습니다. 자리 양보를 받는 어르신들은 고마워요! 젊은이~~라고 감사의 표시를 항상 했습니다. 아주 훈훈한 풍경이고 이런 모습을 외국인들이 보고 한국에서는 노인에 대한 배려가 뛰어난 나라라고 소개를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이 경로 우대석이 경로 지정석이 되어버립니다. 경로 지정석에 빈 자리가 생겨도 젊은 사람들이 앉지를 않습니다. 앉았다가는 성질 고약한 노인에게 한 소리 들어야 합니다.
경로 우대석은 강제성이 없었습니다. 노인 분들에게 자리를 양보를 부탁하는 부탁의 자리였다면
경로 지정석은 강제성이 아주 강해집니다. 노인 분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아닌 여긴 노인의 자리니까 자리가 비어도 앉지 말아야 한다고 강압적인 언어로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빈 노약자석에 젊은 사람이 앉아 있으면 쌍소리 듣기 쉬운 요즘입니다.
그래서 저도 노약자 석은 빈자리가 있어도 쳐다 보지도 않고 그 앞에 서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자리가 비어도 앉지 못하니 차라리 7명이 앉을 수 있는 곳에 서서 빈자리가 나길 기다리는 것이 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은 노인 분들에게는 좋아진 모습이라고 할 수 있지만 크게 보면 오히려 노인 분들에게 안 좋은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노인과 젊은 세대의 거대한 장벽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노인이 자리 앞에 서면 알아서들 벌떡 벌떡 일어서서 자리 양보를 했고 자리 양보를 하지 않아도 주변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습니다. 그 눈총을 피하기 위해 자는 척 하는 사람이 있긴 했어도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달라졌습니다. 노인 인구가 늘다 보니 경로지정석에 앉지 못한 노인분들이 일반석 앞에 서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젊은 사람들이 자리 양보를 거의 하지 않습니다.
이걸 수치화 할 수 없지만 이런 제 생각을 주변에 공유해보니 확실히 예전보다 자리 양보하는 풍경이 사라졌다고 다들 동의하네요. 유심히 지하철 풍경을 지켜보면 확실히 예전에 비해서 자리 양보하는 젊은 사람들이 줄었습니다. 그래서 일반석 앞에 서 있는 노인 분들이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노인 인구가 많아졌다고 해도 예전에는 서서 가는 노인 분들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서서 가는 노인 분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경로 우대석이라라는 자발적인 예가 아닌 경로 지정석이라는 강제적인 예의 실현 때문이기도 합니다.
귄위라는 성에서 살던 기성세대들이 나이가 들면서 예전과 같은 공경심을 받지 못하고 권위라는 성도 허물어지자 경로 우대석을 경로 지정석으로 양보가 아닌 권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무너져 가는 권위에 대한 강한 보상 심리가 경로 우대석을 경로 지정석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보상 심리가 오히려 젊은 사람들과의 어우러짐 대신에 단절을 만들었고 그 결과로 자리 양보가 줄어든 일반석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임부 산부도 못 앉게 하는 경로 지정석, 그런 꽁함이 노인에 대한 공경심을 더 사라지게 한다
얼마전 배철수의 음악캠프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한 임부가 노약자 석에 앉아 있는데 할아버지들이 젊은 여자가 여기 앉았다고 소리 소리를 질렀다는 사연에 화가 났습니다. 가뜩이나 출산율 낮아서 나라 망한다는 소리가 있는데 임부에 대한 예우가 아주 형편이 없습니다. 그 여자분은 임신한 임부라고 말을 했지만 배가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 소리를 했다고 하네요
여자들 배가 나오는 시기는 꽤 지나야 합니다. 배가 안 나왔다고 임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런 꼰대리즘에 분노하는 젊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자 분이 임부라고 말하면 그걸 믿어야지 배가 안 나왔다면서 못 믿겠다는 소리는 추악스럽기만 합니다.
이런 노인들이 전부는 아닐 것이지만 그렇다고 일부라고 하기도 힘듭니다. 이런 생각으로 세상을 대하면 대할수록 그 대가는 반대로 노인 분들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경로우대석이던 시절이 좋았습니다. 자발적 예가 충만하던 그 시절이 그립네요. 예의 강제화? 그 결과물은 오히려 노인 분들에게 부메랑이 돌아 갈 것입니다. 무조건 노인은 공경해야 한다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공경할만한 어른만 공경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과연, 우리 어른 중에 공경 받는 어른이 얼마나 될까요? 나는 얼마나 공경 받는 행동을 할까요? 한 번 돌아 봤으면 합니다.
나이 어리다고 일방적으로 너는 애미 애비도 없냐고 말하는 어른들. 그 말을 하기 전에 그 청년의 아버지 어머니처럼 행동은 하셨는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