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의 독재자'의 포스터 속에는 김일성 복장을 한 설경구의 모습 위에 '우리 집에 짝퉁 수령동지'가 산다라는 문구가 떠 있습니다. 이 문구와 포스터만 보면 딱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김일성?? 한 때는 해리포터의 볼드모트처럼 이름도 얼굴도 함부로 불러서도 볼 수도 없었던 김일성. 이제는 김정일 김정은까지 안방TV에서 인기 연예인보다 더 쉽고 많이 볼 수 있는 존재가 되었지만 김일성은 이름은 알아도 얼굴은 모를 정도로 쉽게 알 수 있는 존재가 아니였습니다.
이는 우리가 김일성을 볼드모트처럼 공포의 대상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김일성을 소재로 한 영화? 그게 반공 영화이든 정부 또는 사회 비판 영화이던 큰 흥미를 끌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개봉 날은 보지 않았다가 약간의 시간이 남아서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 고른 영화가 '나의 독재자'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 제가 큰 기대를 하지 않아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생각보다 꽤 괜찮은 영화였습니다.
무명의 무능한 연극배우와 그의 아들
영화의 배경은 서슬퍼른 독재가 지배하던 1970년대입니다. 무명 연극배우 김성근(설경구 분)은 비록 연극 극단의 포스터를 붙이러 다니는 무명 배우지만 아들 앞에서는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고 싶어서 연극에서 왕을 하고 있다고 뻥을 치는 순박한 아버지입니다.
그렇게 그날도 연극 극장의 청소를 하고 있다가 한 배우가 극단과의 마찰로 극단을 나가버립니다. 연극 리어왕의 광대 역이 빠지자 극단은 김성근에게 광대 역을 맡깁니다. 드디어 연극 무대에 올라서게 된 김성근은 아들과 어머니를 극장으로 초대하고 아들과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김성근은 멋진 연기를 하려고 했지만 무대 울렁증에 대사를 다 까먹습니다.
그렇게 시작하자마자 성근은 절망에 가까운 무너짐과 함께 아들 앞에서 혼나는 자신의 모습에 자괴감까지 느낍니다. 무능한 배우를 넘어 무능한 아빠라고 낙인이 찍혀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성근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성근은 중앙정보부가 기획한 김일성 대역을 뽑는 오디션에 합격을 합니다. 물론 성근은 중앙정보부가 김일성 오디션을 하는지 모르고 다른 지원자들처럼 평범한 배우 오디션에 참가 했다가 덜컥 합격해 버립니다.
무슨 배역을 맡는지도 모른채 합격자들은 눈을 가린 채 어디론가에 끌려갑니다. 그 끌려간 곳은 중앙정보부이고 내리자마자 심한 구타를 당하고 물고문, 전기고문을 당합니다. 심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가족을 위해서 고문을 묵묵히 견딘 그 뚝심을 본 오계장(윤제문 분)은 성근을 합격 시킵니다
김성근이 맡은 역할은 독재자 박정희가 북한의 독재자 김일성과 만나기 전에 능숙한 만남을 위해서 김일성 대역을 연기 하는 것입니다.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직후라서 다가올 남북정상회담을 대비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무명에 무능한 연극배우는 허교수(이병준 분)의 연기 지도로 날로 연기력이 늘어가게 됩니다. 여기에 외모까지 닮기 위해서 일부러 살을 찌웁니다. 김일성이 나온 영상과 신문과 주체사상을 머리에 넣으면서 점점 김일성 그 자체가 됩니다.
그러나 영화 실미도처럼 성근의 김일성 대역은 윗선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취소함으로써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성근은 실업에 대한 공포,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공포와 김일성 오디션에서 받은 심한 고문과 정신적 압박이라는 터널효과로 김일성을 연기하는 것이 아닌 김일성이 되어버립니다. 그렇게 성근은 김성근이 아닌 김일성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영화는 20년이 지나서 아직도 김일성으로 사는 김성근과 성근이 그렇게 애지중지 키우고 사랑했던 아들이 태식(박해일 분) 훌쩍 자라서 다단계 회사에서 근무하면서 매일 사채빚에 시달리는 모습으로 전환이 됩니다. 성근은 요양소에서 김일성으로 살고 있고 아들은 미래는 생각하지 않고 하루만 근근히 먹고 사는 방탕한 생활을 보여줍니다.
당연히 이 부자간의 관계는 끊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와 함께 살던 분당의 옛집이 분당 신도시 개발 소식으로 땅값이 크게 떠오르자 태식은 요양원에 있는 아버지 성근을 찾아갑니다. 찾아간 이유는 속물스럽게도 아버지의 인감도장 때문입니다. 그 인감도장이 있으면 집을 아주 비싼 가격에 보상을 받고 팔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들 태식은 자신의 사채 빚을 갚을 수 있는 유일한 출구인 아버지의 인감도장을 찾기 위해서 아버지를 요양원에서 옛 집으로 모십니다. 이후, 영화는 두 부자 사이에 쌓인 오래된 묵은 감정을 풀어가면서 부자간의 관계 회복을 하는 내용을 보여줍니다.
독재 시절을 간접 비판하면서 김일성을 통해서 아버지의 부성애를 녹여낸 시나리오는 꽤 좋은 '나의 독재자'
김일성을 소재로 했다고 이 영화를 정치영화나 반공영화로 분류해서는 안됩니다. 영화는 흥미롭게도 김일성 대역에 갇혀서 사는 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복원하는 과정을 감동스럽게 담고 있는 부성애를 주제로 한 영화입니다.
먼저 소재 자체가 아주 독특합니다. 정말 이런 일이 있었을까? 할 정도로 김일성 대역을 소재로 발굴했다는 자체가 창의적입니다. 실제 역사에서도 김일성 대역을 준비 했었다고 하죠. 이 김일성 대역은 여러가지 상징을 담고 있습니다. 먼저 김일성 대역을 준비 시키는 과정의 폭력은 북한의 김일성과 비슷한 남한의 독재자를 역으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 서슬퍼런 70년대의 무거운 분위기를 담으면서도 그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는 절박한 한 가난한 아버지로 잘 엮습니다.
남자들 아니 여자분들도 잘 아실 겁니다. 한국에서 아버지라는 캐릭터는 독재자 캐릭터가 가장 많습니다.
요즘 젊은 아빠들은 다정다감 캐릭터가 주류지만 지금의 50대 이상 아버지들은 여전히 포스로 먹고 사는 독재자 스타일이 많습니다. 가족의 의견은 다 무시하고 오로지 자기 의견만 경청하는 독재자죠. 그 독재자가 현명하고 바른 길로만 인도하면 큰 탈이 없을 수도 있지만 그 독재자가 가족 관계를 다 헝클어 놓기도 합니다.
외국도 그렇겠지만 한국의 부자 관계는 좋은 관계가 많지 않습니다. 무뚝뚝한 아버지와 무뚝뚝해져가는 아들 사이의 관계를
영화는 독재자의 아이콘인 김일성을 빗대어서 풀어내고 있습니다. 영화는 무능한 연극배우인 아버지를 원망하면서 살았던 아들 태식과 그 태식을 위해서 20년 만에 단 한 번 그리고 오로지 단 한 명의 아들이라는 관객을 위해 위대한 연극을 펼치는 모습을 통해서 부자의 아름다운 관계를 보여줍니다.
소재도 독특하고 그걸 풀어가는 방식도 꽤 좋습니다. 보면서 우리네 아니 내 아버지를 많이 생각하게 되네요.
뚝뚝 끊어지는 듯한 아쉬운 연출
시나리의 창의성은 좋긴 하지만 영화가 좀 끊긴다는 느낌이 많습니다. 감정이입이 될만한 장면에서 갑자기 화면 전환을 하고 말하려는 주제를 이끌어가는 힘이 약합니다. 빈틈이 많은 연출력은 너무나도 아쉽습니다. 여기서 이런 식으로 풀어가면 더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영화 내내 흐릅니다.
좋은 소재와 주제 그리고 훌륭한 두 주연 배우의 연기로 좋은 결과물을 만들 수 있음에도 성긴 연출과 구성력은 좀 안타깝네요.
아쉬운 전개 과정을 박해일, 설경구라는 뛰어난 배우가 채우다
나의 독재자의 주변의 평을 보면 한결같이 칭찬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박해일, 설경구라는 연기의 신인 두 배우의 뛰어난 연기력입니다. 특히, 설경구의 연기에 반해버린 관객이 많습니다. 배우 설경구는 워낙 연기 잘하는 배우임을 다들 알고 있지만 이 영화에서 또 한 번 자신의 진가를 제대로 발휘합니다. 김일성 연기는 김일성의 메소드 연기 같다고나 할까요?
여기에 이 설경구를 받아주는 아들 박해일의 건달 같은 연기도 좋습니다.
성긴 연출력과 구성력을 좋은 소재와 좋은 배우들이 메꾸는 영화가 '나의 독재자'입니다.
이 영화는 20대나 자식을 키워보지 못한 분들 보다는 연로한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부모가 된 분들이 보면 좋습니다. 특히 3,40대의 남자분들이 본다면 아버지라는 독재자에 대한 반목의 세월을 녹여주는 감동이 있습니다. 저 또한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내 아버지에 대한 생각 때문에 뭉클하게 봤습니다. 자신이 무너지면 가족이 무너진다는 생각으로 치열하게 살았던 아버지, 그리고 그 아버지를 이해 못하는 아들의 긴 반목의 시간을 반추해 볼 수 있는 영화입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노리는 아들에서 아버지를 이해하는 아들의 화해의 2시간이었습니다.
별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