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도 많이 읽고 많이 소개하고 많이 보유하고 있습니다. 집에 있는 책이 수백 권을 넘어서 1천 권을 넘어서려고 하네요. 이 중에서 사고 안 읽은 책도 꽤 많습니다. 어느 날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책들을 보다가 문득 책들을 분류해 봤습니다. 대부분의 책들이 정보를 담고 있는 IT관련 서적이나 경제서적, 사진 관련 서적과 예술 서적 등이 대부분입니다. 여기에 올해부터 읽지 않기로 한 자기 계발서도 꽤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소설책이 적습니다. 고전 소설책은 몇 권 보이지만 최신 소설 특히 2천 년 대 이후 인기 소설가의 책들은 거의 없습니다.
제가 너무 책을 편중해서 읽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소설책을 오도독 전자책 서비스에서 뒤져봤습니다.
그중 들어오는 이름이 김영하와 김연수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소설가들은 대부분 여류 소설가입니다. 이 여류 소설가들의 책이 제 성향과 취향에 딱 맞긴 합니다. 감수성이 철철 넘치는 소설들이 좋긴 한데 너무 여성 소설가의 책만 읽는 것 같아서 남성 소설가의 책을 찾다가 두 소설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니, 이미 유명세로 인해 제가 알고 있었지만 단, 한 권의 책도 읽어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집어든 책이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과 김연수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입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전 김영하 책을 다 읽고자 김영하 책 2권을 골랐습니다. 그런데 좀 이상 했습니다. 같은 작가라고 하기에는 글의 서술 방식이나 이야기 톤이 좀 다르더군요. 한 3분의 1을 읽고 이상하다 해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작가가 다릅니다.
김영하의 소설이 아닌 이름이 약간 비슷한 김연수입니다
김연수?? 김연수 작가도 알고 있었지만 김영하부터 시작하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오히려 전 김연수 작가의 책을 우연히 집어 들어서 읽었는데 이 김연수 작가의 이야기 속에 빨려 들어갔습니다. 재미없는 책은 집중해서 읽지 않는데 이 책은 첫 장을 넘기면서부터 빨려 들기 시작해서 끝까지 놓지 못했습니다.
90년대 초 청춘의 서러움과 방황 혼돈을 담은 책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제가 이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 빠져든 이유는 내 이야기 아니 내 청춘을 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 속 주인공이 사는 시대는 91년도 입니다. 아마도 70년생인 김연수 작가 본인의 경험이 많이 녹아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더 몰입이 되었습니다. 저의 청춘과 작가의 청춘이 비슷한 시대를 지나고 있었고 그 91년 도라는 상징적인 시대의 회오리 속에서 작가의 기억과 내 기억이 조우하면서 큰 시너지와 깊은 감흥을 이끌어 냈습니다.
91년도는 어떤 년도였을까요?
지금의 20대는 잘 모르겠지만 91년도는 한 거대한 시대의 종말이 보이고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 보이던 시대였습니다.
마광수 교수가 1991년 발표한 '즐거운 사라'로 구속된 것도, "모든 것이 이제 다 무너지고 있어도 환상 속에 그대가 있다"라고 노래한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한 것도 바로 1992년의 일이었다. 1991년 5월 이전까지만 해도 대뇌의 언어로 말하던 사람들이 1992년부터 모두 성기의 언어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중에서 일부 발췌>
91년, 92년은 거대한 이념의 시대가 저물던 시대였습니다. 70,80년대 매일 같이 데모를 하던 대학생들은 이념의 시대에 살았습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필독서로 읽으면서 사회 민주주의 사상에 물들었습니다. 그 이념을 힐난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어떻게 그렇게 일관되게 이념만이 전부인 양 살았는지 의아스럽기도 합니다. 물론, 군사독재정권을 비난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행동이고 불의에 항거하는 준엄한 심판입니다, 그러나 잘못된 것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 사회 민주주의가 마치 민주주의의 대안인양 윽박지르는 모습은 좀 이해가 안 갑니다. 민중을 외치면서 정작 민중에 대한 깊은 관심도 없습니다.
공단의 위장취업을 통해서 민중의 고통을 이해하고 민중을 깨우게 하는 것은 이해가 가면서 동시에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당시 대학생에게는 그게 선의이자 진리이자 참이었을지 모르겠지만 일방적으로 계몽을 당해야 하는 공장 노동자들의 시선을 너무 엘리트 층의 시선으로 본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렇게 거대한 이념의 시대는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면서 서서히 잦아들었습니다.
그렇게 물태우라고 불리면서 지금 보다 정치비판이 자유로웠던 시대의 해방감에 대학가의 시위는 잦아들기 시작했고 사회는 해빙기를 맞았습니다. 91년 5월 강경대 군의 사망 사고 이후에 사회는 점점 대뇌의 시대에서 성기의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여기서 대뇌란 이념이고 성기는 쾌락입니다. 확실히 기억됩니다. 92년부터 한국은 확 달라졌습니다
비단, 서태지와 아이들이 가져온 미 흑인 문화인 힙합문화가 아니더라도 곳곳에서 해방감을 느끼는 들뜬 모습들이 보였습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보다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를 불렀습니다. 전 이 91년 5월이 소설가 김연수의 말처럼 이념의 시대에서 쾌락의 시대로의 전환이었고 그걸 목도했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 몰입이 바로 된 이유입니다.
한 장의 사진으로 푸는 2개의 닮은 이야기
이 책의 첫 장은 한 장의 사진으로 시작합니다. 화자의 할아버지가 일제강점기 때 강제 징용으로 끌려간 남양 군도에서 가져온 3D 흑백 누드사진입니다. 이 한 장의 사진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91년 대학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화자는 정민이라는 동아리 동기와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정민의 어두운 이야기, 그리고 화자의 할아버지가 태우려던 3D 흑백 누드사진을 다 타기 전에 꺼내서 가지고 있는 이야기 등을 하면서 서로는 가까워집니다. 그렇게 이 커플은 91년 그 이념의 시대 끝자락에서 흔들거리고 있었습니다.
내가 정민에게 말하는 가족사, 특히 할아버지 이야기와 정민의 삼촌의 아픈 과거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이 작가 천상 이야기꾼이구나 할 정도로 이야기 자체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지만 그걸 풀어내는 방식이 너무 매끄러우면서도 동시에 끈적거립니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인 할아버지나 정민 삼촌은 거대한 시대라는 굴레 속에서 흔들거리는 힘없는 개인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수많은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은 다 그런 사람들입니다.
시대를 잘못 만나서 군화발로 차이거나 강제 징용 당한 사람들, 그들 자신은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지만 몰상식과 권위와 폭력의 시대에 집단 린치를 당합니다. 이는 화자인 나와 정민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할아버지 시대인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후 박정희 정권 시절, 그리고 전두환을 지나 노태우 정권 시절까지 3대가 받는 고통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읽은 유시민의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유시민은 자신들의 가족사를 찾아보고 살펴보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자기를 더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죠. 이 책에서의 나와 정민은 그런 인물들입니다. 이념의 시대에서도 자신들의 과거를 찾아보고 자신들의 주변 사람의 과거를 찾아보면서 자신들을 돌아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뜨겁게 사랑을 하면서 동시에 외로워합니다. 우주에 떨어진 미아 같은 존재들, 어떻게 세상이 흘러갈지도 모르고 이념의 시대에 투쟁을 하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의 부초처럼 흔들거립니다.
개인들은 언제나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했다. 이건 '독일 이데올레기'에서 마르크스가 한 말이었다.
이데올로그들이 말하는 '순수한' 개인으로부터가 아니라, 역사적 조건들과 관계들 내부에 있는 자신으로부터 그렇다면 어디를 향해?<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중에서 일부 발췌>
바로 그 순간, 나는 이제 더 이상 서울의 변두리를 걸어 다니지 않아도 되겠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그랬듯이, 또 현대사를 온몸으로 뚫고 지나온 다른 어른들이 그랬 듯이, 한 시대의 우울을 내가 감당해야 한다면, 그래야 내가 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라면, 기꺼이 그 모든 것을 내 등에 떠메기로 나는 마음먹었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중에서 일부 발췌>
이 책의 주인공과 등장인물들은 이런 개인과 거대한 시대와 역사에서 고뇌하고 고통받는 인물들로 나옵니다. 주인공은 그런 시대의 버거움과 자신에 대한 깊은 생각 속에서 흔들거립니다. 물론, 이 흔들거림은 당시의 지식층만이 겪던 고통입니다.
현재의 50대 분들 이상 대다수는 이런 고통을 받지 않았습니다. 독재 정권에 대들거나 항거하거나 이건 잘못되었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국민 대다수는 박정희를 찬양하고 훌륭한 대통령이라고 하며 전두환이 독재를 하긴 했지만 당시 물가도 잡혔고 치안이 무척 뛰어났으며 고도성장기여서 취직도 쉽고 뭘 하든 다 장사가 잘 된 시대였다고 오히려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게 한 것은 70,80년대의 대학생들의 시위 때문에 탈권위와 군사 독재 정권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솔직히 전 이념의 시대 끝자락에 대학에 입학을 해서 그들의 고통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최근 느낍니다. 이 거대한 우울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계속 앓는 감기 같은 깊은 우울에 하루하루가 아픕니다.
현 정권과 전 정권의 폭정을 겪으면서 당시 80년대 대학생 선배들의 고통을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물론,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그냥 고개를 돌리면 됩니다. 못 본 척, 모른 척하면 됩니다. 그럼 이 시대의 우울한 감기는 사라지지만 그게 쉽게 되지 않습니다. 이런 고통을 느끼던 소설 속 나는 장례식으로 몸을 피합니다.
시대가 만든 괴물 강치우를 만나다
이 책은 후반에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주인공은 방황을 하다가 방북 학생 예비대표로 독일에 가게 됩니다.
그 독일에서 한 비디오를 보게 되는데 이 비디오의 내용이 아주 충격적입니다. 그리고 그 비디오 속에서 할아버지가 남양군도에서 가져온 3D 흑백 누드사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비디오 속 주인공인 강치우라는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강치우의 지난 삶이 펼쳐집니다. 전, 좀 하다 말겠지 했는데 책 끝까지 강치우의 과거가 나옵니다. 이런 소설 형식을 라운드 소설이라고 하네요. 이렇게 화자는 나에서 강치우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강치우의 이야기는 놀라운 이야기의 연속입니다
1980년대식 사랑, 그건 바로 대학교수인 상희가 이길용(강치우)에 대한 품었던 감정 같은 것이겠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우울증, 강한 상대에게 품게 되는 열등강, 선한 사람이 마땅히 가지는 죄책감 등이 압도적인 폭력의 시기를 만나게 되면 때로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사랑의 감정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때의 나로서는 어디서 어디까지를 일컬어 사랑이라고 말해야 할지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지만, 1980년대에 많은 사람들이 다른 감정들, 예를 들어 증오심이나 복수심, 혹은 공명심 등을 사랑으로 이인한 것만은 분명했다<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중에서 일부 발췌>
광주에서 분신 소동 후에 선한 사람들을 만나서 폭력의 시대에서 구출된 이길용(강치우)은 대학 교수와 뜨거운 사랑을 하다가 안기부(현 국정원)에 세뇌를 당한 후에 대학에 침투합니다. 일명 프락치로 활동하는데 아이너리컬하게도 안기부에서 배운 자본론과 수많은 금서에 빠져서 프락치 활동을 하지 않고 대학생 세계에 동화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거기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체적인 삶에 대한 각성을 하게 되죠
그리고 한국 군산에서 태어난 일본인 아버지의 딸인 일본인 여자를 한국 대학생의 분신 현장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동기이자 화자의 애인인 정민의 삼촌 이야기와도 연결됩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링크입니다. 이렇게 2개의 큰 이야기는 아주 다른 이야기 같으면서도 연결되는 연결고리가 많습니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폭력의 시대에 대한 고통과 서러움을 이야기하면서 서로 보듬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강치우(이길용)에게 큰 깨달음을 받습니다.
정체성과 시대의 아픔 속에서 아파하던 나에게 "반석 위에 집을 지어라, 인생은 자기 자신이 지배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되어라'라는 듣게 됩니다. 한 번도 자기 자신이 되어 본 적이 없는 강치우라는 괴물은 그렇게 폭력의 시대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찾게 됩니다.
행성들의 섭동처럼 우연인 듯 필연인 듯 우리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 할 때가 많습니다. 우연에 대한 원망입니다. 이 책에서 할아버지와 삼촌, 강치우는 그런 우연에 대한 원망을 했었습니다. 자신들이 주체적이지 않은 삶에서 일제에 군사정권의 군홧발에 차였습니다. 그러나 강치우는 대학교수를 만나고 안기부 요원을 만나고 일본인 애인을 만난 후에 서서히 변하면서 자신을 찾았습니다. 섭동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의 행성이 다른 행성의 인력으로 인해 궤도에 변화가 생기는 것을 섭동이라고 합니다.
강치우도 나도 정민도 수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섭동을 일으킵니다. 내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조금씩 때론 좀 크게 영향을 받으면서 내 삶의 궤도를 수정해 가죠.
여기서 나오는 인물들은 폭력의 시대이자 짐승 같은 시대에 대한 고통을 받으면서도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찾아가는 모습이 솔깃하고 진솔하게 담기고 있습니다. 내 문제가 아닌 시대의 모습에 고통스러워하는 당시 90년대 한 청춘의 방황기와 극복하는 과정이 사진처럼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이 책이 참 재미있었던 점은 90년대 초의 우울을 잘 담기도 했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은 기억이 아닌 이야기로 전해진다는 것을 느끼게 할 정도로 다른 사람의 인생이 맛깔스러운 이야기로 잘 담겨 있습니다. 마치 액자 소설 같이 느껴질 정도인데요. 그 이야기 하나하나가 활어같이 꿈틀거립니다.
천상! 작가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김연수를 이야기꾼입니다. 이야기의 힘이자 소설의 힘을 느끼게 해 준 작품으로 소설 읽는 재미를 다시 알려 준 고마운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 대뇌의 시대에서 성기의 시대로 접어드는 그 시기를 살았던 분들은 더 크게 와닿는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