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은 약한 놈을 공격하거나 일부러 버립니다. 무리에 위해를 줄 수 있기에 약한 녀석을 버리고 가버립니다.
하지만 인간은 다릅니다. 다치고 아프고 약한 사람을 손을 내밀어 함께 가자고 합니다. 이게 바로 짐승과 인간의 차이죠.
인간은 약한 존재를 바로 차는것이 아닌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해서 보듬어줍니다. 관용과 배려는 인간의 특성입니다.
관용과 배려가 인간을 진화시켰다고 하긴 힘들지만 짐승과 인간을 구분하게 해주는 차별점이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민폐 캐릭터인 길을 나가라고 울부짖는 사람들의 폭력성
무한도전을 즐겨봅니다. 유일하게 매주 찾아보는 예능 프로그램인데 이 무한도전에서 가장 활약이 떨어지는 출연자가 바로 '길'입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길을 싫어합니다. 싫어요라는 말을 변형해서 긿어요라는 말을 쓰면서 공격하는데 그 공격의 글을 볼때 섬뜩한 말들이 가득합니다.
물론 저도 길이 좀 실망스러운 출연자입니다. 초창기는 새로운 캐릭터고 새로운 활력을 줄줄 알았는데 가면 갈수록 꿔다 놓은 보릿자루더군요. 그나마 최근에 자신의 그런 민폐스러운 모습을 하나의 캐릭터로 만들고 있어 조금은 나아졌다고 느껴집니다.
제가 무한도전을 좋아하는 이유는 일상성에 있습니다. 일상에서 만나는듯한 우리 주변에 있는듯한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느낌 때문에 다른 예능에서 느낄 수 없는 친근감이 있습니다. 길의 민폐 캐릭터 혹은 왕따 스러운 모습 조차도 일상의 모습이 강해서 오히려 전 길의 그런 모습이 자연스럽고 좋습니다. 물론 다른 출연자들 처럼 해주었으면 좋겠지만 지금 같이 다른 출연자가 구박하듯 끌어주는 모습이 좋네요. 또한 정형돈 처럼 서서히 길의 활약이 최근에 좋아지고 있어서 고무적이고요
어찌보면 지금의 길의 모습은 루저의 모습으로 비추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변 혹은 우리 친구들 중에 길과 같은 친구들은 꼭 있고 우리는 그런 친구들을 가차없이 버립니까?
나보다 좀 못났고 세상의 기준에서 좀 못 났다고 가차없이 인간관계를 끊습니까?
하지만 사람들은 길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 공격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짐승들이 약한 동료를 물어 뜯고 버리는 그런 모습이 오버랩되네요. 자신들이 인간이 아닌 짐승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자 배려나 관용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사람들 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학교에 있으면 왕따의 가해자가 되고 회사에 있으면 따돌림을 부축히는 못난 회사원이 됩니다
공장형 동물농장이 가축들을 스트레스 받게 한다
어제 TV에서 공장형 농장의 실태를 보여줬습니다. 일전에 읽은 책에도 이런 가출들의 참혹한 현실을 담았는데요. 우리가 먹는 돼지, 닭, 소들은 우리에게 고기를 공급하는 친근한 가축이 아닌 하나의 고기 생산 기계 취급을 하더군요
돼지는 원래 땅을 잘 파는 동물입니다. 코로 땅을 본능적으로 파죠. 또한 호기심도 많고 사회성도 좋습니다. 우리는 돼지가 멍청하다고 생각하지만 돼지의 아이큐가 우리가 키우는 개 보다 더 높습니다. 아이큐가 높다는 것은 스트레스도 많이 받는 다는 것입니다. 이런 영리한 돼지를 저런 작은 틀 속에 먹고 싸고하는 작은 공간만 만들어서 키우니 돼지가 스트레스를 안 받을래야 안 받을 수 없습니다.
돼지들중 일부는 정신찬란증상을 보이기도 하고 스트레스가 심해서 다른 돼지의 꼬리를 뜯어먹기도 하기 때문에 돼지는 태어나자 마자 마취도 안한 상태에서 꼬리를 커터기로 잘라버립니다.
더 가혹한 것은 분만틀입니다. 딱 돼지가 누울정도의 공간에 암컷 돼지를 키우면서 새끼를 낳으면 저렇게 돼지와 돼지 새끼를 분리해 놓고 키웁니다. 암컷 돼지는 평생 새끼만 낳고 새끼를 보듬어보지도 못하다가 죽습니다.
전 이 분만틀을 보고 있노라니 우리의 현실이 오버랩됩니다.
어려서 귀여움과 사랑을 받고 자라야할 아이들이 맞벌이다 뭐다 해서 할머니랑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모습
어머니나 아버지는 녹초가 되어서 집에 들어와서 한 두시간 놀아주거나 아예 대화없기 바로 쓰러져 자는 우리네 부모님들의 살풍경이 오버랩됩니다.
아이들은 충분한 사랑을 공급받지 못하고 자라다보니 스트레스를 많이 받게 됩니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서로 스트레스를 받게 되다보니 한국이 스트레스 공화국이 된 것은 아닐까요?
왜 7,80년대는 맞벌이를 하지 않고도 아이들 쑥쑥 잘만 키웠는데 왜 요즘은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한명의 자녀도 키우기 힘들어졌을까요?
닭장안에서 키워지는 달과 닮은 우리의 아이들
작년에 구제역으로 소는 일부만 죽고 돼지가 무려 332만 마리가 살처분 되었습니다. 말이 살처분이지 나중에는 인력과 시간이 모자라서 살아 있는 돼지를 그냥 생매장 시켰습니다. 돼지가 구제역에 약한 이유는 좁은 공간에 많은 돼지를 키우다보니 돼지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그 스트레스로 면연력이 약해져서 구제역이 걸렸다하면 전파속도나 그 구제역을 이겨낼 돼지가 없었습니다. 또한 구제역이 아니더라도 지금의 돼지나 소, 닭 사육방식은 아프면 스스로 낫게 하는것이 아닌 항생제를 먹여서 억지로 낫게 하는 모습입니다.
돼지도 돼지지만 닭들은 더 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애니 '마당을 나온 암탉'에서도 살짝 나오지만 지금 닭들은 배터리 케이지라는 작은 틀속에 3마리씩 들어가서 먹고 싸고 알만 낳다가 죽습니다.
그런데 이 배터리 케이지가 너무 좁다보니 약한 닭은 먹이도 제대로 못 먹고 비실거리면 다른 닭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깃털을 다 뽑고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좁은 공간이다 보니 도망갈 곳도 없어서 그렇게 쪼임을 당하다가 약한 닭은 죽어버리게 됩니다.
1만 마리당 300~400마리의 닭이 이런저런 이유로 죽는다고 하는데요. 저는 다른 닭을 쪼는 모습을 보면서 저런게 바로 왕따구나 하는 느낌이 드네요. 학교라는 배터리 케이지에서 사육되는 아이들 좁은 공간에 (물리적 공간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들이 빠글빠글 있으니 서로 쪼아되는 모습들.
여기서 좁다라는 것은 물리적 공간도 공간이지만 여유가 없는 교육환경도 거론하는 말입니다. 솔직히 한국의 교육이 생각의 유연성을 길러주는 교육입니까? 무조건 이 길로 가라고 지시하는 일방적 교육이죠. 학생이 왜요? 라고 물어보면 왜요가 아니라 외워! 라고 외치는 게 한국식 교육입니다.
이렇게 정답을 정해놓고 아이들을 폭력적인 시선으로 가르치니 아이들이 스트레스를 받는 것 아닙니까?
아니 왜 초등학생이 운동장에서 혹은 동네에서 뛰어놀지 못하고 학원차 타고 이 학원 저 학원 다녀야 합니까? 돼지가 땅을 파지 못하고 케이지에서 사는 모습과 아이들이 뛰어놀지 못하고 학원과 학교에 갖혀 사는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본능을 억압하니 아이들은 스트레스를 받고 그러니 닭들 처럼 서로를 쪼아되는 것 아닙니까?
특히 약한 학생은 본능적으로 찾아내서 같이 쪼아돼죠. 학교 선생님들이 이런 모습을 유심히 봐야 하는데 선생님들은 큰 관심도 없어 보입니다. 꼭 아이가 피를 흘리고 큰 상처가 나야 그때서야 누가 때렸니?라고 묻죠
아무튼 이 학교라는 곳은 거대한 닭장입니다. 생각의 유연성도 없고 획일화된 사고나 주입시키고 아이들의 본능을 억압하고 통제할려고만 하니 서로들 쪼아되는 왕따를 하는 것이죠. 지금 학교는 아이들을 짐승으로 만드는 곳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교육시스템과 사회적 환경 즉 스트레스를 양산하는 한국사회에서는 절대로 왕따문화는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스트레스를 서로 유발하면서 그걸 경쟁이라고 포장하고 그게 삶이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많은 한국사회에서는 왕따문화는 자연스럽게 키워지고 커질 것입니다.
아니 애니팡 같은 게임을 랭킹 때문에 중독되어서 한다고 하니 얼마나 우리가 경쟁을 좋아하는 사람들인지 알 수 있죠.
지금도 학교에서 닭처럼 길러지는 우리아이들 그런 아이들에 대한 경각심도 없는 한국입니다.
말 안들면 패야 한다는 짐승같은 생각이나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