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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영화창고

타인의 삶을 도청하다가 삶이 변한 착한 사람의 이야기

by 썬도그 2011.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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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 이건 우리 일상의 도처에 널부러진 생물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수 많은 연예인들의 S라인을 관음했으며 신문과 포털에 떠 있는 다른 사람의 삶을 관음하고 있습니다.  그 관음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내 일상과 그 기사가 얼마나 연관이 있나 측정을 합니다.

훔쳐보는 재미는 인간 본성중 하나일 것 입니다
관음이 직업인 사람이 있습니다.  국가와 안보를 위해서  한치 흐트러짐 없이  오늘도 고성능 도정기를 설치한 집을 감시합니다. 그의 이름은 비슬러,  그는 독신주의자이자 원칙주의자입니다.

그의 신념은 확고합니다.  조국 동독을 해칠려고 하는 모든 세력을 단호하고 엄정하게 처벌하는 것 입니다. 이 원칙주의자가 맡은 임무는  사람들의 신념이 모두 동기화 할 수 없다고 말하는  드레이만이라는 시인과 그의 아름다운 부인이자 여배우인 실란트를 도청하는 것 입니다.

 
장관은 드레이만을 감시하라고 지시하고 비슬러가 그 도청을 맡습니다
장관은 아름다운 여배우이자 드레이만의 아내인 실란트를 흠모합니다.  그리고 실란트에게 반 협박을 합니다.

배우생활 오래 하고 싶으면 자신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져야 한다고요.  실란트는 자신의 안위와 남편의 안위를 걱정하면서 그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제안을 받아 들입니다

 
그 모습마져도 도청을 당하고  비슬러는 당혹해 합니다.
이 원칙주의자는 국가를 위하는 일이라면 모든 지 하지만 국가의 아이콘인 장관의 부정을 모른척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부정한 관계를 남편인 드레이만이  알 수 있게 수를 씁니다

드레이만은 아내가 자신을 위해서 어려운 행동을 하는 것을 알고 괴로워 합니다.
드레이만은 시인입니다. 문인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 지긋지긋한 감시와 억압에 넌더리를 냅니다.
처음에는 이런 세상에 넌더리를 내고 화를 내지만 누구나 다 그렇듯 그런 세상에 적응해 갑니다.

그런 세상을 저주하듯  드레이만의 오래된 친구이자 동료였던 노작가 자살을 합니다.
이후 드레이만은 변하기 시작합니다. 문인들과 만나서 동독의 현실을 서양 언론인 미러지에 알리자고 논의를 합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을 비슬러가 도청하고 있었습니다.  일거수 일투족을 다 알고 있었고 심지어는 드레이만 일행이 쓰는 술책에도 넘어가지 않습니다. 도청과 심리술의 대가인 비즐러는 기계같은 사람입니다



드레이만과 실란트의 사랑은 뜨겁고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이 부부의 삶에 도청대가인 비즐러는 어느새 연극의 관객이 되어 이 부부의 삶의 관객이 되어갑니다. 그리고  노작가가  드레이만에게 준 마지막 선물인 '착한 사람들을 위한 소나타'를 연주하는 드레이만의 피아노 소리에 골방에서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한번도 개인의 삶을 살지 못하고 국가와 정보부를 위해서만 살았던  비즐러,  자신의 삶은  국가로 부터 양도 받은 삶이라고 알고 살았던  비즐러는  드레이만 부부의 삶에서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그는 변하기 시작합니다


꼬마 아이로 부터 욕을 먹고 살았던 삶을 되돌아보면서 그는  드레이만을 고발하는 도청 고발자가 아닌 드레이만을 보호하는 수호신이 됩니다. 


이 영화는 여러면에서 우리의 현실과 맞물려 생각하게 됩니다
어제도 대학생들이 홍제동 대공분실 앞에서 연행을 당했습니다.  국가보안법 위반 협의로 체포된 자본주의 연구회 회원 3명과의 면담을 요구하는데 경찰은 연행을 했죠

얼마전에는 국정원이 민간인을 사찰한  그것도 거물급 기업인을 도청한 테이프를 세상에 폭로한 MBC기자에게 유죄 선고를 한 판결도 봤습니다. 한국은 공안국가입니다. 지금도  인터넷과 도청과 휴대폰 감청등을 하면서 민간인 사찰을 하고 있을 것 입니다. 국정원을 넘어서 총리실 도 민간인을 사찰하는 국가입니다. 

이런 현실과 도청과 밀고와 배신등으로 시스템을 운영하는 지난날의 공산국가이 크게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어디서나  시스템을 유지할려는 자들이 있기 마련이죠. 문제는 시스템을 전복할 의도가 없는 사람도  색안경끼고 무조건 잡아들이고 용의자로 모는 과격함이 문제입니다.

비즐러는 그런 시스템의 요원이었습니다. 요원의 삶이 그렇듯 그는 국가라는 거대한 시스템의 나사 하나 정도의 삶을 사는 자신을  드레이만을 통해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변합니다. 시스템을  위한 삶이 아닌  자기 자신을 아니 자신을 각성케한 아니 양심에 따라서 살게 됩니다.   기계적인 신념을 벗어버리고  양심대로 삽니다.

장관의 부적절한 행동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복수하며 드레이만 부부의 삶을 보위합니다.

어떻게 보면 영화 '박하사탕'과 이 영화는 비슷합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박하사탕은 비극으로 끝나지만 이 영화는 다른 결말을 보여줍니다. 


통일이 된 후 그는 우편배달부가 됩니다
드레이만은  악연이 있던 전직 장관과 공연장에서 만납니다

드레이만은 묻습니다

" 왜 나만 도청당하지 않았죠?"
"무슨소리야 누구보다도 더 철저하게 도청했는 걸"

드레이만은 자신이 도청당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도청당했었고 왜 자신이 잡혀가지 않았는지 궁금해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담당한 요원 비즐러를 알게 됩니다


드레이만은 소설을 씁니다

'착한 사람들을 위한 소나타'


비즐러는 그 책광고를 보고 서점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첫줄에 써 있는 문구를 읽습니다

"선물하실 건가요?:"  서점직원은 묻습니다

그 어떤 사람의 눈보다도 맑고 투명하고 선한 눈빛으로  서점직원에게 말합니다.

"아니요! 제가 읽을 겁니다"


지금도 시스템의 한 부속물로 살면서  다른 삶을 도청하고 감시하는 삶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행동이 과연 양심에서 출발한 행동인지 묻고 싶네요. 국가의 신념과 정의가  개인의 정의로 대체된 삶을 사는 사람들.
그중에서도 비즐러 처럼 양심에 따라서 행동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이 영화는 과연 개인의 삶과  국가가 양도한 삶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각성제 같은 영화입니다
또한 신념보다는 양심에 따라 살라고 충고합니다. 잘못된 신념을 정의라고 믿고 따르는 사람들, 아니 자신의 신념을 믿고 따르는 것을 넘어서 다른 사람에게 그 신념을 강제 주입시킬려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과연 양심이 있을까요?

양심의 다른 말은 인본입니다. 사람위에 이념있고 사상이 있는 것이죠.
양심이 사라진 사회, 그 사회는 이념의 광신도들만 들끓을 것 입니다.  



영화 제목을 말 안했군요.  이 영화의 이름은 '타인의 삶'입니다.  아쉽게도  이 영화에서 정말 뛰어난 연기를 한 올리히 뮈헤는 영화를 찍은 후 1년후에 암으로 사망했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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