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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세상에 대한 쓴소리

박종철 물고문사건을 밝혀낸 검사 안상수. 좌익스님 논란 안상수 사이의 간극

by 썬도그 2010.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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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요즘 연일 구설수에 오르고 있습니다.
강남의  부자절의 스님이 좌파 스님이라고 이야기 했다가   그 봉은사 스님이 발끈해서 그 이야기를 공개하자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그 스님을 모른다라고 하며 일체 노코멘트로 행동하고 있습니다.

관악산 연주암에서 매년 만났던 사이라고 신도들이 말하는데  어디서 거짓말을 하고 사는지 모르겠네요.
노코멘트라는 자체가 인정의 제스쳐겠죠

요즘 신경민 앵커가 쓴 신경민. 클로징을 말하다를 너무 재미 있게 읽고 있습니다.
한국의 민주화 물고를 튼 87년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22주년에  신경민 앵커는  당시 사건을 거론했습니다.
신경민 앵커는 당시  검찰청담당 기자였고 그 누구보다 이 사건을 생생하게 봤다고 합니다.

신기자는  안상수 검사를  거론하더군요.
안상수 검사가  당시에  경찰이 은폐할려고 했던  사건을  막아서면서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구요.
당시 경찰은  국민들에게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했습니다.

당시 경찰은  박종철군을 화장시킬려고 했습니다. 사체를 태워버려야 증거가 남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검찰이 이걸 막아섰습니다. 형사사건이고 사건이 해결되지도 않았는데  원칙대로  부검을 해야 한다고 막아섰고
당시 형사 2부 수석 안상수 검사에게 사건이 배당됩니다.  안검사는 어렵게 얻어낸 부검을  경찰의 위협을 무릅쓰고(지금의 경찰과 검찰은 암수 한몸이던데 ㅠ.ㅠ) 원칙대로 부검을 시행했고   물고문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확보합니다.

과학수사 연구소 부검의  황적준 박사가 외부 압력을 뿌리침으로써 박종철 물고문 사건은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87년 당시의 경찰은 검찰위에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전두환 전 대통령 형이 경찰출신이라서  경찰이 검찰의 멱살을 잡던 시기였고 이런 이유로  검찰은 경찰의 압박에 제대로 수사를 하지 못했습니다. 사건을 축소 은폐할려는 시도는 계속 되었고  5월 18일 천주교가 축소 은폐조작을 폭로하면서 고문치사 사건은 다시 붉어지게 됩니다.

이후 동아일보가 연일 특종 보도를 터트리면서  6월 10일 민주화 항쟁의 도화선을 지핍니다.
여기서 놀라실 분이 있을 것 입니다.  동아일보가  정말?  지금의 20대분들은 잘 모르실거에요. 당시 동아일보는  지금의 동아일보와 다릅니다. 87년 당시 땡전뉴스의 달인  KBS는 연일  시위대를 비추면서 나라 망한다고 망한다고 노래를 부르던  공영 아니 청와대채널이었고
이를  동아일보가  수신료 납부 거부운동으로 대응했습니다.   KBS와 동아일보의 원색적인 싸움이 있었습니다.
지금이야  둘이 손잡고 쎄쎄쎄~~~ 하고 놀지만요

동아일보는 지금의 한겨레 신문과 비슷할 정도로  정부를 심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동아일보  즉 조중동의 한 축이 된것은 90년도 후반부터의 일입니다.   진보성향의 기자들이 모두 동아일보를 떠난후 지금의 동아일보가 되었죠.  사실 지금의 동아일보는  볼만한 신문이 아닙니다. 조선일보야 정치 경제 쪽만 눈 질끈 감고 안읽으면 문화면등 볼만한 꺼리가 가장 많은 신문이지요.   하지만 동아일보는  당췌 볼 내용이 있어야죠.

각설하고
안상수 검사가 민주투사처럼  박종철 물고문 사건을 세상에 당당하게 밝힌 사람은 아닙니다.
외부의 압력과 상부의 지시에 따르는 일개 검사였죠. 다만  안검사를 좋게 보는 것은  물고문의 결정적인  증거인 부검을 외압을 뿌리치고  했다는 것 입니다. 만약 경찰 뜻대로 화장을 해버렸으면 6월 10일 민주화항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고  따라서 한국의 민주화는 오지 않았거나 더디게 왔겠죠


안검사는 국민들의 비판과 상부의 압력등의  이유로  87년 9월 9일 사표를 내고 검찰청에서 나옵니다.


1990년 8월 18일 경향신문  출처 : 네이버 옛날뉴스


이후 안상수검사는  인권변호사로 변신하게 되죠. 그러다 96년 신한국당 국회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합니다
저는 책을 읽으면서  좌파 스님 발언을 한 안상수 원내대표가 설마 예전 안검사였나 했습니다.

안상수 인천시장도 한나라당 출신이라서  그 인천시장인가 했습니다.
도저히 두 사람이 같은 사람으로 매치가 안되더군요. 그리고 집에서 인터넷을 뒤적거리니 같은 인물이 맞네요

한때는 시대의 양심이었던 사람(그 위치에서는 양심적으로 행동했으니) 이 이제는  좌파딱지 붙이고 다니는 졸렬한 사람이 된 모습에
세월은 무상하구나는 느끼게 됩니다.  뭐 87년의 안검사나  지금의 안상수 원내대표나 똑 같은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세월이 사람을 변하게  만들었을 수도요

박종철군을 물고문까지 하면서 소재를 파악하려 했던  사회학과 선배 박종운씨는 국회의원 보좌관을 거쳐 2004년 17대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부천에서 출마해 낙선한 뒤  현재 한나라당 경기 서부지역 총괄본부장이 되었고  박종철군 영결식때  마스크를 쓰지 않고 영정사진을 들었던 정치학과 후배 오현규씨도  2006년 지방선거에서 역시 한나라당 소속으로 구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누구다 다 아는 사실이죠. 한나라당의 뿌리가 87년 민정당이라는 것을요
이렇게 22년의 세월사이에  사람들은 변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변화가 왜 이리 씁쓸해 보일까요?
젊은날의 치기였고 그들에게는 민주주의가 20대가 꾼 꿈인가요?

안상수 원내대표의  요즘 모습을 보면 궁색함을 이고 사는 듯 합니다.
안상수 원내대표가  87년을 기억하면서 살까요?  모를일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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