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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tand; 32nd Street and Third Avenue. Nov. 19,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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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rray Hill Hotel; From Park Avenue and 40th Street. Nov. 19,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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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ssom Restaurant; 103 Bowery. Oct. 3,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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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venth Avenue looking south from 35th Street. Dec. 5,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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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iff and Ferry Street. Nov. 29,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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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lan's Drug Store; 44th Street and Eighth Avenue. Feb. 7,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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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ke and Henry Street. Mar. 6,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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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 Second and Third Avenue lines; Bowery and Doyer St. Apr. 24, 1936

 
 
 



19세기 후반, 보다 정확히 말하면 1853년에 오스만(Georges E. Haussmann, 1809-1891) 남작이 센느강 지역의 도지사가 되었을 때, 파리는 대규모 도시계획에 의해 중세의 잔재를 떨구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혁명적 무장봉기의 진원지인 옛 구역들을 - 중세의 골목길로 점철된 이 지역들은 정부군의 진입을 막는 바리케이트를 쌓는 것이 용이했다 - 해체하고, 대형 공원과 광장을 조성하고, 공중 화장실과 하수도, 급수시설을 정비하여 파리를 명실상부한 ‘유럽의 수도’로 만들려는 이 계획은 제2 제정의 위용을 전 유럽에 과시하려는 정치, 외교적 목적이 동인(動因)이 되었다. 오스만이 도지사로 재임하는 1869년까지 집중적으로 진행된 이 사업은 이후 파리의 지형도를 결정했다. 다시 말해 으젠느 앗제(Eugene Atget, 1857-1927)가 극단의 단역배우 생활을 포기하고 사진을 찍기 시작한 1888년에서 그가 죽은 1927년까지의 파리 모습의 대강을 확정지었다. 앗제가 수차보정이 제대로 안된 렉틸리니어 렌즈가 장착된  8×10 인치 목제 카메라로 찍은 약 8,500 장의 원판 사진은 오스만과 더불어 확정된 파리의 특정 건물과 거리, 파리의 외곽지대, 특정 건물의 실내와 계단, 장식물 그리고 상점의 진열창 등이었다.


확정된 파리의 양상들 중에서, 다시 말해 대규모 도시계획과 정비를 통해서도 살아남은 파리의 양상들 중에서도, 앗제가 특히 관심을 가졌던 대상은 ‘구체제(ancien re gime)’의 문화양상들이었다. 19세기 내내 계속된 혁명적 상황 속에서 사라질 수도 있었을, 또한 오스만 이후에도 계속되는 파리의 변모 속에서 사라질 수도 있는 ‘구체제’의 대상들이 그의 가장 중요한 사진 모티브였다. 앗제는 사라진 혹은 사라져 가는, 조만간 사라질 수도 있는 대상들이면 사진으로 남겨둘 자료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앗제가 사진이라는 시각적 자료를 통해 보전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파리와 파리주변의 대상들은 그러므로 결코 미학적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앗제의 사진적 선택을 결정지은 것은 문화재 보전을 담당하는 제도의 지식체계와 그의 사진을 1차 자료로 사용할 화가, 건축업자, 실내장식업자의 현실적 필요성이었다. 그는 프랑스 국립도서관, 파리 시 역사도서관, 파리 시 역사박물관 등이 구입, 보전할만한 사진들, 즉 이 문화기관들이 역사적, 문화적 보존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고 구입할만할 대상들, 그리고 회화의 제작, 건축의 개 보수에 필요하다고 여기는 실제적 대상들을 사진의 모티브로 삼았다.


앗제의 자료적 사진들이 있기 위해서는 오스만이 파리를 대대적으로 뜯어 고친지 20년의 세월이 흘러야  했다. 그때서야 비로소, 공공 도서관, 역사 박물관들은 사라진 것들의 역사적, 문화적 희귀성을 인지할 수 있었고, 건축업자, 실내장식업자들도 사라진, 사라질 것들에 대한 사진자료의 필요성을 절감할 수 있었다. 물론 19세기 후반의 프랑스 사회는 프랑스 혁명 이후 계속된 정치적 격변에 따른 반달리즘 (vandalism)에 대한 잠재적 두려움으로, 급작스레 사라질지도 모를 과거와 현재의 여러 문화적 양상들을 공적인 차원에서 사진으로 기록해두고 있었다. 19세기와 20세기의 전환시점에서 “예술가들을 위한 자료”를 생산하던 앗제는 급변한 파리의 모습을 보고, 프랑스 사회와 문화의 영역에서 사라질지도 모를 대상들을 개인적 차원에서 사진자료로 기록한다면 이것 또한 경제적으로 생산적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니까 앗제의 사진작업은 예술적 성취와는 관계없이, 출발에서부터 줄곧 영리적, 실리적 목적과 연결되어 있었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앗제의 사진을 “진정한 증빙자료”로서 정의하면서, 사진적 “대상을 아우라(aura)로부터 해방시키는”역사적 의미를 그것에 부여했다. “진정한 증빙자료” 그리고 “아우라의 소독”은 의심할 여지없이 앗제 사진들의 특징을 이루지만, 사실 그 역사적 의미는 결코 그만의 몫이 아니었다. 그를 선행하는 많은 자료 사진사들이 이미 “대상을 아우라로부터 해방”시켰다. 프랑스의 예만을 든다 해도, 프랑스의 문화재 관리국(la Commission des Monuments historiques)은 전국에 산재한 문화재를 세월의 파괴와 19세기 내내 계속된 정치적 격변 속에서 있을 수 있는 충동적 파괴에 대처하기 위해 ‘사진단 (la Mission heliographique)’을 조직하여 120여 장소의 주요 문화유산을 “어떠한 세부도 빠짐없이” 기록하고자 했다. 보전과 복원을 목적하는 이 다큐먼트 작업은 5명의 사진사들에 의해 1851년 여름동안 진행되었는데, 예술사진에 헌신하던 앙리 르 섹(Henri Le Secq), 귀스타브 르 그레(Gustave Le Gray) 조차, 이 다큐먼트 작업 속에서는 어떠한 미학적 개성, 감성의 발현을 억제하며 “진정한 증빙자료”를 생산했다. 사실, 이 사업에 참여한 모든 사진사의 작업은 너무나 비개성적이어서 사진사의 이름을 명기하지 않는 한, 사진의 작가귀속이 불가능할 정도이다. 그들의 미학적 우려는 정확하고 객관적인 기록의 요구, 사업의 취지에 철저히 종속되어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의 다큐멘터리 풍경의 또 다른 예는 글의 시작에서 언급한 파리의 근대화와 관련이 있다. 프랑스 제2제정이 “유럽의 수도 중 가장 화려하고, 가장 위생적인 도시”로 개조시키고자 했을 때, 도시계획 전문가들로 구성된 시 위원회는 샤를르 마르빌(Charles Marville)에게 파리의 근대화 이전과 이후를 사진으로 기록하게 했다. 약 900여장에 달하는 30 x 40cm 크기의 그의 유리원판 사진들은 빈틈없이 정확하고, 객관적인 도시의 풍경이었다. 그것들은 발터 벤야민이 앗제의 사진에 대해 정의한 “진정한 증빙자료”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의 다큐멘터리 도심 풍경은 앗제의 사진에 30년 앞서서 이미 사진적 “대상을 아우라로부터 해방” 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마르빌의 파리 풍경사진들 역시 “어떤 먼 것의 일회적 나타남”으로 정의되는 아우라의 신비로운 현현(顯現)을 “말끔히 소독”한 터였다. 따라서 앗제의 공적은 벤야민이 말하는 것처럼 사진적 “대상을 아우라로부터 해방”시킨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커다란 사진사적 역할은 1927년 그의 초라한 죽음을 전후로 급작스레 찾아왔다.


시각적 정보를 제공하고, 자료의 유용성에 봉사하려는 그의 사진들은 느린 촬영속도와 호의적이지 못한 촬영여건 탓으로 종종 ‘우발적인’ 대상들을 기록했는데, 초현실주의가 애호한 용어를 빌면, 이 ‘객관적 우연들(hasards objectifs)’은 사진의 본래의 생산의도를 전복시켰다. 자료로서의 대상은 부차적인 것으로 전락하고, ‘객관적 우연들’이 시선을 사로잡는 대상으로 부각되었다. 앗제가 죽기 몇 년 전에 초현실주의자들이 그랬듯이, 새로운 미학적 시선은 앗제 사진들의 생산문맥을 고려치 않고, 그 자료사진들이 우발적으로 동반하는 평범한 현실 속에 내재된 초현실적 양상에 주의를 집중했다. 그가 죽은 직후 만 레이(Man Ray)의 조수였던 베레니스 애보트(Berenice Abbott)는 앗제의 많은 사진을 소장하게 되었고, 이후 열정적으로 “앗제, 파리의 사진가” - 이것은 애보트가 출판을 도모하고 피에르 막 오를랑(Pierre Mac Orlan)이 서문을 쓴 1930년에 나온 앗제의 최초의 사진작품집 제목이다 - 를 홍보했다. 1928년에는 ‘살롱 앵데팡당(Salon Independant)’에, 1929년에는 독일의 슈투트가르트에서 열린 대형 전시회, ‘필름과 사진(Film und Foto)’에서 앗제의 사진을 선보였다. 이러한 유통경로를 통해 앗제의 ‘자료’ 사진들은, 사진의 회화주의(pictorialism)가 종언을 고하고, 미국의 스트레이트 사진과 모홀리 나기(Moholy-Nagy)로 표상되는 유럽의 전위적 사진이 예술사진의 주류를 형성했을 때조차 새로운 사진예술의 가능성을 열었다. 애보트, 워커 에반스, 브라사이는 아우라가 말끔히 소독된, 객관적이고 차가운 앗제의 ‘기록’에서 자신의 사진적 방향을 시사받았다.


누구보다도 앗제를 현대사진의 한 원류를 형성한 사진‘작가’로 사진계가 인식하고 받아들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은 ‘아우라의 상실’을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의 한 특성으로 파악했던 벤야민이다. 그의 <사진의 작은 역사>가 쓰여지기 4년 전, 그러니까 1927년에 죽은 앗제에 대해 1931년 뉴욕의 사진화상 줄리앙 레비(Julien Levy)의 요청으로 앗제의 네거티브와 사진을 대거 사들인 애보트의 손을 거친 자료, 평가 외에는 어떠한 다른 자료도 접할 수 없었던 벤야민은 미국의 여류 사진가가 꾸며낸 예술가로서의 앗제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피아노의 명수, 부조니와 같은” 예술가의 반열에 ‘거리의 사진사’ 앗제를 위치시켰고, 초현실주의의 기관지인 <초현실주의 혁명>에 1926년 6월 15일, 12월 1일 두 차례에 걸쳐 그의 사진들이 실렸다는 이유로, 앗제를 “초현실주의 사진의 선구자”로 이상화시켰다. <사진의 작은 역사>에 기술된 앗제에 대한 그의 평가를 인용해보자.


 (...) 사진에는 피아노의 명수 부조니 (Busoni)와 같은 명수가 존재한다. 앗제가 바로 그러한 명수이다. 두 사람은 다 명인이면서 또한 선구자였다. 누구도 따르지 못할 일에 대한 심취는 극도의 정확성과 더불어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이었다. 심지어 성격까지도 비슷한 데가 있었다. 앗제는 배우였지만, 그가 하는 일에 염증을 느껴 무대의 분장을 지워버리고 나서는 현실의 분장까지도 지워버리는 일에 착수하였다. 그는 가난하게 이름도 없이 파리에서 살았다.


 (...) 앗제의 파리사진들은 초현실주의 사진의 선구자이자 또 초현실주의에 의해 다시 움직여지게 된 진정한 의미에서 유일하다고 할 수 있는 긴 대열의 전위대이다. 그는 타성에 젖은 쇠퇴기의 초상화 사진술이 퍼뜨린 질식할 듯한 아우라를 최초로 소독한 사람이기도 하다. (...) 그는 최근의 사진술이 이룩한 의심할 나위 없이 분명한 공적이라고 할 수 있는, 대상을 아우라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을 제일 먼저 도입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앗제는 초현실주의 운동과는 어떠한 정신적 관련도 맺지 않은 채 “이름도 없이 파리에서 산” 사진사였다. 하급선원, 아주 보잘 것 없는 배우의 이력을 가진 앗제는 초현실주의가 목표로 한 인간과 세계의 ‘혁명’에 가담할 지적 역량이나, 정열을 갖춘 예술가가 결코 아니었다. 그는 사진을 통해 일상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에 급급한 ‘사진사’였다. 그의 사진을 싼 가격에 주문하고 편의에 따라 사들인 20세기 초엽의 프랑스 문화 환경은 그의 사진에서 현실을 미화시키고, “질식할 듯한 아우라”를 부르는 “현실의 분장”을 요구하지 않았다. 앗제의 파리와 파리 근교 사진을 문화재 보전과 보수를 위한 사진 자료, 화가의 스케치의 편의를 도모하는 자료사진, 건축의 실내와 실외를 보수하는 건축업자의 참고자료로서 요구했다. 어떠한 예술적 의지도 표방하지 않았던 그는 20세기 초엽의 프랑스의 문화체계의 이러한 요구에 아무런 심리적 갈등 없이 순응했다.


벤야민의 앗제에 대한 해석의 오류는 실증적 자료수집과 엄정한 자료검토를 위한 시간적 거리를 확보하지 못한 필연적인 결과였다. 20세기의 미학적 인식에 큰 족적을 남긴 철학자는 무명의 앗제가 죽은 지 채 10년도 안되는 시기에서 작품의 의미를 객관화 할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할 수가 없었다. 해서, 벤야민은 1936년에 발표된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이라는 글에서, 파리의 건물과 거리, 파리근교에 대한 지형학적 자료의 순수성과 정보제공의 유용성을 제고시키기 위해 인적이 드문 시간을 선호한 앗제의 사진 작업방식을 기이한 불안감, 불안한 기이함을 불러일으키는 미학적 구현으로 평가했다. 인용하면, “자유로운 명상은 더 이상 이러한 사진에 부합되지 않는다. 앗제의 사진은 보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사실, 후대가 인지하는 앗제 사진의 미학적 효과들은 그의 작업의 본래 생산문맥인 1차 자료사진 생산이라는 취지에서 우발적으로 벗어나며 생겨난 파생물들이다. 수차보정이 안된 렉틸리니어 렌즈는 깊은 심도를 위한 조리개 조작에도 불구하고, 미묘한 포그 (fog)효과를 산출했고, 충분하지 않은 렌즈의 이미지 서클은 가장자리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여기에서 화가, 건물보수업자, 도서관을 위한 자료사진은  심상의 이미지로 변모했다. 앗제는 프린트를 위해, 19세기 후반부에 자료사진을 프린트할 경우 일반적으로 사용했던 프린팅-아웃 페이퍼(printing-out paper)를 사용했다. 이 인화지는 잠상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네거티브에 직접 밀착된 상태에서 일광 빛에 직접 현상되었는데, 정착 후에 앗제는 일반적으로 황금조색을 했다. 그러나 수세가 제대로 안된 탓에 그의 자료사진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갈색 톤으로 변색되었고, 이 변색은 엄정하고 객관적이어야 할 자료사진에 추억과 회상의 분위기를 불어넣었다. 그리고 가게나 카페의 정면을 ‘기록한’ 사진들에는 종종 출입구의 창을 통해 앗제의 촬영을 호기심으로 관찰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각인되었는데, 느린 감광속도 탓으로 얼굴은 흔들려 마치 유령의 형체를 띄었다. 해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다는 자료사진의 본래 의도에서 벗어나 앗제의 현실은 초현실의 양상을 띄었다. 여기에서 사진 다큐먼트로서 생산된 앗제의 사진은 의도치 않게, 다큐먼트의 규범을 거슬렀다. 1910년, 브뤼셀에서 열렸던 사진국제회의가 규정한 다큐먼트 사진의 규범을 인용하면, 그것은 “여러 다양한 자연의 연구목적에 사용되어질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사진의 미적 아름다움은 부차적이다. 이미지는 아주 선명하며, 세부의 디테일이 잘 드러나고, 시간이 흘러도 손상되지 않도록 정성스레 처리되어야 한다.”


앗제의 ‘자료’사진이 베레니스 애보트 이후 예술사진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데는, 이렇게 앗제의 다큐먼트 작업에 비우호적인 양상들 때문이었다. 앗제의 사진은 작업의 목적과 생산의 본래 의도가 수용(reception)의 차원에서 현격히 변모된 전형적 예인 셈이다. 역사의 아이러니, 객관적 역사의 한계를 증언하는 구체적인 예인 셈이다.


사진의 목적과 용도를 지시하는 제목을 고려하지 않을 때는 위에 인용한 사진 역시 생산의도에서 확연히 이탈할 수 있다. 오늘날 사진예술, 사진미학에 길들여진 시선은 인용한 사진의 주제, 대상이 기이하게 매달린 구두들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 사진은 건축 보수업자 혹은 예술가의 작업을 보조하기 위해  2층의 철제 발코니를 ‘기록’한 것이었다. 진열창 위에 주렁주렁 매달린 구두들은 본래의 생산의도 속에서는 부차적이고, 의미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진‘작가’, 으젠느 앗제의 ‘작품집’ 속에 있는 이 사진에서 어느 누가 <발코니>를 유심히 살피겠는가.

- 최봉림


출처 : 사진예술


글 출처 : http://blog.naver.com/stagereal.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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