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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영화창고

남북 전쟁 위기 속에서 본 간첩 리철진 장진 시대를 연 영화

by 썬도그 2023.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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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남한과 북한이 전쟁 준비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강대강 국면으로 변한 남과 북. 내 50년 평생에 최악의 남북 상황이 2022년 2023년이 아닐까 할 정도로 남과 북은 연일 전쟁 훈련에 진심을 다하고 있습니다. 반공이 국가 기조였던 박정희 정권, 전두환 정권 때도 앞에서는 반공을 외쳤지만 뒤로는 북한과 손을 잡고 협상을 하고 협의를 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특히나 전 정권에서 평창 올림픽을 계기로 남북 정상 회담이 수차례 열렸던 것을 본 기억이 생생한 우리에게는 현재의 상황이 어리둥절한 상황입니다. 

러시아가 북한에게 핵 기술과 핵잠 기술 등등 북한이 바라던 전쟁 기술과 무기를 받는다면 한국은 앞으로 영원히 민족 통일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북한은 남조선이라고 하지 않고 대한민국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냐. 이제는 다른 나라라고 생각하겠다는 소리죠. 이제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평화모드가 되어 버렸네요. 

1999년 개봉한 장진 감독의 <간첩 리철진> 

간첩 리철진

넷플릭스에서 이리저리 영화를 고르다가  제대로 본 적이 한 번도 없는 <간첩 리철진>을 골랐습니다. 이 영화는 명절 때마다 수시로 틀어주던 영화였는데 듬성듬성 본 기억만 있고 처음부터 제대로 본 기억이 없네요. 장진 감독의 영화를 참 좋아했는데 이 영화는 초기 작품입니다. 

<기막힌 사내들>로 입봉 한 장진 감독은 서울예대 출신의 시나리오 작가였습니다. <개 같은 날의 오후>라는 뛰어난 한국 영화 시나리오를 썼던 감독이죠. 지금 봐도 <개 같은 날의 오후>는 상당히 뛰어난 그리고 현재는 이런 영화가 만들어지기 어렵다고 느껴질 정도로 당시에는 아주 진보적인 페미니즘 영화였습니다. 허구한 날 벗고 패는 한국 영화에서 이런 고급진 시나리오가 나오는 것이 놀랄 정도였죠. 어렴풋이 이 영화를 보면서 한국 영화가 변했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이 <간첩 리철진>부터 장진의 전성기가 시작됩니다. 2001년 <킬러들의 수다>, 2004년 <아는 여자>로 정점을 찍고 2005년 <박수 칠 때 떠나라>, 2006년 <거룩한 계보>까지 매년 엄청난 작품을 꾸준히 내놓지만 서서히 기력을 다 했는지 장진식 유머가 먹히지 않게 됩니다.  왜 감독들은 나이 들면 전성기 때의 영화를 못 만들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박찬욱, 봉준호, 이창동 같은 거장들이 달리 거장이 아닌 이유는 꾸준한 퀄리티를 보여주는 영화를 만듭니다. 아마도 이건 흥행 영화를 연출하는 감독들의 한계가 아닐까 합니다. 비극은 세계 공통어이고 시대를 타지 않지만 희극은 그 시대 그 당시 상황과 세대를 엄청 타거든요. 그래서 장진식 코미디 영화가 많이 나왔던 2000년대 중반이 한국 코미디 영화의 절정기가 아닐까 할 정도로 코미디 영화가 참 많이 나왔습니다. 물론 조폭 코미디라는 너무 한 방향으로 쏠린 영화들이 많았지만요. 지금은 한국 코미디 영화는 많이 만들지도 않고 크게 성공하지도 못하네요 <육사오>가 그나마 약간의 희망을 보였지만요. 

남북 화해 모드였던 시절에 나온 영화 <간첩 리철진>

간첩 리철진

요즘은 간첩 잡았다는 보도 없죠. 80년대는 <미래소년 코난> 보려고 기다리는데 갑자기 간첩 잡았다는 보도를 수시로 했습니다. 특별 편성해서 간첩 보도가 나오면 기분 잡쳤던 기억이 나네요. 그러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후에 남북 화해모드가 이루어졌고  역사상 최초의 남북 정상 회담이 2000년 6월에 개최됩니다. 이 영화는 그 한 해 전인 1999년 개봉합니다. 

이때만 해도 남북이 경제 협력을 하고 화해모드가 살짝 있었습니다. 사실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으로 남북 갈등은 극에 달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김대중 정부 이후 기류가 바뀌기 시작했죠. 이 김대중 정부 때는 남북정상회담을 하는 걸 보면서 전쟁 공포는 사라졌구나 했는데 놀랍게도 1999년 6월 1차 연평해전 남북정상회담 후인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전을 하던 그날 2차 연평해전이 일어납니다. 지금은 이해가 안 가지만 서해에서 분쟁이 일어났지만 남북정상회담을 하는 기이한 형태였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닙니다. 휴전선은 육지만 그어진 것이지 바다는 남북이 합의한 적이 없어서였죠. 그럼에도 국지전과 남북 화해가 동시에 진행되었던 시대였습니다. 

이 시기에 나온 <간첩 리철진>은 지금은 흔해 빠진 소재일 수 있지만 당시는 독특한 소재였습니다. 특히 고정간첩을 소재로 한 영화는 처음이 아닐까 하네요. 

슈퍼돼지 샘플을 가지고 오라는 명령을 받은 남파 간첩 리철진

간첩 리철진

간첩 리철진(유오성 분)은 북한에서 남한의 슈퍼돼지 샘플을 가져오라는 특명을 받고 남한에 침투합니다. 그러나 침투하자마자 동료를 잃고 혼자 남한에 도착합니다. 남한의 고정간첩인 오 선생(박인환 분)을 만나라는 지령을 받고 오 선생이 있는 곳으로 향합니다. 

간첩 리철진

그러나 택시 강도단을 만납니다. 이 택시 강도는 장진 사단이 되는 배우들이 조연도 아닌 단역으로 많이 출연합니다. 지금 보면 인기 스타들이 많지만 당시는 무명이 많았습니다. 이문식, 임원희 정재영, 정규수로 이루어진 이 택시 강도단을 만난 리철진은 들고 있던 가방을 털립니다. 거기에 무기와 돈이 있는데 이걸 몽땅 털립니다. 깔깔대고 웃게 만드는 장면이죠.  그렇게 남한의 매운맛을 본 리철진은 접선 장소에 가지 못합니다.  이 4명의 택시 강도단은 영화 출연 이후 인기를 끌어서 맥도널드 새우버거 CF도 찍습니다. 이왕 하는 김에 하자면 지금은 유명한 배우들이 참 많이 나옵니다. 유해진이 깡패로 나오고 신하균이 오 선생의 고등학생 아들로 손현주가 선생님으로 잠시 나옵니다. 

간첩 리철진

한편 오 선생은 한강 다리에서 리철진을 기다립니다. 그때 누군가가 오자 암호문을 읊죠. 그런데 이 사람이 리철진이 아닌 자살하러 온 사람이라서 그냥 뛰어내립니다. 이 영화의 핵심 코미디는 초반에 다 나옵니다. 이런 톤으로 끝까지 가면 좋은데 초반에 이 부조리한 상황극이 몽땅 나오고 후반으로 갈수록 재미는 쭉쭉 떨어지네요. 2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보니 어설픈 구석이 꽤 많습니다. 만듦새가 아주 좋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소재는 지금 봐도 신선하네요. 

남파 간첩 리철진의 남한 생활 적응기

간첩 리철진

오 선생에게 모든 것을 말한 리철진을 오 선생은 북으로 가라고 합니다. 남파 간첩도 생활고를 겪고 있다는 설정도 흥미롭네요. 리철진이 보내온 공작 자금으로 밀린 사무실 월세를 내야 하는데 다 털렸다니 허탈하죠. 그럼에도 리철진을 받아들인 오 선생은 슈퍼돼지 샘플을 받으려면 연구소에 방문할 시기가 있는데 그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조용히 지내라고 합니다. 

간첩 리철진

리철진은 오 선생의 딸 화이(박진희 분)의 부탁등으로 한국 사회 적응을 하는데 흔하게 사용하는 북한 말투와 남한 사정을 전혀 모르는 설정은 싹 걷어냈습니다. 철저하게 훈련을 받고 내려와서 남한 말과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설정이 진일보한 간첩 설정으로 당시에도 호평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리철진은 은행에 갔다가 몸이 기억하는 무술로 은행 강도를 때려잡습니다. 이외에도 남파 간첩이었지만 배신을 한 동료를 남한에서 쏘라는 명령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은 당시의 상황을 잘 담았습니다.  

간첩 리철진

잘 기억나지 않으실 수도 있고 모르시는 분도 많겠지만 제가 충격적으로 느낀 사건이 19997년 2월 15일 일어난 귀순자 이한영이 권총으로 피격당해서 사망한 사건입니다. 이 당시 북한의 주체사상을 만든 황장엽 북한 노동당 비서가 귀순한 이후 북한이 독이 올라 있는데 이 때문인지 김정일의 처조카인 1982년 귀순해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언론에 노출되면서 고정간첩에 의해서 권총을 맞고 사망합니다. 

간첩 간첩 말로만 들었지 실체를 몰랐는데 북한이 지령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무서웠던 기억이 나네요. 이걸 소재로 해서 남파된 간첩 리철진이 자신의 동료를 죽이고 난 후 괴로워서 술을 진탕 먹고 경찰서에서 내가 간첩이라고 하는 장면도 이 영화가 부조리 상황 코미디임을 잘 보여줍니다. 동시에 남북한 갈등과 현주소를 잘 담고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장면은 간첩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정치나 정권의 흐름에 따라서 가볍게 여겨지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마치 북한판 실미도 같다고 할까요?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잘 만든 영화라고 하기엔 엉성한 면들이 많네요. 신선한 소재, 재미있는 상황 등등 볼만한 요소가 많고 1999년 당시의 남북 관계를 어느 정도 잘 담고 있지만 투박한 면도 많네요. 

간첩 리철진

마지막 장면에서 간첩 신고하면 1억을 받을 수 있다는 국정원 신고 홍보 포스터를 보고 1억이면 어떤 돈이냐고 물으니 서울 변두리 조그만 아파트나 괜찮은 외제차 1대라고 말하는 장면은 당시 물가를 잘 담은 대사입니다. 지금은 1억 가지고 서울 아파트 못 사죠. 변두리 아파트도 5억이 넘는데요. 반면 외제차는 당시는 1억이 넘었을 수도 있지만 지금은 BMW 5시리즈가 7천부터 살 수 있어서 오히려 내려간 느낌입니다. 

그냥저냥 볼만한 영화 <간첩 리철진>이지만 엄청난 재미는 없네요. 그래도 당시는 꽤 인기 높았던 영화이자 한국 영화가 이렇게 소재가 다양해지는구나 느끼게 해 준 한국 영화 제2의 르네상스의 한축을 담당하는 영화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 1999년은 영화 <쉬리>도 나온 해여서 북한 소재 영화들이 꽤 많이 나왔고 <쉬리>는 한국 영화의 제2의 전성기 시작을 알리는 영화이기도 했습니다. 

영화 <간첩 리철진>이 나오던 시기는 남북 화해 모드 또는 느슨한 관계였지만 이제는 핵전쟁 걱정하는 시대가 되었네요. 마치 영화속 리철진이 갑자기 남북 화해 모드로 인해 혼란스러워하는 모습과 4년 전 남북 종전 협정을 넘어서 남북 화해 모드가 될 줄 알았지만 이제는 매일 미사일 테스트하고 핵 미사일 날아올지 모르는 공포속에서 살고 있네요. 이는 영화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현재의 모습과 리철진의 모습이 살짝 오버랩이 되네요. 

별점 : ★★★
40자 평 : 간첩을 통해서 유쾌한 비극을 당시로서는 세련된 시나리오로 잘 담은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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