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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영화창고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다 보고 생각해볼 것들

by 썬도그 2023.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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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뜩이나 하루하루가 우울한 요즘 세상인데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를 봐야 하냐 고민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네 추천 안 합니다. 우울한데 더 우울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슬픔을 위로해 주는 건 기쁨이 아닙니다. 슬픔은 더 큰 슬픔으로 치유되거나 같은 슬픔을 가진 사람의 어깨 위해서 녹아내립니다. 

저도 보면서 우울해져서 한숨이 자주 나왔는데 그 긴 한숨이 영화가 끝난 후에도 다시 꼽씹어보게 하는 매력이 있네요. 감히 말하지만 <오펜하이머>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더 재미있었습니다. 그래서 <콘크리트 유튜피아>를 다 보고 나서 드는 제 생각들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영화에 대한 스포가 있을 수 있으니 참고하세요. 이 글은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읽을 것을 권해드립니다. 

민주주의의 축소판인 아파트가 안고 있는 의사결정의 문제점

콘크리트 유토피아

이렇게 입으면 기분이 조커든요의 X세대가 20대였던 90년대 초반에도 기성세대는 소속 집단보다 개인의 이익만 생각하는 이기주의를 극렬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그건 일부의 이야기고 당시 20대인 지금의 40,50대들은 이기주의자들이 아니였습니다. 여전히 한국이라는 거대한 군대에 소속된 집단이 우선인 사고방식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지만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참 구분들을 못합니다. X세대가 추구한 건 개인주의이지 이기주의가 아닙니다. 식당가서 주문하면 빨리 나온다고 메뉴 통일을 하는 것이 아닌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주문하는 것이죠. 그러나 모두의 이익 즉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개인주의는 쉽게 묵살되었습니다. 그래서 메뉴 통일해서 먹고 빨리 올라가서 오후 근무를 시작하는 집단 이익이 개인 이익보다 우선시되었습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상상도 못하는 행동이죠. 그러나 동북아 3국인 중국, 일본, 한국은 나보단 우리라는 개념이 강한 나라들입니다. 그럼 아파트는 개인일까요? 집단일까요?

콘크리트 유토피아

아파트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집단의 성향이 아주 아주 강합니다. 아파트 같이 개인이 다수가 사는 곳을 공동 주택이라고 하죠. 공동 주택은 많은 사람들의 의견 충돌이 있고 이걸 조율해야 합니다. 그래서 부녀회와 동대표와 아파트 주민 대표가 존재합니다. 이들은 수많은 아파트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수집하고 이걸 바탕으로 어떤 결정을 해야 합니다. 

이 결정은 다수결이 원칙입니다. 얼마나 강력한지 아파트 재건축이나 재개발을 할 때 그 지역에 사는 주민의 3분의 2가 찬성하면 3분의 1이 반대해도 개발이 진행될 수 있습니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도 이런 모습이 잘 드러나죠. 아파트 주민들이 모여서 반상회를 통해서 황궁 아파트를 무시했던 신축 아파트인 드림 팰리스 주민들이 위주로 된 외부인들을 바둑알 투표를 통해서 내보냅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이런 결정에 반대를 한 박보영이 연기하는 간호사 명화가 있습니다. 명화를 고구마 캐릭터라고 하는 분들도 있지만 반대 의견을 냈다고 고구마라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다만 말만 그렇지 솔선수범하지 않고 소극적인 것을 지적하는 분들이 많지만  솔직히 우리는 다들 명화같지 않을까요? 남의 일에는 감 놓아라 대추 놓아라라고 입바른 소리, 올바른 소리를 하지만 그 일이 내 일이 되면 뒤로 숨고 침묵을 합니다. 명화가 그런 인물이죠. 

물론 명화의 속마음은 그럼에도 같이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고 실제로 자신의 음식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줍니다. 그리고 좀 더 적극적인 반대를 펼치는 사람이 도균입니다. 그러나 도균은 외지인들을 숨겨주면서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켜나갑니다. 다만 그걸 드러내놓고 하지는 못합니다. 드러냈다가는 맞아 죽을 수도 있고 실제로 이병헌이 연기하는 영탁에게 발각되어서 외지인들은 내쫓기고 집단 구타를 당합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제가 개인주의 이기주의를 서두에 한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도균은 다수결을 따라서 외지인들을 내쫓지 않았지만 대신 자신의 음식을 나누면서 자신의 신념을 지켰습니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이 진리가 아닙니다. 다수결에 의해서 소수가 희생되는 것을 당연한 것이 아닌 소수의 의견도 존중해야 민주주의가 제대로 굴러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성애자가 다수라고 해서 이게 옳다고 할 수 없습니다. 동성애자가 사회에 큰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면 소수자인  그들의 성정체성도 존중해 줘야죠. 민주주의에 의해서 탄생한 아파트 대표인 영배는 훌륭한 리더는 아니였습니다. 다수결의 화신이 되어서 소수를 구타했습니다. 이건 민주주의 빙자 전체주의이자 독재입니다. 

영배가 좋은 리더자라면 외지인들이 사는 것을 발견했어도 융통성을 발휘해서 주민들을 설득해서 외지인들의 음식은 도균에게 분배된 음식 안에서 해결하는 선으로 타협을 했어야 합니다. 민주주의의 꽃은 다수결이 아닙니다. 대화와 타협입니다. 현재 한국 정치가 개판이 된 이유는 대화와 타협이 아닌 악감정만 가득한 다수결의 정치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거짓말 안 하고 박정희나 노태우 정권 때보다 현재의 정치가 더 더럽고 추잡하고 역겹습니다. 대통령과 야당 대표가 회동을 통해서 꽉 막힌 정치 현안을 서로 주고받으면서 나아가야지 서로 멱살만 잡거나 아는 척도 안 하고 대화 한 마디도 안 하고 서로 벌레 보듯 하는 것이 민주주의 정치하고 할 수 있을까요? 

선거 민주주의의 폐해를 보여준 영탁과 부녀회장

콘크리트 유토피아

민주주의 최대 장점이자 단점은 선거입니다. 선거를 통해서 국민의 의견을 대신하는 국회의원과 대통령을 뽑아서 가장 현명한 지도자를 선택합니다. 또한 한국은 재선을 할 수 없어서 대통령은 최대 5년밖에 못합니다. 그러나 선거가 항상 가장 현명한 판단의 합의일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전직 대통령을 통해서 선거로 뽑은 대통령들을 감옥에 참 열심히 보냈습니다. 이런 걸 보면 한국인들의 대선 성공률은 낙제 수준입니다.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라는 전두환 독재 정권 이후에 총 6명의 대통령 중 무려 3명을 감옥에 보냅니다. 감옥에 갈만큼의 큰 잘못을 저지른 대통령을 뽑았습니다. 물론 그런 사람인지 모르고 뽑았고 대통령이 된 후에 저지른 잘못이라고 해도 사람 볼 줄 모르는 것도 죄라면 죄이죠. 그 잘못된 대통령으로 인한 고통은 선거를 한 국민에게 오는 것뿐 아니라 선거권이 없는 아이들에게도 더 나아가 국가 흥망성쇠에까지 영향을 줍니다. 

선거는 독재자를 막을 수 있지만 선거로 당선된 대통령과 국회의원이 잘못된 행동을 해도 막을 방법이 거의 없습니다. 탄핵에 성공한 놀라운 나라이지만 지금은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기 쉽지 않습니다. 대통령이 5년 동안 폭정을 해도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 선거 민주주의의 문제점입니다. 이에 몽테스키외가 만든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라는 삼권을 분리해서 서로 견제하게 하는 아주 정교한 정치 시스템이 작동해서 이 선거 민주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하려고 하지만 입법부가 행정부 수장인 대통령의 거수기가 되고 입법부 중 일부가 대통령의 뜻을 받들게 되면 이런 견제 시스템도 허물어지게 됩니다. 

이미 우리는 사법농단을 통해서 사법부와 행정부가 붙어 먹는 걸 지켜봤고 현재는 입법부의 총선에 행정부가 개입하려는 모습이 자주 많이 보이고 있네요. 

콘크리트 유토피아콘크리트 유토피아

<콘크리트 유토피아>을 들여다 보죠. 영탁은 주민들의 다수결에 의해서 선발된 아파트 대표입니다.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죠. 이 영탁은 초반에 아주 솔선수범하는 아파트를 위해서 태어난 사람처럼 보입니다. 아파트 주민들의 먹거리를 위해서 결사대를 만들어서 식료품과 생필품을 가져옵니다. 훌륭한 리더입니다. 그러나 이 리더가 변하게 되면 아파트 전체가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영탁은 그럴 필요까지 없는데 식료품 가게 주인을 때려눕힙니다. 손발만 못 쓰게 해도 되고 대화로 협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총을 겨누고 있는 상황이라고 하지만 식료품을 제공해 주면 아파트에서 같이 살게 해 주고 후한 대접을 해주겠다고 설득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게 서로에게 좋을 수도 있죠. 힘으로 이길 수 없다는 걸 아는 식료품 주인도 가족이 있고 하니 아파트라는 성으로 들어가는 게 낫다고 생각할 겁니다. 이게 정치입니다. 대화와 타협이죠. 

콘크리트 유토피아

그러나 타협할 생각을 안 합니다. 물론 총을 먼저 쏜 식료품 가게 주인이 먼저 폭력을 썼다고 하지만 영탁의 행동대장이 된 박서준이 연기하는 민성이 뒤에서 제압하는 걸 보면 전체적으로 아파트 주민들이 아파트 주민들만 인간이고 다른 사람은 바퀴벌레로 보는 배타성이 기본 태도인 듯 합니다. 영탁이 아파트 대표가 된 것이 외지인 내보내려고 만든 투표에서 태어났으니 애초부터 배타성이 몸에 밴 사람들 같네요. 아쉽지만 식료품 주인을 때려눕히고 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과도한 폭력을 누구 하나 말리지 않습니다. 이때 영탁은 광인이 되어갑니다. 폭군이 되어가고 결국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자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살인까지 합니다. 영탁이라는 이름도 살인을 하고 얻은 이름이기도 하죠.

콘크리트 유토피아

이런 독재자가 되고 폭군이 된 영탁을 막기 위해서 영탁의 과도한 폭력을 견제했어야 합니다. 그래야 더 미치지 않게 하죠. 그러나 민성은 그걸 보고도 살기 위해서 눈을 감습니다. 아내가 살인까지 하냐는 말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외지인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다 걸린 아내를 살기 위해서 독재자가 된 영탁 바지를 잡고 싹싹 빕니다. 

영탁의 힘이 커지면 그걸 견제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걸 부녀회장이 했어야 하지만 오히려 훌륭한 동조자가 되죠. 자기 아들이 다치고 왔다는 것에 분노할 뿐 사람들을 품는 포용심은 없습니다. 결국 바퀴벌레라고 하던 외지인들에게 문을 개방해 준 것이 보급을 받다가 말다툼을 한 한 주민이라는 점은 민주주의는 포용심이라는 성벽으로 이루어진 것이지 혐오와 반목과 갈등 속에서 쉽게 무너지는 것을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민주주의는 바른말하는 문화 속에서 건강해집니다. 그래서 미국이 세계 최고의 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건 언론 덕분이라고 하잖아요.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정부와 대립을 하면 반 대한민국 세력이라고 프레임을 싸는 것은 나라를 망치는 지름길입니다. 

대단히 한국적인 문화와 욕망을 잘 담은 <콘크리트 유토피아>

영화는 공감을 잘 끌어내느냐 못하느냐에 따라서 관객이 영화 속 캐릭터에 몰입하느냐 아니면 방관자가 되느냐가 갈립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내 이야기라는 생각이 확 듭니다. 이는 여러 소품으로 관객을 확 끌어들입니다. 먼저 황도입니다. 황도는 어렸을 때 아플 때 먹었던 기억이 많고 병문안 갈 때 많이 사갔습니다. 지금도 그때 추억하면서 먹기도 합니다. 

또 하나는 번데기입니다. 외국인들이 극혐 하는 한국 음식 1위에 번데기가 많이 오르죠. 번데기 통조림 하나 얻고 좋아하는 민성과 함께 번데기 통조림으로 사람을 때리는 모습은 지극히 한국적입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콘크리트 유토피아

여기에 아파트가 집이자 자산인 독특한 한국 문화로 인해 집을 지키자는 주거지를 넘어서 내 재산을 지키자라는 거대한 욕망으로 피어올라서 외지인을 배척하는 모습으로 진화됩니다. 아파트 가격 올리려고 기를 쓰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우리들이죠. 이 집에 대한 애착이 영끌로 표현됩니다. 원작에 없던 신혼부부가 젊은 나이에 아파트가 전세가 아닌 자가라고 하니 사람들이 의심하는 눈초리로 보는데 이에 민성은 영끌이라는 한마디로 이해시켜 줍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대사는 사기당한 영탁이 자신의 집에 사는 진짜 영탁을 죽이고 차지한 집에서 죽어갑니다. 그때 바퀴벌레라고 하는 외부인들이 신발을 신고 들어오자 남의 집에 신발 신고 들어왔다고 화내는 모습은 집에 대한 애착이 얼마나 심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반면 영탁의 실체를 알고 있는 옆집 사는 혜원이 신발 신고 집을 돌아다니자 꼰대처럼 집에 대한 애정이 없다고 타박하기도 합니다. 

영탁의 집에 대한 집착은 영화 처음부터 등장합니다. 아파트 저층에서 화재가 나자 자기 집도 아닌데 불을 끕니다. 이에 부녀회장이 불난다고 아파트 안 무너진다고 말하지만 영탁은 그 불로 인해 자기 집도 무너지거나 탈까 봐 목숨 걸고 끕니다. 

아파트라는 하나의 부락

원시시대에는 부락 단위로 살았죠. 부락끼리 협력하기보다는 경쟁을 하고 같은 인류지만 다른 종류는 전쟁을 통해서 멸족시켜 버립니다. 이는 이미 많은 동물 세계에서 현재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먹고 먹히고 살기 위해서 전쟁을 하기도 합니다. 다만 동물은 살기 위해 싸우지만 인간은 욕심 때문에 필요 이상의 전쟁과 살인을 합니다. 그렇게 전리품을 가져오는 날이면 온 부족들이 나와서 춤을 추고 노래를 합니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이 영탁이 아파트를 부르면서 원시인들이 모닥불을 켜놓고 춤을 추는 모습이 마치 원시인들 같아 보이더라고요. 

아파트는 하나의 운명 공동체이자 이익 공동체로 하나의 부락과 비슷합니다. 황궁 부락, 드림 팰리스 부락이 대재난 전에는 서로 반목하다가 대재난이 일어나자 드림 팰리스 주민을 내쫓습니다. 부락 전쟁은 전국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기에 이름 전쟁도 심하죠. 뭔 아파트 이름이 팰리스에 캐슬입니까? 온갖 발음도 어려운 외국 이름 때려 넣어서 가치를 올리려고 하지만 그 자체가 천민자본주의를 보여주는 행동입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원시 시대로 돌아간 우리들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원시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영화 마지막에 새로운 부락을 보여주면서 황궁 아파트의 공동체가 유일한 해답도 정답도 아님을 보여줍니다. 

돌아보니 더 좋은 영화였습니다. 볼 때는 마음이 무거웠지만 우리 세상을 스크린이라는 거울을 통해서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아주 좋은 영화입니다. 안 보신 분들에게 추천하는 좋은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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