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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향기/문화정보

유쾌하고 묵직한 전시회 크지슈토프 보디츠코의 기구, 기념비 프로젝션

by 썬도그 2017.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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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많은 미술전시회들이 매일 같이 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전시회들은 대부분 어둡거나 경건한 전시회가 많습니다.
이런 미술전들은 묵직한 맛은 좋지만 다 보고 나오면 길게 기억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쾌하면서도 메시지의 묵직함이 좋은 전시회가 있습니다. 바로 '현대미술관 서울관' 지하에서 전시되고 있는 크지슈토프 보디츠크의 <기구, 기념비 프로젝트>전시회입니다. 


전시회는 7월 5일부터 10월 9일까지 아주 긴 시간 전시하니 천천히 방문하셔도 됩니다. 아시죠?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오후 6시 이후에는 무료로 관람할 수 있습니다. 


크지스토프 보디츠코 전시회는 5관에서 전시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발음도 어렵고 타자도 어려운 '크리슈토프 보디츠코'를 저를 포함 대부분의 분들이 모르실겁니다. 그런데 이분 해외에서 꽤 유명한 분입니다. 

1943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난 보디츠코는 바르샤바 예술대학을 졸업했습니다. 당시 폴란드는 공산국가여서 예술을 편하게 할 수 있는 나라는 아니였습니다. 산업디자이너로 근무하다가 1977년 캐나다로 이주한 후 1980년대부터 뉴욕, 슈투트가르트, 카셀에서 사회 비판적 메시지를 담은 다양한 작품을 발표합니다. 

전시회에 들어서면 큰 스크린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영상 작품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영상 작품들은 보디츠코가 아픔이 깃들어 있는 도시를 방문해서 여전히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시도한 후 그 영상 또는 음성을 기념비나 고통의 공간에 투영하는 영상물입니다. 

예를 들어 원폭 투하로 많은 사망자가 생겼고 지금도 그 고통 속에 살고 있는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들의 증언을 채집한 후 기념비적인 건물과 함께 보여줍니다. 이 비디오 프로젝션은 한국에서도 했는데 글 말미에 소개하겠습니다. 



<수레 - 연단. 1977~79년>

크지슈토프 보디츠코는 소수자, 억압받은 자, 고통받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경청합니다. 이런 사회 소수자들에게 발언권을 주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수레 - 연단이라는 작품으로 아주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연단에 서서 말을 하면 그 말에 의해 수레가 앞으로 전진을 합니다. 




이렇게 말이죠. 사회적 발언권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퍼포먼스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노숙자 수레, 1988 ~ 89년>

이 작품이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입니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노숙자들은 폐지나 공병들을 팔아서 근근히 먹고 살고 있습니다. 노숙자들은 쉬고 잘 곳이 없어서 노숙자라고 하죠. 보디츠코는 이런 사회적 약자들에게 관심이 참 많은 사람입니다. 

보디츠코는 노숙자들이 수레를 끌고 다니는 것을 보고 이 노숙자 수레를 만들었습니다. 


노숙자 수레 하단에는 폐지나 공병을 넣을 공간을 마련하고 앞에는 원뿔형 세수대야가 있습니다. 빗물이나 수돗물을 받아서 여기서 세수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수레는 잠을 잘 수 있는 침대가 됩니다. 비를 막을 수 있게 가림막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노숙자에게 보급하려고 만든 작품은 아니고 우리 주변에 있는 노숙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사회적인 환기가 예술의 목적 중 하나인데 그 목적에 충실한 작품입니다. 

최근 서울대학교 한 동아리가 폐지 줍는 할아버지 할머니이 끌고 다니는 리어커 옆에 광고판을 달아서 광고 수익을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돌려주는 캠페인을 하는데요. 전 그것도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술이 벌거인가요? 지금보다 나은 세상을 지향하면 모든 것이 예술이죠. 



<자율 방범차. 1991년>

이 작품도 노숙자를 위한 작품입니다. 노숙자들은 사회적으로 배제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존재를 거의 느끼려고 하지 않조. 보디츠코는 사회적으로 배제된 노숙자들에게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자율 방법차를 만듭니다. 모슨 로봇 같이 생긴 차에 타서 사주 경계를 하면서 지역 사회의 방범차 역할을 합니다.  물론, 실용성과는 무관합니다. 다만 이 작품을 통해서 일반인들이 노숙자들에 대한 관심과 환기를 위한 목적입니다.



<외국인 지팡이. 1992년>

보디츠코가 이렇게 소외된 사람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그 자신이 동유럽에서 이민을 온 이민자이고 이민자의 삶이 소외의 삶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다양한 작품을 통해서 이민자 같은 소수자들에 대한 관심을 유발합니다.

선지자의 지팡이 같이 생긴 '외국인 지팡이'를 들고 이민자가 거리를 활보하면 사람들이 쳐다 보겠죠. 그런 관심을 유도하는 작품입니다. 


<수레, 1971 ~ 73년>

이 작품도 재미있습니다. 이 수레는 저 위에 올라서 걸으면 수레가 움직입니다. 


걸을 땐 뒷짐이 필수(?)입니다. 사색을 할 수 있는 걷기와 탈 것의 바퀴가 만났네요. 어떻게 보면 비효율적인 도구입니다. 이 작품은 1970년대 기술 낙관주의가 만연하자 보디츠코가 이런 기술 낙관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서 만들었습니다. 

기술에 삶이 잡아 먹힌 현세태가 떠오르네요.



이렇게 '크지슈토프 보디츠코'는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잘 담는 작가입니다. 전 이런 작가가 좋더라고요. 사회적 비판의 목소리를 담고 우리가 놓치고 지나가는 존재들 그러나 꼭 기억하고 보듬어야 할 존재들을 환기하는 작가들이 좋습니다.

그래서 전 보디츠코 작가가 너무 좋습니다. 


<나의 소원>

보디츠코는 한국에 도착한 후 한국을 위한 '나의 소원'이라는작품을 만들었습니다. 보디츠코는 한국에 도착한 후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위인을 찾아봤습니다. 이순신을 떠올렸으나 전쟁을 너무나도 싫어해서 이순신 장군은 배제했습니다. 그러다 탈북민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이 나라가 분단국가임을 인식합니다.

이후 보디츠코는 남한과 북한 모두에서 인정을 받는 위인을 찾아보다가 '김구' 선생님을 알게 됩니다. 김구의 '나의 소원'을 다 읽은 보디츠코는 김구 동상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위에 성소수자, 탈북자, 세월호 유족 등등 한국에서 소외 받고 사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촬영한 후 김구 동상 얼굴에 맵핑을 합니다. 마치 김구 선생님의 몸을 통해서 소수자들의 주장을 듣는 느낌이네요. 

솔직히 너무 기발해서 감탄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정말 대단한 예술가입니다.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담고 퍼올리는 그 기품하며 기발한 아이디어하며 이 작가분의 팬이 되어버렸습니다. 유쾌한 발상 속에서 묵직한 메시지를 담는 능력이 탁월하네요

시간 나실 때 현대미술관 서울관 지하에 들려보세요. 아주 근사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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