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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영화창고

바다와 같은 사랑이 넘실거리는 따뜻한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

by 썬도그 2015.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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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이름만 보고 보는 영화가 점점 줄고 있습니다. 그만큼 요즘 작가주의 영화들이 많지가 않네요. 그럼에도 그 감독이 만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보는 감독이 있습니다. 그중 한 명이 '고레에다 히로카즈'입니다.

그의 영화를 처음 보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우연히 개봉한 지 수년이 지난 '아무도 모른다'라는 영화를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런 감수성을 가진 감독이 또 있었나? 마치 '이와이 슌지' 감독을 다시 만난 듯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세계에 풍덩 빠졌습니다. 그렇게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과 '공기인형',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연달아 보면서 이 감독의 뛰어난 스토리텔링에 녹아 버렸습니다.

히로카즈 감독은 일상에서 반짝이는 보석을 잘 잡아내는 감독입니다. 또한, 최근의 영화들을 보면 성선설을 믿는 감독인지 아이들의 순수하고 맑고 다부진 모습을 통해서 저 같은 세상의 때가 덕지덕지 묻은 어른들을 반성하게 하는 영화들을 잘 만듭니다.

그가 이번 겨울 또 한 편의 따스한 영화를 들고 한국을 찾아왔습니다.


아름다운 바닷가 마을을 배경으로 자라는 네 여자의 성장기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만화가 원작입니다. 만화를 보지 않았지만 그림체가 너무 예뻐서 사서 보던 빌려서 보던 꼭 다 읽어 보고 싶습니다. 6권짜리 만화책으로 알고 있는데 이 만화의 내용을 영화에 다 녹여냈다고 하네요. 만화 원작은 에피소드 위주이고 4명의 여자들이 각각의 개성을 담고 있지만 영화는 시간 때문인지 4명의 주연 모두에게 집중하는 모습은 아니고 첫째와 막내에 좀 더 초점을 맞춥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파도 소리가 살랑거리는 집에서 둘째 요시노(나사사와 마사미 분)가 남자 친구와 함께 자고 있습니다. 전화 소리에 깬 둘째는 남자 친구에게 돈을 빌려주고는 집으로 향합니다. 요시노가 사는 집은 첫째 사치(아야세 하루카 분)와 셋째 치카(카오 분)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첫째인 사치는 고등학교때 아버지가 바람을 피고 집을 나간 후 어머니도 집을 떠나서 할머니 밑에서 소녀 가장 노릇을 한 실질적인 이 집의 가장입니다. 두 동생을 키우면서 일찍 철이 들었습니다. 3명의 여자만 사는 오래 되었지만 큰 집은 여자 기숙사 같습니다. 둘째인 요시노와 사치가 티격태격 하지만 형제 간의 우애가 깊어서 항상 화목하고 웃음 꽃이 핍니다.

사치가 동생 요시노를 아침 일찍 부른 이유는 15년 전 바람 피고 떠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첫째 사치는 바람피고 집을 나간 아버지도 숨막히는 집에서 살기 힘들다면서 자식들을 두고 떠난 어머니도 다 미워합니다. 두 부모가 떠난 자리를 사치 혼자 그 빈자리를 다 매꾸어야 했습니다. 

가도 안 가도 상관 없는 장례식장이었죠. 그렇게 두 여동생만 아버지 장례식에 보내지만 


사치는 야간 근무를 마치고 못난 아버지 장례식에 도착합니다. 그러나 동생들이 아버지는 다정다감했다는 말에 다정다감했지만 한심스러웠다고 쓴소리도 내뱉죠. 그렇게 아버지 장례식을 마치고 나오는데 한 소녀가 따라 나옵니다. 아버지가 남긴 유품이라면서 세 딸의 어린 시절 사진을 전해줍니다.

그 소녀는 아버지가 재혼해서 낳은 스즈(히로세 스즈 분)라는 여중생입니다. 어떻게 보면 스즈의 엄마와 자신들의 아버지가 눈이 맞아서 자신들에게 큰 시련을 준 엄마의 딸이라서 거북한 관계를 넘어 충분히 미워할 만한 사이입니다. 그걸 스즈는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런데 이 세 이복 언니들, 특히 첫째 사치는 그런 스즈에게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발견하고 손을 내밉니다.

"우리와 같이 살지 않을래?"


바닷마을에서 펼쳐지는 네 여자의 아름다운 풍경

그렇게 네 여자는 한 가족이 됩니다. 스즈가 쉽게 이 이복 언니들과 함께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엄마는 일찍 죽고 아버지마저 죽은 후에 또 다른 이복 동생과 새 엄마와 사는 것이 쉬워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존재 자체가 상처인 사람들인 이복 언니들과 함께 사는 것도 쉽지 않았죠. 어디를 가나 자신은 환영 받지 못하는 존재이지만 사치 언니가 내민 손을 덥석 잡습니다.

일찍 철이 든 스즈는 오래된 집에서 아주 활달하게 지냅니다. 축구부에 가입해서 남자 친구들과 함께 축구를 하면서 즐겁게 보내죠. 영화는 이 네 명의 여자들이 펼치는 일상의 소소함을 아무 꾸밈 없이 다큐식으로 천천히 보여줍니다. 

첫째 사치의 강인함과 어른스러움과  부모에 대한 깊은 원망, 둘째 요시노가 술과 남자를 좋아하고 꿍하지 않고 쿨한 성격, 셋째 치카가 독특한 취향 그리고 스즈의 밝고 건강한 미소가 봄날 오후 햇살에 널어 놓은 빨래에 반짝이는 빛처럼 아름답게 펼쳐집니다.

한 편의 수채화 같았습니다. 정말 영화 제목처럼 여자들의 일기장을 훔쳐 보는 듯한 느낌이 들더군요. 이는 이 영화의 매력이자 지루함일 수 있습니다. 저 같이 일상에서 보석을 발견하고 일상의 소중함을 잘 느끼는 사람에게는 이 네 여자들의 별 사건 사고 없는 풍경 자체를 즐길 수 있지만 큰 사건 사고도 없이 그냥 물 흘러가는 모습만 보여주는 듯한 모습은 살짝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매실 주를 담그는 것에서도 즐거움을 느끼실 수 있는 분이라면 이 영화가 잔잔하면서 큰 여운을 남기는 영화로서 적격이지만 맵고 짜고한 자극적인 영상이나 사건 사고 같은 스토리 위주의 영화를 원한다면 이 영화가 상당히 지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 관람객을 보니 80%이상이 여자 관객이고 남자 관객은 극소수네요. 

전작인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가 아빠를 위한 영화라면 이 영화는 엄마 또는 자매들을 위한 영화가 아닐까 할 정도로 섬섬옥수 같은 터치로 네 여자가 사는 집을 중심으로 일상의 찬란함을 잘 담고 있습니다. 

지브리 영화 같다는 생각이 참 많이 드는 영화입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영화는 악인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 영화에도 악인이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각자 자기 위치에서 반짝이는 모래알 같은 사람들이죠. 그게 참 좋았습니다. 인위적으로 악을 창조해서 주인공들을 선하게 만드는 히어로물의 대척점에 있는 영화죠. 



아버지라는 이름이 상처가 되는 첫째와 막내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영화 중간에는 이 영화가 무엇을 말하려는 지 모를 정도로 그냥 평범한 여자로만 구성된 가족의 일상만 보여줍니다. 그러나 후반의 한 방이 서서히 수면위로 올라옵니다. 아버지가 죽고 떠났던 어머니가 이 네 자매를 찾아옵니다. 예상대로 첫째 사치는 그런 어머니가 너무나 미워서 데면데면합니다. 반면 둘째와 셋째는 어머니를 반갑게 맞아주죠. 

스즈는 자신의 존재가 세 이복 언니들에게 피해를 줄까봐 그 자리를 피하겠다고 합니다. 워낙 주눅든 삶을 살아서 그런지 스즈는 웃을 때 말고는 자신감이 떨어진 표정을 하고 삽니다. 어려서부터 고생을 하고 자라서인지 눈치가 빠른 것이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버렸습니다. 어른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이야기인데 히로카즈 감독 영화는 항상 불완전한 어른과 완벽한 아이들이 나옵니다.

도덕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어른 보다 더 어른다운 아이들이 나오죠. 첫째 사치와 막내 스즈는 같은 고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려서 두 부모를 잃었다는 것과 함께 자신의 존재가 죄스러운 존재라는 것 그리고 어린 나이에 필요 이상의 많은 고통과 눈치를 봐야 했습니다.  둘째 요시노가 스즈의 발톱에 메뉴키어를 발라 주는 모습은 스즈의 웃음 뒤에 숨겨진 고통을 담고 있습니다.

그 나이가 되도록 한 번도 메뉴키어를 발라 본 적이 없었던 스즈는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과거라고 해봐야 아버지 이야기인데 아버지는 이복 언니들에게는 고통의 이름이니까요. 그래서 아버지를 숨기고 엄마에 대한 이야기는 아예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합니다. 그런 스즈를 이복 언니들이 서서히 품어줍니다

특히 첫째 사치와 막내 스즈는 삶의 패턴과 진동이 비슷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두 사람은 형제지만 엄마와 딸의 느낌으로도 많이 다가오네요. 



진폭은 크지 않지만 멀리 까지 퍼지는 감동의 파장이 느껴진 '바닷마을 다이어리'

큰 감동이 뚝뚝 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사건 사고도 별로 없습니다. 맑은 햇살만 가득한 영화입니다. 그러나 작은 구김이 잠시 펼쳐 보이는 마음과 그 마음을 보듬는 따스한 마음에 가슴이 크게 진동을 했습니다. 언니들 앞에서 웃고는 있지만 죽은 아버지 이야기도 엄마 이야기는 입에서 꺼내지도 못하는 스즈는 상처를 꽁꽁 싸매고 삽니다. 

그런 스즈를 세 언니들의 품는 과정이 아름답게 펼쳐집니다. 영화를 보면 보통 영화관 안에서 감정을 다 쏟아내고 나오는데 이 영화 이상합니다. 덤덤하게 약간의 상기된 얼굴로 나왔는데 이 영화의 감독은 영화를 본지 6시간이나 지난 지금도 그 울림이 제 몸에서 나가지 않네요. 진폭은 크지 않지만 멀리 퍼지는 물결이 주기적으로 절 흔들어 놓습니다.

아마도 세 언니의 온돌과 같은 따스함이 아직도 제 마음을 녹이고 있나 보네요
불륜은 아니지만 한 가정을 파괴하고 태어난 아이인 스즈. 스즈가 잘못한 것이 아니지만 부모의 죄를 연대 책임으로 지어야 하는 스즈가 유부남과 사귀는 큰 언니를 감싸는 모습은 참 오랫동안 생각하고 생각하게 하네요. 



수채화 같은 가족 사진을 본듯한 '바닷마을 다이어리'

대부분의 사진은 사람들이 행복할 때 찍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기념 사진들은 기념이 될 만한 일이 생겼을 때 웃으면서 촬영합니다.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웃고 있는 가족 사진을 본 듯한 느낌입니다. 이는 2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사진이란 순간만 촬영하기 때문에 마음 속의 불안까지 촬영하지 못합니다. 잠시 잠깐 웃으면 되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그 이미지를 보고 이 사람들은 행복이 가득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죠.

스즈가 그랬습니다. 스즈는 건강한 소녀고 항상 웃고 지냅니다. 그런 모습에 식당 아줌마는 보석 같은 아이라고 칭찬을 합니다. 하지만 스즈는 아니라고 그 말을 뿌리칩니다.  스즈는 존재 자체만으로 남에게 상처를 주는 소녀였습니다. 그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영화는 아주 느리고 따스하게 담습니다. 

가족 사진 같다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 영화는 스토리 보단 이미지가 참 아름다운 영화이기도 합니다. 바닷마을이라는 풍경도 풍경이지만 스즈가 벚나무가 만든 벚꽃 터널에서 벚꽃 그림자를 얼굴에 맞으면서 자전거를 타는 모습이나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네 자매의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와 불꽃 놀이들이 눈에 촘촘하게 박히네요. 

오늘 밤 이 네 자매의 아름다운 마음씨가 계속 기억날 듯 하네요. 마음만 예쁜 것이 아닙니다. 네 배우 모두 일본을 대표하는 미녀 스타들이기도 하죠. 여자 분들이 보면 참 좋은 잔잔하지만 속 깊은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입니다. 


별점 : ★

40자평 : 증오가 아닌 사랑이 가족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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