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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사진/사진전시회

한국의 엔진이었던 구로공단에 대한 이야기 서울역사박물관의 가리봉오거리 전시회

by 썬도그 2015.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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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인류 역사상 가장 처첨한 전쟁 중 하나였던 한국전쟁 후 나라를 제대로 운영할 수 있을까? 할 정도로 모든 것이 파괴되었습니다. 유엔과 미국의 원조로 겨우 겨우 먹고 살고 있었습니다. 무능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자신의 장기 집권에만 집중하고 나라 경제는 거의 손을 놓고 있었습니다. 

이에 미국은 한국의 경제발전이 북한을 막는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웁니다. 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원래 계획대로하면 제2공화국인 민주당에서 시작하려고 했느나 1년 짜리 정권이었던 제2공화국은 썬글라스끼고 탱크를 몰고온 박정희 소장에 의해서 무너집니다. 

이후 박정희 소장은 대통령이 되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거대한 폭풍 성장을 합니다. 마치 성장판 열린 청소년처럼 매년 10%가 넘는 고속 성장을 합니다. 그 고속 성장을 마치 박정희 전 대통령 혼자 했다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래서 박정희 전 대통령 딸에게 박정희 시대의 고속 성장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한국 경제는 디플레이션 초기에 진입했고 고속 성장은 물건너 갔고 무너지지만 않으면 다행이라는 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박정희 시대의 고속 성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역할이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가장 큰 권력을 가졌으니 그 책임도 수혜도 가장 크게 받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 고속성장 이면에는 구로공단이라는 거대한 한국호를 이끄는 엔진이 있었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의 가리봉오거리 전시회

좋은 전시회를 수시로 하는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4월 24일부터 7월 12일까지 <가로봉오거리>전시회를 합니다. 



가리봉오거리하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세요. 현재의 20대들에게는 아무런 이미지가 없겠죠. 3,40대 이상 분들이라면 어느 정도 구로공단의 이미지가 떠오를테지만 실상 정확하게 구로공단이 떠오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유명 코미디언들이 틈나면 쓰는 가리봉오거리라는 지명만 알고 있을 뿐이고요. 그럼 이 가리봉오거리의 긴 이야기를 시작 하겠습니다. 



가리봉오거리는 구로공단의 중심지였습니다.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면 



구로공단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 됩니다. 



구로공단은 1967년 4월 1호선 가산디지털단지역과 2호선 구로디지털단지역 사이에 1공단,2공단, 3공단이 들어선 국내 최초의 공단이었습니다. 지금은 울산, 안산, 여수 등이 유명한 공단이지만 60년대에는 서울 안에 공단이 있었습니다. 총 60만 평의 땅에 무려 10만 여명의 노동자가 이 공단에서 근무를 했습니다. 대부분은 공장이라서 공장 노동자였습니다. 



1공단 완공 후에 12만 평 대지에 2단지가 준공되었고 70년에 36만 평의 3단지가 조성되었습니다. 80년대 까지 한국 수출의 원동력이었고 한국 경제의 심장이자 엔진이었습니다. 제가 이 전시회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제가 사는 곳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고 그 시절 추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는 가산, 구로 디지털단지로 변했지만 90년대 초까지는 거대한 공단이었습니다. 지금도 몇몇 기업들은 여전히 가산디지털단지에 공장을 가지고 있지만 이 마저도 점점 서울 밖으로 떠나고 그 자리에 거대한 아파트형 공장(지식산업센터)이 들어서고 있습니다. 




과거 항공사진과 현재 항공사진을 겹쳐서 보여주는데 확실히 80년대에는 거대한 공장들이 많았네요. 



위 지도에서 박스 친 곳이 구로공단이었습니다. 



이 구로공단 거리를 재현해 놓았네요. 


이 구로공단은 무려 10만 명의 근로자가 공장에서 근무를 했는데 여공들이 참 많았습니다. 이 여공들은 지방에서 올라온 여공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가정 형편 때문에 중학교만 마치거나 중학교도 마치지 못하고 나이를 속여 가면서 공장에 취직한 여공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저는 잘 몰랐는데 이 전시장을 둘러보니 아예 기업체가 지방의 학교에 버스를 보내서 학생들을 태워서 서울 공장에서 근무하게 했다는 소리가 있네요.그 만큼 당시는 저임금 노동자가 많이 필요했고 그 임금으로 생활금을 빼고 나머지 돈을 고향 집으로 보내서 오빠나 등록금을 지원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현재의 50대 누님들의 각혈하는 그 고통이 있었기에 한국도 크게 성장했고 고향의 형제들과 부모님들이 잘 자랄 수 있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당시 여공들의 삶은 썩 좋지 못했습니다. 벌집이라고 하는 5평도 안 되는 공간에서 여러명이 살면서 낮에는 공장에서 근무하고 밤에는 야학을 배우고 살림을 했습니다.

지금도 가리봉동에 가면 이 벌집들이 있습니다. 지금은 재중동포들이 주로 살고 있습니다. 



구로공단 전성시대는 70년대와 80년대였습니다. 당시 한국은 경공업을 통해서 해외에 저품질 싸구려 물건을 팔았고 경제 성장에 큰 도움을 줍니다. 지금은 경공업은 중국이 담당하고 한국은 중공업이 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 구로공단에 대한 노래가 나올 정도로 구로공단은 아주 컸습니다. 



가장 칭송을 많이 받아야 할 산업역군인 구로공단 여공들을 우리는 당시 어떻게 불렀을까요?
잘 아시네요. 공순이라고 했습니다. 다분히 폄하의 의미를 담은 욕에 가까운 단어였죠. 그런데 우리는 이걸 너무 쉽게 썼습니다. 참 저질들이죠. 제가 이걸 기억하는 이유는 구로공단 근처에 살아서 공단의 여공들이 동네에 꽤 살았습니다. 세들어 살면서 공장으로 출근하는 누나들이 꽤 있었어요.  그런 누나들에게 못난 동네 형들이 공순이라고 했죠. 웃긴 건 그 형은 공고에 진학하더니 스스로 공돌이라고 자조하더군요. 

공돌이 공순이. 참 나쁜 단어입니다. 한국 사회가 이뿐 이겠습니까? 자기보다 낮아 보이면 비하하는 단어를 만들어서 조롱하고 놀리는데 일가견이 있죠. 우리 집에 세들어 살던 그 누나가 20년이 지나서 어머니와 연락이 닿아서 지금도 통화를 하고 지내시더군요. 아들 딸 낳고 아들이 결혼한다면서 청첩장도 보내왔습니다. 



전시회장은 가리봉동 벌집촌을 디스플레이 해놓았습니다.



딱 그 당시 공장 다니던 누나들의 방 그대로네요. 비키니 옷장이 있고 이발소 그림들이 있으며 달력과 앉은뱅이 책상이 있습니다. 



도시락과 책가방과 교복이 있는 이유는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지만 퇴근 후에는 공단 근처 학교에서 야학을 했습니다. 참으로 힘든 삶이였죠.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소설가 신경숙이 바로 구로공단 여공이었습니다. 낮에는 전자회사 공장을 다니고 밤에는 영등포여고를 다니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당시 선생님이 글을 써 보라는 권유로 소설가가 되었습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예쁜 옷을 입고 휴일에 데이트를 하는 꽃같은 나이였죠. 그런데 집안을 위해서 자신을 촛불처럼 희생했습니다. 



퇴근길에는 가리봉종합시장이나 대림시장에서 찬거리를 사서 저녁을 해먹었었습니다. 지금같이 냉장고가 보급되던 시절도 아니고 냉장고가 있어도 그걸 놓을 공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힘들어도 직접 시장가서 찬꺼리를 사서 밥을 해먹었습니다. 




구로공단에서 생산한 제품들입니다.



대우전자 요요도 있었고



대한광학에서는 쌍안경과 카메라도 만들었네요. 쌍안경은 세계시장 80%를 장악했다고 하는데 대단했네요. 그나저나 코니카 카메라도 만들었었나요? 



전자회사 중에 가장 유명한 전자회사는 금성전자였습니다. 저 다리 달린 TV, 우리 집에도 있었어요. 백색가전은 금성이었고 튼튼하기로는 정평이 났었습니다. LG전자로 이름을 바꾼 지금도 백색가전은 LG가 가장 좋습니다. 

금성전자 공장은 구로공단에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가산디지털단지에 가면 LG전자 건물이 꽤 많습니다. 모여 있지 않고 여기저기 떨어져 있습니다. 스마트폰 만드는 MC부분이 가산동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보안이 아주 철저해서 건물 찍는데 보안 요원이 와서 찍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건물이 무슨 보안인지는 모르겠지만 보안에 대한 감시가 꽤 삼엄합니다. 

이외에도 가발이나 팩시밀리, 무선 전화기들을 생산하고 대부분을 미국에 수출했습니다. 7,80년대 당시에 한국 제품은 현재의 중국제품처럼 오로지 싼 가격으로 승부해서 저가 시장을 독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 역할을 중국에게 넘겨주었죠

지금 중국의 농민공이라는 농촌 출신 공장노동자)가 바로 7,80년대 구로공단 여공들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여공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남자 공장노동자도 있었지만 워낙 여자들이 많다 보니 구로공단하면 여공이 먼저 떠오릅니다. 아무래도 손재주가 여자들이 좋죠. 의류나 전자제품 부품 조립 등은 여자들이 꽤 잘하니까요.  다만, 체력이 딸리는데 새벽까지 근무하거나 철야를 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졸음을 쫒기 위해서 타이밍이라는 각성제를 먹었습니다. 

지금은 붕붕쥬스를 마시는 청소년을 보면 시대는 변하고 세월은 흘러도 사람들의 삶은 크게 변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로공단 여공 출신 유명 소설가가 신경숙입니다. 신경숙은 이 구로공단 시절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습니다. 워낙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한 사소설을 잘 쓰는 작가라서 자신의 과거는 뭐든 소설로 옮기는 이 작가가 구로공단 여공 시절을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여공 시절 같이 야학을 하던 친구가 자신들이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을 묻게 되고 신경숙을 각혈하듯 그 이야기를 <외딴방>에 쏟아냅니다. 신경숙의 대부분의 소설을 다 읽었지만 가장 가치 있고 의미 깊은 소설은 외딴방입니다. 프랑스에서 큰 상도 받기도 했는데 언제 또 다시 읽어봐야겠네요. 

이름을 부르지 않고 1번 2번으로 불리던 여공의 삶은 기계 부속품 정도였습니다. 이런 삶은 영화 <구로아리랑>에 아주 잘 담겨 있습니다. 

 


현재 구로공단은 가산디지털단지로 변했고 많은 공장들이 경기도로 이주했습니다. 그러나 교학사 같은 회사는 여전히 가산동 공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친일 교과서 파동으로 유명한 교학사죠. 




구로공단은 90년대 후반부터 서서히 변합니다. 밀려오는 중국산 저가 제품에 경쟁력을 잃고 공장들이 떠나고 그 자리에 IT기업들이 들어섭니다. 그래서 구로, 가산디지털벨리로 이름을 바꿉니다. 여공들이 떠난 자리에는 조선족이라는 재중동포들이 가리봉동에 옵니다.

가리봉동에 오는 이유는 가산디지털단지에 취직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대부분은 일용직이나 음식점 종업원에 취직하기 위해서입니다. 7호선 남구로역 근처의 새벽 인력시장이 가깝다는 이유와 함께 월세가 싼 벌집이 많기 때문에 가리봉동에 많이 삽니다. 이쪽이 서울에서 아파트 값이나 부동산 가격이 가장 쌉니다. 지금은 중국인 거리가 될만큼 중국 간판들이 즐비합니다. 가리봉동과 대림동까지 조선족 분들이 많이 삽니다.

요즘은 조선족이 일으킨 흉악 사건 때문에 조선족에 대한 인식이 아주 안 좋아졌습니다. 
이렇게 안 좋은 사건 사고가 일어나면 재중동포 네트워크에서 자정 노력을 해야 하는데 그게 전혀 없습니다. 한국인들은 코리안타운 만들어도 그안에서 서로 이웃 관계로 네트워크를 형성해서 자신의 위신과 명성 때문에 이목을 생각해서 나쁜 생각을 가져도 실행하기까지 많은 제어장치가 있는데 재중동포들은 그런 게 없나 봅니다. 

또한, 우리가 조선족을 멸시하고 거리감을 두니 그들도 돈벌로 온 나라이지 한국에 대한 애정도 없어 보입니다. 서로의 이익관계가 맞아서 서로 같이 지내지만 서로에게 앙심을 품는 듯 한데 이러다가 큰 사회 문제가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다고 조선족 나가라고 외치고 실제로 그들이 싹 나가버리면  악성 일자리는 한국인들이 차지할 것입니다. 

아무튼 점점 문제가 커져가고 있네요. 



공장 노동자는 같이 일하고 같이 쉬기 때문에 단체로 놀러도 많이 같습니다. 야유회 체육대회 사진들이 흥겹네요



지금 같이 휴일에 갈 곳 즐길 것이 많던 시절이 아니였습니다. 공장에서 일해서 번 돈으로 음악 다방에서 신청곡을 듣던 음악다방에 가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지금은 음악다방이라는 것 자체가 없지만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있었습니다. 저도 친구 따라서 1,2번 가봤는데 하루 종일 락음악만 나오고 담배만 줄창 피던 모습이 별로 흥미롭지 못해서 안 갔습니다. 



독서와 음악감상이 국민 취미였던 시절입니다. 



하루 종일 다방에서 수다 떨면서 성냥쌓기 놀이나 했었죠 지금 같으면 하루 종일 모여서 스마트폰 들여다 보다가 지루해서 나가버렸을거예요.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분식은 거의 변하지 않았네요. 여전히 순대, 떡볶이는 국민 분식이 되었습니다. 다만 저 핫도그는 요즘 많이 보이지 않습니다.  튀김은 분식의 대표적인 음식이었는데 구두를 튀겨도 맛있다고 할 정도로 튀김 음식은 뭐든 다 맛있었습니다. 그래서 핫도그도 튀겼습니다. 저거 분명 미국식 핫도그와 다른 핫도그에요. 

핫도그는 캐찹 맛으로 먹었는데 캐잡 안 발라져 있으면 먹기 힘들었습니다.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했거나 중학교만 졸업한 낮은 학력의 여공들이나 근로자들은 밤에 야학을 다녔습니다. 정부에서 지정한 대방여중이나 영등포여고 등이 있었지만 다 수용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대학생들이 무보수로 운영하던 야학을 다녔죠. 



대학생들의 야학은 지식만 알려주는 것이 아니고 의식화 교육을 했습니다. 즉, 난 누구? 여긴 어디?에 대한 각성을 시키는 교육을 했습니다. 의식화 교육하면 무슨 색안경끼고 빨갱이라고 하는 꼰대들이 있을텐데요. 의식화 교육은 좋은 것입니다.

자기 정체성에 대한 교육이잖아요. 내 월급이 적당한 월급인지 아니면 사장이 다 챙기고 쥐꼬리만한 월급 받는 지를 알아야죠. 그렇다고 당시 대학생들과 노동운동가들의 노동운동을 무조건 옹호하는 것도 아닙니다. 의식화 교육을 빙자한 야학 운영의 순수하지 못한 목적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네요. 

80년 당시 졸부 사회로 가는 세상을 그린 소설자 조세희가 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박노해 시인의 <노동의 새벽>이 꽤 많이 읽혔습니다. 80년대 노동운동, 학생운동하던 그 많은 엘리트 중 일부는 변절한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도 그렇고 이문열이야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고 쳐도 오적이라는 사회비판적 시를 쓴 <김지하>의 변절은 엄청난 변절입니다. 나이들면 그렇게 꼰대들이 되고 기득권을 옹호하나 봅니다. 그들은 80년 그 뜨거운 시절을 부끄럽게 생각할까요? 아님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라면서 삶은 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낄까요? 아니면 아무 생각이 없을까요?






인간시장도 80년 당시 인기 많았던 대중소설이었습니다. 현실 비판적인 사회비판소설인데 장총찬이 썪은 사회를 일지매처럼 처단하는 모습이 흥미로웠습니다. 드라마 인간시장에서  장총찬 역을 맡아서 벼락 스타가 된 탤런트 박상원은 현재 보수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씁쓸하네요. 



작업복을 벗고 교복을 입고 대방여자중학교와 영등포여자고등학교 그리고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해서 밤에는 만학의 꿈을 꾸었습니다. 신경숙 같은 경우는 이 학교에서 꿈을 찾았고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 소설가가 됩니다. 



이 구로공단에 대학생들이 야학을 하면서 파고듭니다. 공장 근로자들과 함께 세상을 개혁하고자 하는 열의 때문인지 대학생임에도 신분과 학력을 속이고 위장 취업을 해서 근로자들에게 의식을 가지게 합니다. 기계 부속품 같았던 그들에게 의식을 심어주면 가장 싫어 하는 사람이 고용주입니다. 그리고 경제발전의 거대한 흐름을 방해하면 나라 망한다는 정부도 아주 싫어하죠.

그래서 노사 분규 현장에는 위장 취업한 대학생들이 선동을 했었습니다. 저는 이 당시의 대학생들의 행동을 좋게 볼 수가 없습니다. 뭐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행동이 과연 노동자들의 노동 인권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자기들이 목표로 한 사회주의 국가로의 전복을 위한 것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분명, 순수하지 않았습니다.

소설가 공지영은 그 대학생의 시선으로 이 구로공단을 그렸습니다. 공교롭게도 신경숙과 공지영은 동갑으로 신경숙은 여공으로 공지영은 연세대 대학생의 위장 취업자의 시선으로 같은 공간을 그립니다. 그래서 신경숙의 <외딴방>과 공지영의 <인간에 대한 예의>를 함께 읽어보면 좋습니다. 



80년대 대학생들은 민주주의만 갈망했으면 좋아겠는데 그 이상을 바라는 사람들도 꽤 많았습니다. 그래서 전 급진파, 과격파들은 아주 싫어합니다. 그들은 또 다른 바정희이자 전두환으로 보입니다. 



구로공단의 대규모 파업은 80년대에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열악한 노동환경을 참다 못한 노동자들이 분규를 일으킵니다. 
원풍모방 분뇨 투척 사건이나 여러가지 가공할만한 반인권적인 일들이 많았죠.  그래도 구로공단은 양반입니다. 울산은 전쟁터였어요. 거긴 전쟁터 수준이었습니다. 다행히 울산 쪽은 노동자 요구를 많이 받아들이고 고도 성장을 하면서 이후 분규는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현대중공원의 대규모 적자를 보면서 호시절은 이제 다 끝났다는 생각이 드네요. 

현대자동차도 공장을 해외로 다 이주할 것 같기도 하고요. 당시 노동환경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영화 <구로아리랑>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곳이 변했습니다. 90년대 말부터 서서히 변하더니 지금은 낮은 공장이 아닌 높은 공장형 아파트가 들어섰습니다.


가산과 구로의 공단 자리는 G밸리로 변했습니다.




위 지도에서 녹색으로 된 곳이 구로공단 자리였고 현재는 거대한 공장형 아파트 즉 지식산업센터가 가득 들어섰습니다. 
특히 왼쪽의 가산디지털단지역 왼쪽 부분은 하나의 빌딩 숲 같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런 체질 변경은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을 끌어 모았습니다. 90년대 261개 업체 5만 명 정도의 공장 근로자들은 2013년 현재 무려 1만 1,911개의 16만 명의 근로자가 근로를 합니다. 그래서 가산디지털단지역은 신도림역 버금가는 유동인구 때문에 항상 미어터집니다. 

생산액은 90년대 4조 4천억원에서 현재 17조 2천억으로 늘었습니다. 



80년대 가전, 의류공장 위주의 구로공단은 패션/ㅢ류, 의료기기, 애니메이션, 인쇄와 함께 IT기업들이 들어섭니다. 
그래서 이름도 가산,구로디지털밸리로 이름을 바꾸게 됩니다.  애니메이션 업체들이 많이 들어와 있는데 미국 등의 해외 애니 업체의 하청업을 많이 합니다. 




가리베가스라는 16분짜리 단편 영화도 상영합니다



G밸리 뒤 독산동. 여기가 제가 사는 동네입니다. 그러나 가산디지털밸리와 독산동이 유기적으로 엮여 보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가산디지털밸리는 공장만 떠났지 구로공단의 21세기 버전이라서요. 

가산디지털밸리에서 근무하는 근로자들은 독산동에도 가리봉동에도 살지 않습니다. 임대료가 싸서 입주한 기업들의 근로지일 뿐이죠. 그래서 퇴근 후에는 다 집으로 가거나 아파트형 공장 건물 1층 편의점에서 캔맥주를 마십니다. 유흥의 거리가 없다 보니 지역 상인들에게 큰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섬 같은 존재가 금천구와 구로구에 걸쳐 있지만 금천구 같지도 않고 구로구 같지도 않습니다. 그나마 구로디지털밸리는 유흥업소들이 있는 향락의 거리가 있지만 가산디지털밸리는 없습니다. 




기륭전자를 기억하시나요? 문자 해고로 유명한 기업이죠. 노동자를 1회용 티슈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세상에 많습니다. 적어도 얼굴을 대면하고 사정을 이야기하는 염치는 있어야 하는데 그런 염치도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륭전자는 가산디지털단지에 있었는데 현재는 공장 건무을 허물고 거기에 큰 건물 올린다고 하는데 자금난 때문인지 3년 째 빈 공간으로 비워두고 있습니다. 



가장 가낭한 지역이기도 한 가리봉동. 아직도 벌집촌이 존재하는 동네, 그래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인 재중동포들이 살고 있는 지역입니다. 참고로 가리봉오거리는 아주 큰 오거리가 아닙니다. 남부순환도로가 지나가는 오거리로 실제 가보면 볼품 없습니다. 그러나 구로디지털밸리와 가산디지털밸리를 이어주는 배꼽 위치에 있어서 유동인구가 많습니다. 예전에는 주말에 쏟아지는 인파로 인해 떠밀려 다녔을 정도로 휴일 날 몰려나온 공장 노동자들로 꽉 찼습니다. 


이 80년대 구로공단의 풍경은 영화 장미빛 인생, 구로 아리랑 그리고 소설 인간에 대한 예의와 외딴방에 담겨 있습니다. 저야 이쪽에 살고 관심도 많아서 모두 다 읽어 봤고 봤네요. 그런데 다시 한번 읽어볼 까 합니다.



전시회장에는 초중고등학생들이 많이 관람을 하던데 구로공단이 뭔지도 모르고 현재와 많이 동떨어진 이야기라서 그런지 낙서만 남기고 가네요. 솔직히 얘들이 이런데 관심 있겠어요. 저 같은 나이 든 사람들이나 좀 관심을 가질 뿐이죠. 

그래도 과거를 훑어 보다 보면 미래가 보이고 현재가 보입니다. 사람들의 삶은 크게 변하지 않으니까요. 




현재는 이렇게 변했습니다. 지금도 거대한 건물이 쭉쭉 올라가고 있고 몇 안되는 공장들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땅 값이 비싸져서 공장을 팔고 경기도 지역으로 이주하고 그 자리에 아파트형 공장을 지어서 임대수익을 내는 기업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변하는데 10년도 걸리지 않아서 공실율이 꽤 높습니다. 주변에 아울렛 거리라고 해서 마리오 아울렛, 가산현대아울렛, 패션아일랜드 , W몰이 있어서 IT기업과 패션 아울렛 매장이 많은 공간으로 변신하고 있습니다. 

구로공단 여공들의 삶과 한국의 성장 엔진이었던 구로공단의 추억을 느낄 수 있는 전시회입니다. 그 시절 추억을 가진 분들이라면 꼭 들려서 보세요. 전시회가 꽤 잘 꾸며져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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