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관 매점에서 일하는 수리진(장만옥 분)은 매일 같이 찾아오는 아비(장국영 분)을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런데 이 남자 수리진의 쌀쌀 맞은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찾아옵니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 시계를 1분만 쳐다보자고 제안합니다. 


쌀쌀맞게 굴던 수리진은 이 남자가 싫지만은 않습니다. 그렇게 아비의 손목시계를 수리진은 함께 쳐다 봅니다. 

"1분 지났어요. "
"오늘이?"
"16일이요"
"16일....4월 16일"
"1960년 4월 16일 3시가 되기전 1분. 당신 때문에 난 이 1분을 기억할거예요."
"우린 이제부터 친구예요"
"이건 사실이자 당신이 부정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이건 지나갔으니까요"

내일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아비는 떠납니다. 


환불 소동이 일어났던 아비정전

아비정전은 1990년 당시 환불 소동이 일어났던 영화입니다. 웬만하면 영화를 보고 재미 없어도 영화가 재미 없어서 환불 해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화가 재미 없다고 관객들이 환불을 요청했고 이런 요청과 함께 낮은 관객 동원으로 영화는 2주 만에 간판을 내리게 됩니다.

관객들이 환불을 요청한 이유는 장국영, 유덕화, 장만옥, 장학우라는 조합에서 예상 되는 홍콩 액션 영화를 예상 했는데 영화는 액션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루한 사랑 이야기만 주구장창하니 관객들이 분노를 하게 됩니다. 80년대 말 90년대초는 홍콩영화하면 쿵푸 영화나 홍콩 느와르라는 2가지 장르 밖에 없었습니다. 가끔 주성치 식 코메디 영화가 있긴 했지만 대부분의 영화가 과도한 총질을 하는 홍콩 느와르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러다보니 관객들은 당연히 총질하는 의리를 담은 영화겠지 했는데 전혀 다른 문법을 가진 영화를 만난 것입니다. 

여기에 당시는 영화에 대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없었고 스타파워가 아주 강했던 시기라서 어떤 배우가 나온다는 그 이유만으로도 많은 관객이 극장을 찾던 시기였습니다. 이렇게 장국영, 장만옥, 유덕화와 장학우와 양조위까지 나온다고 하니 스타파워를 믿고 찾았지만 아무리 잘생긴 홍콩 스타들이 대거 출연하지만 영화가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겠고 지루한 사랑 이야기만 담고 있으니 화가 날 만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도 영화가 재미없다고 환불을 요청한 당시 그 관객들의 패기는 이해가 가지 않긴 하네요. 

그래서 이 영화가 재미가 없냐? 그건 또 아닙니다. 분명 다른 홍콩영화들과는 그 스타일이 확연히 다른 영화임에는 틀림없고 이런 대중적인 요소 보다는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그대로 담은 작가주의 영화는 어느 정도 영화 보는 훈련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 봐야 눈에 들어오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영화가 대중적이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난해한 장면도 없고 이야기가 그리 복잡한 것도 아닙니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 사랑의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주요한 소재로 담은 영화입니다.


발 없는 새. 아비

아비정전은 아비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영화입니다. 아비는 친부모가 자신을 버린 후 화류계에 몸 담고 있는 양 어머니 밑에서 자랍니다. 이런 가정 환경 때문인지 아비는 돈을 벌기 보다는 한량 같은 삶을 삽니다. 어머니에게 접근하는 놈들을 패주는 등 특정한 직업이 없으면서도 세월에 따라서 흘러가듯 삽니다. 

이런 정처없이 떠도는 청춘을 담은 모습은 전작인 열혈남아와 비슷합니다. 왕가위 감독의 초기작들은 이런 방황하는 청춘,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떠나는 청춘들을 자주 담고 있습니다. 이런 아비와 수리진은 한 집에서 살게 됩니다. 매점 아가씨 수리진은 아비와 결혼을 하고 싶어 하지만 아비는 결혼은 싫다고 합니다. 얽매이는 삶을 싫어하지만 아비. 이런 아비는 친 어머니라는 굴레에서는 벗어나지 못합니다. 

참다 못한 수리진은 아비의 집에서 나가버립니다. 이에 이 집에서 나가면 다시는 들어올 생각을 하지 말라는 아비. 그렇게 수리진은 아비를 떠납니다. 이 빈 집에 루루(유가령 분)이 아비의 집에 들어옵니다. 아비는 한 여자에게 정착을 하지 못합니다. 이는 자신의 정체성과도 연결이 됩니다. 자신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 할 친어머니에 대한 소식을 알지 못하다 보니 세상에 닻을 내리지 못하고 물 흐르는 대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발 없는 새라고 말합니다.

"세상에 발 없는 새가 있다더군"
'늘 날아다니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대"
"평생 딱 한번 땅에 내려 앉는데 그건 바로 죽을 때지"



이 발 없는 새를 수리진은 잊지 못합니다. 루루가 차지한 아비의 집 밑에서 수리진은 실연의 아픔을 달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경찰인 유덕화가 봅니다. 매일 같이 찾아오는 수리진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이 젊은 경찰은 수리진의 아비에 대한 사랑 이야기를 순찰을 하면서 듣게 됩니다. 


실연 당한 여자의 사랑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경찰관은 수리진을 살며시 좋아합니다. 그래서 항상 이 시간에 순찰을 하니 생각나면 이 공중전화 박스로 전화를 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수리진은 그렇게 아비를 잊고 살게 되고 상처가 치유되면서 자신의 사랑도 자신을 향한 사랑도 다 잊습니다. 


순간이 영원이 되는 사랑의 묘약이자 해독제인  시간

1960년 4월 16일 3시. 1분이라는 시간을 공유하면서 시작 된 사랑은 시간이 지나자 사라지게 됩니다. 이는 수리진 대신에 아비의 연인이 된 루루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리진은 경찰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난 순간이란 정말 짧은 시간일 줄 알았는데 때로는 오랜 시간이 될 수도 있더군요"

긴 인생에 비하면 사랑하는 시간은 순간일 수 있습니다. 그 순간을 평생 간직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 인간이 아닐까 합니다. 남자들이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이유도 다 그 처음이라는 시간을 공유한 그 시간에 대한 향수 때문 아닐까 합니다.  순간이지만 그 순간이 평생 살아가면서 자주 펼쳐 보는 그 모습은 사랑이 순간일 수 있지만 기억에서는 평생을 살아 숨쉬는 생명체 같다는 느낌입니다. 

이런 순간은 경찰관인 유덕화에게도 찾아옵니다. 짧은 순간 수리진을 좋아했지만 그녀가 들려준 아비에 대한 사랑 이야기만 간직한 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경찰을 그만두고 선원이 됩니다. 그리고 필리핀에서 만난 아비로부터 '발 없는 새'이야기를 듣다가 핀잔을 줍니다. 

이 장면이 아주 웃기면서도 의미 심장했습니다. 여자 꼬실 때 하는 그 이야기를 나에게 하지 말라고 웃으면서 말하죠. 
이는 한 여자에 대한 기억을 두 남자가 공유하는 기억의 공유 또는 시간의 공유의 장면 같아 보였습니다. 


발 없는 새. 땅에 내려 앉다

부유하는 바람 같았던 아비는 양 어머니가 남자와 함께 미국으로 떠난다고 하자 친어머니가 있다는 필리핀으로 갑니다. 자신의 정체성 회복과 함께 긴 방황을 마무리 짓고 싶었던 아비. 그러나 매몰찬 모정은 이 아비를 거부합니다. 이에 대저택에서 자신의 친아들인 아비를 쳐다볼 것이 뻔하기에 아비도 얼굴을 절대 보여주지 않겠다면서 성큼 성큼 걸어 나옵니다. 

땅에 내려 앉으려고 했던 발 없는 새는 다시 날아오르려고 합니다. 그러나 아비는 그렇게 필리핀에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잘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명징한 주제 전달 보다는 사랑의 쓸쓸한 뒷모습을 여백이 가득한 모습으로 담고 있습니다. 

발 없는 새가 되어서 죽어가던 아비는 그녀가 그립다면서 숨을 거둡니다. 
여기서 그녀는 누구였을까요? 수리진이었을까요? 아니면 양 어머니 또는 친 어머니였을까요? 자신이 내려 앉고 싶었던 그 곳은 어디일까요? 

발 없는 새는 이미 처음부터 죽어 있었다고 읇조리는 아비. 아비의 이런 바람 결에 나부끼는 사랑 이야기는 쓸쓸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영화 마지막에는 양조위가 잠시 나오지만 잠시 나오고 끝이 납니다. 아마도 아비정전2를 예상하고 넣은 씬 같은데 아비정전2는 제작이 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양조위와 지고지순한 사랑을 하고 있는 유가령이 같은 영화에 나온 영화이기도 합니다. 다만 부부가 한 장면에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맘보춤 씬은 생각보다 아주 짧게 나옵니다. 그 장면이 이 영화보다 더 유명하기도 했죠. 이 또한 좀 씁쓸한 풍경이네요

아비정전은 꽤 괜찮은 영화였습니다. 특히, 사랑과 시간을 절묘하게 잘 묘사한 괜찮은 영화입니다. 
부정하고 싶은 사랑도 기억하고 싶은 사랑도 과거라는 돌이킬 수 없는 시간 안에서 평생을 기억하면서 살아가게 된다고 아비는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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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불린콩 2014.08.22 14: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비정전이 개봉되었을 때가 90년대 말이었을까요.. 영등포에 있었던 소극장에서 이게 무슨영화야? 하며 투덜대는 사람들 틈에서 굉장히 재밌게? 본 기억이 나네요.. 그때의 느낌을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요.. 아주 후덥한 여름날 아름다운 여자와 함께 좁은 공간에서 마주보고 있는 느낌?... 여하튼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 영화입니다... 장국영 때문에 매년 4월 1일이면 생각나는 영화이기도 하고.. 오랜 추억을 꺼내주셔서 감사합니다.

  2. Favicon of http://hzbubu.tistory.com BlogIcon 한중부부 2014.08.26 05: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환불소동 기억납니다. 당시에는 저도 영화에 대한 깊이가 없어, 이게 뭐야? 했었던 기억이 나네요.
    좋은글 감사히 잘 보았습니다. ^^

  3. 최동섭 2014.08.26 18: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비정전, 화양연화... 두고 두고 보는 영화이지요.. 특히 비오는날...

  4. 염아 2014.09.29 21: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당시에 어렸던지라 이게 뭐야 하면서 봤던 기억이 있는 영화네요. 그저 장국영 영화의 하나로 여겼지만 내용은 비교적 상세히 기억하는걸로 봐서 나름 인상깊었던거 같습니다. 지금와서는 완전히 다른느낌으로 다가오네요. 나이를 먹긴 먹은거 같습니다. 가끔가다 문득 장국영이 보고싶어집니다. 2003년 4월1일 정말 만우절농담같이 사라진 그이기에 아직도 납득하지 못하고 어딘가 살아있을것같은 느낌입니다. 소중한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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