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사진을 찍고 예술 사진작가로 칭송 받는 으젠느 앗제 (Eugene atget)
새벽이 되면 으젠느 앗제는 유리판을 사용하는 20kg 무게의 목재 카메라를 들고 파리 거리를 촬영하기 시작합니다. 으젠느 앗제가 촬영하는 피사체는 에펠탑이나 큰길의 거대한 랜드마크 건물보다는 뒷골목 풍경을 기록했습니다. 새벽이나 늦은 저녁 사람이 덜 다니는 시간에 촬영한 으젠느 앗제의 사진에는 사람이 거의 담기지 않았습니다.
가끔 담은 사진 속 사람들은 초라한 행상인, 고물장사, 홍등가의 여인들을 담았습니다.
누구도 기록하지 않은 뒷골목과 새벽의 파리 거리, 하층민들을 기록한 으젠느 앗제 하지만 그가 의도적으로 세상이 눈여겨보지 않는 시간과 사람을 촬영한 것은 아닙니다.
1857년 프랑스 보르도에서 마차 제조공 아들로 태어난 앗제는 어린 시절 부모님이 모두 사망합니다. 할머니 댁에서 자란 앗제는 연극 배우가 꿈이었지만 재능이 없었습니다. 떠돌이 유랑 극단 배우 생활을 하다 성대에 병이 생겨 배우 생활을 접고 화가로 전업하지만 성공하지 못합니다. 당시 화가들은 사진을 보고 그림을 그렸는데 이 수요를 눈여겨 보던 앗제는 목재 카메라를 구해서 화가들을 위한 풍경, 인물 사진을 촬영해서 근근이 먹고 삽니다.
으젠느 앗제는 우울증과 자폐증을 앓고 있었습니다. 사람들 앞에 나서서 어울리기 보다는 항상 뒤로 물러나 있었습니다. 앗제가 사람이 없는 새벽 파리 뒷골목과 부랑자나 하층민을 사진으로 담은 것은 자신과 닮았기 때문이 아녔을까요?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 파리는 오스만 남작의 대규모 파리 재개발 프로젝트로 매일매일 변화해 갔습니다. 앗제가 파리 시내를 기록한다는 걸 안 파리시는 변화해가는 파리시를 촬영해 달라고 의뢰했고 앗제는 크고 무거운 목재 카메라를 들고 파리 곳곳을 공적으로 사적으로 사진으로 기록합니다. 그가 촬영한 사진은 무려 1만 여 점이 넘습니다. 으젠느 앗제의 대규모 기록 사진을 세상이 알아주는 것은 아녔습니다. 동물, 시골 풍경, 하층민, 노동자, 보부상 같은 사람들만 촬영한다고 사회주의자라는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1926년 화가들의 그림을 찍어주던 미국 사진작가 만 레이는 앗제의 사진 4점을 초현실주의자 기관지에 소개합니다. 만 레이는 조수인 사진작가 배러리스 애보트에게 앗제를 소개합니다.
베러리스 애보트(Berenice Abbott)가 으젠느 앗제 집에 찾아간 것은 앗제가 죽기 얼마 전이었습니다. 애보트는 앗제가 죽은 후 앗제가 촬영한 사진을 수소문해서 사진 2천 장과 원판 1만 장을 미국으로 가져옵니다. 으젠느 앗제의 사진이 세상에 공개된 것은 앗제가 죽은 뒤 1년 후였습니다. 앗제의 사진은 1930년 초 다큐 스타일의 사진이 크게 인기를 끌면서 다큐 사진의 선구자라고 칭송을 받습니다.
으젠느 앗제의 사진은 기록 사진입니다. 그러나 앗제를 예술 사진가 또는 파리의 영상 시인이라고 하는 이유는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새벽 파리의 거리, 누구도 기록하려 하지 않은 뒷골목과 그 뒷골목을 닮은 하층민들의 모습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공간의 느낌이 초현실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기록 사진은 세월의 빛을 받으면 더깨들이 은은한 빛을 냅니다. 뛰어난 기록 사진은 예술 사진이라는 하나 이상의 감정을 자극하기에 우리는 지금도 으젠느 앗제의 사진을 길고 오래 바라보게 됩니다.
베러리스 애보트(Berenice Abbott)의 노력으로 으젠느 앗제의 사진은 세상에 소개되었고 지금까지 사랑받는 사진작가로 남아 있습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그림 같은 사진인 살롱 사진을 찍던 사진가와 달리 사진의 기록성에 중점을 둔 앗제의 뚝심은 우리가 눈여겨봐야 하지 않을까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