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다룬 방구석1열 41회
매년 수백 편의 영화를 봐도 내 인생의 영화 순위가 크게 변하지는 않습니다. 특히 TOP5 안에 들어가는 영화는 좀처럼 변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TOP5 안에 들어가는 영화는 영화 자체로도 명작입니다. 여기에 그 영화를 볼 당시의 내 상황과 느낌이 섞이기 때문에 영화에 대한 강렬한 인상이나 느낌은 중년인 지금보다 10,20대에 본 영화들이 더 강렬하고 나에게 큰 영향을 줍니다.
저에게 있어 '내 인생의 영화 TOP5'안에 들어가는 영화가 바로 <죽은 시인의 사회>입니다. 이 영화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되새김질 프로그램인 JTBC의 <방구석 1열>에서 소개해줬습니다.
교육에 대해서 다시 돌아보게 한 <죽은 시인의 사회>
매주 금요일 저녁 6시 30분에 방영하는 JTBC의 방구석 1열은 윤종신, 주성철 편집장 등이 주축이 되어서 흘러간 명작 영화 2편을 소개하는 영화 소개 프로그램입니다. 여타의 영화 소개 프로그램들이 최신 개봉 영화를 다이제스트로 소개하는 영화 홍보 프로그램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너무나 현학적인 내용과 1명 또는 2명 정도의 출연자가 자신들의 시선만 소개하는 아쉬움이 있다면 '방구석 1열'은 5명 이상의 출연자가 각자의 시선을 주고 받으면서 영화에 대한 감상을 풍부하게 소개합니다.
특히 윤종신의 뛰어난 공감 능력에서 나오는 친절하고 공감 높으면서도 전혀 현학적이지 않고 친근하고 대중적인 언어는 이 방송의 주축이 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흘러간 영화 중에 뛰어난 영화를 다시 소개해주는 모습도 좋습니다. 사람들은 최신 개봉작만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지만 절대 아닙니다. 우리가 놓친 또는 흘러간 영화들 중에 명작이 더 많습니다. 게다가 좋은 영화는 10년 단위로 다시 보라는 말이 있잖아요.
영화는 변하지 않았지만 10년 사이에 내 상황이 나이가 감성과 경험이 변하기 때문에 같은 영화를 봐도 20대에 본 영화, 30대에 본 영화, 40대에 본 영화가 다릅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는 1990년 아카데미 각본상, 영국 아카데미 최우수작품상과 음악상 등을 받았습니다.
감독은 피터 위어 감독입니다. 영화 1986년 작 <위트니스>와 1998년 작 <트루먼 쇼> 그리고 범선 해전 액션의 최강작인 2003년 작 <마스터 앤드 커멘더>를 연출한 감독입니다. 대중적과 작품성을 겸비한 감독입니다. 특히 폐쇄된 공간에서 분출되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잘 표현하는 감독입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는 피터 위어 감독 필모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이며 이는 주연 배우였던 '로빈 윌리암스' 본인이 말한 최고의 영화였습니다. 그리고 저에게도 최고의 영화 중 하나였습니다.
제가 이 영화를 최고의 영화라고 한 이유는 다른 영화보다 영화를 본 당시의 기억이 너무나도 생생하기 때문입니다. 1990년 고등학교 2학년 시절, 나에게 영화를 보는 재미를 알려준 친구와 함께 중간고사를 끝나고 영화를 보러 갔습니다. 같은 반 다른 친구들은 마침 개봉한 영화 <배트맨>을 보러 간다고 몰려서 갔는데 영화광인 친구는 처음 들어보고 재미 없어 보이는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습니다.
그 영화가 바로 <죽은 시인의 사회>입니다. 제목만 봐도 재미 없게 생겼습니다. 게다가 1류 개봉관인 피카디리가 아닌 바로 옆 건물이었던 2류 개봉관인 피카소 극장에서 상영하고 있었습니다. 흥미롭게도 배트맨 영화표 구매에 실패한 같은 반 친구들도 입이 쭉 나와서는 우리 다음 회 영화를 예매했습니다. 같이 자판기 커피를 마시면서 영화에 대한 기대감 보다는 시험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고 눈물을 펑펑 흘렸습니다. 저만 눈물을 흘린 것이 아닌 영화관을 꽉 채운 여고생, 남고생 거의 모두 눈물을 흘렸습니다. 고등학교 이름은 다르지만 18살이라는 계절을 지나는 당시 고등학생들이 느끼는 울분 같은 것을 이 영화가 아주 잘 건드렸습니다. 아직도 기억나네요. 노출된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서 봄 기운을 실은 봄 바람에 눈물을 말리던 그때가요.
<죽은 시인의 사회>의 배경은 1959년 아이비리그 진학률이 무려 75%인 명문 고등학교 학생들의 이야기입니다. 미국 명문 사립고등학교는 자율 보다는 억압과 규율, 통제, 대입만을 목적으로 한 작은 감옥 같은 공간입니다. 오로지 아이비리그 대학 진학이 목적인 학교입니다. 이런 군대 같은 학교에 자유주의자인 '키팅 선생님'이 국어 선생님으로 부임하게 됩니다.
첫 수업 시작하자마자 교과서 첫 페이지를 찢어버리라는 독특한 수업을 시작한 키팅 선생님은 항상 온화한 미소로 학생들을 대했습니다. 그리고 대입과 전혀 관련 없는 수업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자유를 심어줍니다. 키팅 선생님은 '카르페 디엠'을 말합니다.
라틴어인 '카르페 디엠'은 현재를 즐기라라는 말입니다. 이말은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한 번 뿐인 인생이라고 하는 욜로와 비슷합니다. 우리는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저당 잡혀 삽니다. 물론, 미래를 위해서 현재의 고통을 감수하는 것은 바람직한 삶입니다. 문제는 너무 미래만 바라보고 살면 불행한 현재의 연속이 됩니다. 따라서 적당한 밸런스가 중요합니다.
전 이 말을 당시에는 마음에 새겼지만 솔직히 그 의미를 오롯하게 느끼지는 못했습니다. 현재를 즐겨라? 그러기엔 어두운 미래가 또아리를 틀고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이 말을 오롯하게 깨닫게 된 건 30대 중반입니다. 아둥바둥 살고 미래를 위해서 현재의 고통을 감수해봐야 밝은 미래라는 확실한 대답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세상 일이라는 것이 노력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운이 더 크게 작용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현재를 즐기면서 사는 것이 오히려 불확실한 미래가 주는 공포보다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현재만 즐기는 탕진의 삶을 살라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도 적당히 즐기면서 살자는 걸 나이 들어서 알았습니다. 어떤 가르침이건 그걸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어야 하네요.
키팅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세상을 보는 시선이 1가지가 아니라면서 교탁 위로 올라오라고 합니다. 망치를 들고 있으면 세상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고 하죠. 학생의 위치에서 보는 세상은 제한적입니다. 게다가 선생님이 1가지 생각만 강요하고 삶과 가르침에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는 선생님에게 세상을 배우면 편협한 생각을 가진 학생이 됩니다. 여기에 부모까지 1가지 생각, 정답이 있는 생각을 하라고 강요하면 아이들은 숨 막혀서 살 수 없습니다.
제 블로그에는 많은 영화 리뷰를 담고 있습니다. 영화에 대한 제 느낌을 썼기에 당현이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세상에 객관화된 영화 리뷰나 책 감상평은 없습니다. 모두 살아온 경험과 배경과 지식과 취향이 다른데 어떻게 동일한 느낌이 나오겠습니까? 그런데 리뷰가 너무 주관적이라고 하고 당신의 느낌과 생각은 틀렸어라고 지적하는 댓글들이 엄청나게 달립니다.
같은 영화를 보고도 느끼는 것이 다른 것이 정상입니다. 그럼 자기 느낌만 주장하면 됩니다. 다만 그 느낌이 공감을 많이 받냐 못 받냐의 차이는 있지만 내 느낌을 틀렸다고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세상이 어디 그럽니까? 예술마저도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키팅 선생님은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시험 성적이 아닌 우리 마음 속에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저질 교육을 받고 자라고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독후감을 틀렸다고 하는 교육에서 무슨 창의가 나오겠습니까? 창의 마저도 암기 과목이 된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모든 것을 서열화하는데 선수들입니다.
오 캡틴 마이 캡틴! 그리고 전교조
솔직히 <죽은 시인의 사회>의 초반은 좀 지루합니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될수록 입시 교육에 찌든 우리들의 삶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영화에 물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그 뭉클함과 울분이 폭발합니다. 이 마지막 장면에서 학생들이 책상 위에 올라가는 모습은 드라마 <스카이캐슬>에서도 오마쥬가 될 정도로 뛰어난 명장면입니다.
키팅 선생님이 교정을 떠날 때 수줍음이 많은 학생 앤더슨(에단 호크 분)이 책상 위에 오른 후에 오 캡틴 마이 캡틴!이라고 외칩니다. 이에 많은 학생들이 앤더슨의 행동을 지지합니다. 이 모습은 90년 당시 학생들의 삶과 오버랩 되는 장면입니다. 당시에 좋아하는 선생님들이 강제로 학교에서 퇴출 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지금은 볼 수 없지만 1989년 90년에는 학교에 큰 폭풍이 불었습니다. 교총이라는 교원 단체가 아닌 전국 교직원 연합회라는 또 하나의 교직원 단체가 출범합니다. 당연히 정부는 전교조를 교원단체로 인정해주지 않음을 넘어서 해직을 시켰습니다.
무려 1천명이 넘는 선생님들이 교단을 떠나야 했습니다. 더 놀라운 건 1989년 결성된 전교조가 아직도 합법화 인정을 못 받고 있습니다. 1989년 당시 학생들은 전교조가 뭔지 잘 몰랐습니다. 그냥 참교육, 참교육 외치는 단체로만 알고 있었죠. 관심을 가질 여력도 없는 시절입니다.
다만 학생들이 슬퍼했던 것은 모든 교사들이 대입 성적만 말하고 교과서 밖 세상은 보지 말라고 회초리를 들고 구닥다리 교육 방식으로 학생들이 졸던 말던 혼자 떠들다 나가는 교사가 태반이었는데 이중에서 자는 학생을 내려다 보면서 어제 피곤했구나!라고 회초리 대신 따뜻한 말로 다독이고 세상 이야기와 대입이 아닌 삶에 대한 이야기와 학생들의 고민과 고충을 들어주는 선생님들 태반이 전교조였습니다.
제가 다닌 학교는 전교조 선생님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키팅 선생님 같은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네요. 새로 부임한 독일어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수시로 말해주고 가끔 아이들이 너무 졸려하면 10분 정도 오침을 허락했습니다. 내 인생의 최고의 선생님인 독일어 선생님의 이런 자유분방한 교육에 대해서 학교는 무척 싫어 했습니다.
한 번은 독일어 수업을 받는데 뒷문 창문 너머로 교감 선생님이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걸 본 저와 친구들은 소름이 돋았습니다. 교사가 교사를 감시하는 살벌함에 치를 떨었습니다. 사랑이 충만한 학교가 아닌 경쟁과 사리사욕이 가득한 학교였습니다. 부패한 사학 재단의 부정부패를 매일 보면서 세상의 더러움을 꼬박꼬박 씹어 먹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런 풍경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겁니다. 교사들의 교권이 땅에 추락했다고 하지만 그런 추락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 교사와 비리 사학 재단입니다.
이런 와중에 선생님 같은 선생님을 가끔 만나게 되는데 이런 선생님들 태반이 전교조 소속이었습니다. 키팅 선생님 같은 선생님들이 전교조에 많다보니 학부모와 정부는 이 선생님들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결국 수천 명의 교사가 학교를 떠나게 됩니다.
90년 그 5월 서울 곳곳에서 모인 고등학생들이 피카소 극장에서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고 눈물을 흘렸던 이유는 영화 속 이야기가 현실에서도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화와 현실이 만나게 되면 그 영화는 더 크게 다가오게 됩니다.
요즘도 학업 스트레스로 자살하는 학생이 있습니다. 한국은 10대 아이들이 행복하면 질색팔색을 하는 나라입니다. 80년대에는 더 심했습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 난 눈이 오면 나가 놀고 싶고 여름엔 산과 바다가 좋아"
1986년 한 여중생이 유서에 쓴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는 당시 많은 학생들을 울렸습니다. 그리고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영화가 나옵니다. 이 영화도 기억납니다. 1989년 개봉한 이 영화를 지금은 사라진 신촌의 이화극장에서 봤었습니다. 관객들은 대부분이 중고등학생이었습니다. 이 영화 말미에 자살하는 장면에서는 여기저기서 흘리는 아이들의 숨죽인 눈물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학업 스트레스로 청소년이 자살했다는 소리가 많이 들리던 시절 그나마 믿고 따르던 스승님 같은 선생님들이 학교 밖으로 끌려 나갔지만 영화 속 소심한 학생인 앤더슨처럼 나서지는 못했습니다. 나섰다가 자신의 안위와 부모님을 실망 시켜 드릴 수 있다는 강박 때문에 숨죽이고 있었죠. 그러나 아무리 어리고 나약한 아이들이라고 해도 옳고 그름은 압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는 앤더슨을 클로즈업 하면서 끝이 납니다. 앤더슨은 항상 아웃사이더로 지냈지만 키팅 선생님이 떠날 때 가장 먼저 책상 위에 올랐습니다. 이 영화가 변화시키고 싶은 사람들은 앤더슨 같이 불의를 잘 알고 있지만 소심하고 용기가 없어서 나서지 못하는 평범한 우리들입니다.
저는 이 영화와 당시 시대상을 통해서 90년 10대, 20대였던 60,70년대 생들이 학부모가 되면 교육 스트레스를 덜 받는 세상을 만들 줄 알았는데 제가 순진했던 것인지 오히려 더 심해졌습니다.
부모님들이 꼭 봤으면 하는 방구석 1열 40회, 41회
그렇다고 키팅 선생님이 정답이라고 하는 소리는 아닙니다. <방구석 1열>이 좋은 점은 다양한 시선들을 아주 잘 담아냅니다. 가장 흥미로웠던 이야기는 90년 당시의 억압적인 교육 시스템에서는 자유방임주의 선생님이 키팅 선생님이 각광 받을 수 있지만 지금 청소년들에게는 키팅 선생님이 환영받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하네요.
하기야 학제가 많이 변하면서 선택지가 너무 많아졌고 입시 스트레스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이전보다 다양한 방법으로 대학을 갈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키팅 선생님이 환영 받지 못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흥미롭네요.
아이가 괴로운 건 부모의 프레임으로 아이를 키우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인격체임에도 한국 부모님들은 내 소유물로 생각합니다. 이러다보니 부모의 생각을 강요하고 주입하다가 내 맘대로 되지 않을 때 아이에게 부모의 꿈이나 희망을 강요합니다. 이런 부모의 강요를 잘 보여주는 드라마가 <스카이캐슬>입니다.
<방구석 1열>이 꿈꾸는 아이들을 위하여라는 주제로 2편의 영화인 <빌리 엘리어트>와 <죽은 시인의 사회>를 소개한 이유는 최근 종영된 JTBC의 <스카이캐슬>에서 보여준 우리들의 민낯 때문입니다. 대입만이 목표이자 꿈인 아이들의 삶과 과도한 사교육에 대한 경각심이 심어준 이 드라마를 통해서 많은 분들이 사교육 광풍 속에서 아이들이 지치고 힘들어하는 삶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방구석 1열>은 2편의 영화 속 아버지를 소개하면서 당신이라면 어떤 아버지가 되겠냐고 묻습니다. <빌리 엘리어트> 속 광부 아버지는 막내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아버지를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는 희극 배우가 되고 싶은 아들의 꿈 대신 자신의 꿈을 강제 주입하는 아버지를 보여줍니다.
방송을 보는 내내 마음이 아파고 옛 추억도 생각나면서 동시에 내가 놓친 부분까지 알려주는 정보와 패널들의 시선과 현재 사회와의 접목 등이 보고 듣고 배울 것이 꽤 많았습니다. 조만간 <죽은 시인의 사회>를 다시 관람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