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기적을 담은 서울역사박물관의 88올림픽과 서울 전시회
한국 근현대사는 역동적인 대하드라마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드라마틱한 나라라고 합니다. 돌아보면 우리 한국인들은 정말 역동적인 사건 사고의 연속이었습니다. 전 이 역동성이 80년대로 끝날 줄 알았는데 박근혜 정권을 평화적인 시위로 무너뜨리는 걸 보면서 역시 한국인들은 달라! 정말 멋지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록 평소엔 고쳐야 할 점도 많지만 뭔가 이루어내는 데는 일가견이 있습니다.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경제발전과 평화적인 정권 교체 및 민주주의를 만든 나라가 한국입니다. 아시아의 등불이라는 말이 헛된 말이 아닙니다. 누구보다 국뽕을 싫어하지만 우리는 참으로 잘 살아왔습니다. 물론 현재는 항상 팍팍하고 팍팍합니다만 그럼에도 앞으로 잘 나아가고 있습니다. 죽기 전에 통일이 되면 더할 나위가 없겠습니다. 이 한국의 거대한 성장을 돌아볼 수 있는 전시회가 있어서 찾아가 봤습니다.
한국을 세계에 알린 88올림픽
매일 데모를 했고 외삼촌은 전두환이 80년 광주민주항쟁을 덮기 위해서 기획한 것이 88올림픽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실제로 전두환은 3S 정책 중에서 스포츠를 선택해서 국민들의 관심사를 스포츠에 쏠리게 했습니다. 그래서 80년대 초에 프로축구, 프로야구가 시작되었죠. 이 스포츠 정책의 정점이 88올림픽이었습니다.
88올림픽을 당시 대학생들은 좋게 보지 않았지만 놀랍게도 88올림픽 기간에 대학생들은 시위를 하지 않았습니다. 각 전철 입구에서 가방 검색을 해서 막은 것도 있지만 어떻게 든 하려고 마음이 있었다면 시위를 했을 겁니다. 그럼에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인천의 소매치기 범들은 올림픽 기간에는 지갑을 훔치지 말자고 결의를 했습니다. 하늘엔 조각 구름 떠 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 있었던 88 올림픽을 추억하는 전시회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입구에는 당시 선수들이 타고 다녔던 아세아자동차의 미니 버스가 있네요.
7월 26일부터 10월 14일까지 서울역사박물관 1층에서 전시를 합니다. 당연히 무료 입장입니다. 전시회 제목은 <88올림픽과 서울>입니다.
88올림픽의 시작은 84년부터였습니다. 84년 LA 올림픽을 보면서 다음 개최지인 한국의 서울은 전 세계의 이목을 받기 시작합니다. 한국에서도 올림픽 열기를 끌어 올리기 위해서 86 아세안 게임을 테스트 삼아서 88올림픽을 준비했습니다.
한국이 올림픽을 개최할 줄은 전 세계가 다 몰랐습니다. 지금이야 당시 아디다스 회장에게 로비를 해서 따낸 것이 밝혀졌지만 당시는 한국의 국력 신장의 결과로 알았습니다. 일본 나고야를 제치고 한국이 88년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되었습니다. 이때가 81년으로 기억됩니다. 매일 방송에서는 쎄울을 외치는 사마란치 IOC 위원장의 영상을 보여주고 보여주고 또 보여줬습니다.
사실 좀 모험이었습니다. 서울시장도 전두환 측근이나 스포츠 관계자들 모두 한국이 올림픽 개최할 깜냥이 되지 않는다고 반대했지만 전두환은 광주민주화항쟁의 핏빛을 지우기 위해 무리하게 개최 시도를 하고 성공을 합니다.
1981년 올림픽을 유치하고 한국은 변화가 시작됩니다. 여전히 군부 정권이 장악한 한국이지만 1982년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 되었습니다. 1982년 한국을 개발하는 한강유역 개발사업이 착공을 하고 지하철 2호선이 완공됩니다. 1983년 2호선은 전체가 완공됩니다. 서울 지하철에서 가장 많이 타는 전철이 2호선이죠. 같은 해 교복자율화가 시작되면서 호크 교복은 사라집니다. 갑갑한 시절에서 조금 훈풍이 불어옵니다.
88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는 지금봐도 인기 마스코트였고 정말 귀여웠습니다. 관련 상품도 많이 팔렸고요.
서울올림픽 주제가인 '손에 손잡고'는 유럽에서 인기 차트 1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당시 조용필과 김연자 등이 서울올림픽 노래를 불렀지만 국제적인 인기가 없다는 이유로 해외 유명 작곡가에 의뢰를 하고 유럽에서 인기를 끌던 '코리아나'에게 주제가를 맡겼습니다. 당시 이 노래는 정말 한국에서 지겹도록 많이 나왔고 해외에서도 인기가 높았습니다.
88올림픽은 대성공을 거둡니다. 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 미국과 서방 국가들이 보이콧해서 출전을 하지 않았고 84년 LA올림픽은 소련과 위성 국가들이 보복으로 참가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소련과 위성 국가들이 참여하면서 88년 서울올림픽은 평화의 제전이 됩니다. 북한은 출전을 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세계 스포츠 축전을 엽니다.
이 88올림픽 전후의 풍경은 인기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덕선과 그의 친구들이 아주 잘 표현해 줍니다. 응팔에서도 나오지만 88올림픽 개회식의 최대 오점은 성화 점화였습니다. 승강기 같은 걸 타고 지,덕,체를 대표로 하는 3명의 최종 주자가 성화대에 불을 붙였습니다. 문제는 이 성화대 위에 바로 전에 날린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가 많이 앉아 있었습니다. 비둘기들이 앉아 있는데 성화를 붙였고 비둘기들이 바로 죽었습니다. 죽는 장면이 적나라하게 나온 건 아니지만 다들 알고 있었죠. 비둘기들이 죽었다는 것을요. 그래서 지금도 비둘기 화형식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이후 올림픽에서 비둘기를 날리는 풍경은 사라졌습니다. 뭐 어쩌겠어요 계획에 없던 작은 비극인데요. 문제는 당시 한 방송에서 관계자가 비둘기들 다 날아가서 안 죽었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 아직도 기억나네요.
88올림픽 기념품도 참 많이 판매되었습니다. 88올림픽 주경기장 모양의 재떨이가 아직도 기억나네요.
88올림픽 장애자 올림픽 대회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장애인 올림픽이라고 하죠.
88올림픽 당시 총천연색 사진을 담은 신문 사진 스크랩도 있네요.
88올림픽 총 관람객 수는 325만 명입니다. 물론 이걸 다 믿으면 안 됩니다. 비인기 종목은 서울의 중고등학교에 강제 할당해서 보게 했습니다. 저희 학교에는 복싱, 역도가 배정되었습니다. 개회식 행사 하느라고 몇몇 학교들이 여름 내내 연습과 연습을 했습니다.
88올림픽 전후로 많은 도시 기반 시설이 만들어집니다. 올림픽대로가 개통을 했습니다. 86년 중학교 시절 한강 근처에 있다는 이유로 교통비도 안 주고 4시까지 여의도로 모이라고 하더니 올림픽대로에 있던 돌을 치우라고 지시하더군요. 중학생에게 도로 청소를 시키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에도 짜증났던 기억이 나네요. 학생을 인부로 여기는 군사 정권, 인권 무시 정권 시절이었습니다.
항상 막히는 거대한 주차장인 서부간선도로도 개통합니다. 올림픽 대교도 만들어집니다. 온통 올림픽입니다. 그래서 88올림픽을 기념해서 88이라는 담배도 나왔습니다.
88올림픽을 기폭제로 강남의 시대가 열립니다. 영화 <강남 1970>에서 강남 개발 잔혹사가 그려지고 그 이후에 뽕밭이던 강남에 3호선, 4호선이 들어갑니다. 특히 3호선은 강남 구석구석에 상수도처럼 들어갑니다. 2호선과 함께 3호선이 지나는 곳은 거대한 성장이 일어납니다. 역세권 역세권 하는데 강남 개발을 보면 지하철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 알 수 있습니다.
서울올림픽을 전후로 서울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를 합니다. 매일 같이 시위로 서울 하늘은 뿌옇게 변했지만 3저 경제 호황기로 대학교 3학년까지 시위를 하다가 1년 바싹 공부하고 졸업하면 4년제 대학생들은 지금에 비하면 대기업에 쉽게 취직을 했습니다. 경제 활황기였습니다.
3저란 저유가, 저금리,저달러로 기업하기 아주 좋은 시절이었습니다. 지금의 중국산 제품처럼 저가 공세로 미국 시장을 뚫고 있었고 수출이 아주 잘 됐습니다.
마이카 시대의 시작이 80년대에 시작되었습니다. 당시는 자가용이 있던 집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80년대 노동운동이 극심해지고 노동운동을 통해서 임금이 가파르게 올라가자 노동자들이 너도나도 차를 사기 시작합니다.
당시 잘 팔리던 차량 중 하나가 기아의 브리샤와 현대의 포니입니다. 브리샤는 자체 개발한 차량은 아니고 일본 마쓰다 차량을 국내에서 생산 조립한 차량입니다.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송강호가 타고 다니던 차량이기도 하죠.
82년 프로야구가 시작됩니다. 당시는 TV 중계를 주말에만 해주고 가끔 평일에도 해주었지만 전 경기를 해주지 않았습니다. 대신 라디오에서 프로야구 중계를 해줬는데 그 라디오 중계를 매일 듣던 시절이 떠오르네요. 전 MBC 청룡 팬이었고 지금은 LG 트윈스 팬인데 따이씨~~~~ LG 트윈스 야구 너무 못해요.
VCR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가정마다 VCR이 보급되면서 비디오 문화가 급속도로 퍼집니다. 비디오 대여점이 동네마다 있었습니다. 대여료 인하 경쟁도 아주 심했죠. 예식이나 기념식을 VCR로 녹화 하는 시대의 시작도 이 80년대입니다.
조용필 10집, 서울,서울,서울도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조용필은 참 대단한 가수에요. 전성기가 따로 없다고 할 정도로 지금도 엄청난 인기를 보여줍니다. 노래도 요즘 노래처럼 세련되었고요.
정말 모두가 함께 이룬 88올림픽 성공이었습니다. 날씨도 얼마나 좋았는데요. 올림픽 기간 내내 비 한 번 안 내렸다가 폐막식이 있던 날 새벽에 비가 내려서 마라톤 하기 딱 좋은 날씨였습니다. 평창올림픽처럼 하늘이 도운 올림픽이었습니다.
88올림픽의 최대 성과는 한국에 대한 이미지 개선입니다. 서양인들이 한국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1950년에 발생한 한국전쟁입니다. 이후 한국에 대한 보도나 이미지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88년에 놀랄만큼 고속 성장한 한국을 보자 세계 사람들은 깜짝 놀랍니다. 이후 한국에 대한 전쟁 이미지가 걷힙니다.
1981년과 1989년 사이에 한국은 고속 성장을 합니다. 81년 20만대였던 차량이 89년 80만대로 4배 많아집니다. 그러나 자연공원은 크게 늘지 않았네요.
서울시 인구는 81년 867만명에서 89년 1천만명이 넘습니다. 서울시 예산은 1조 32억원에서 3조 5천억원으로 3,5배 성장을 합니다.
체육시설도 많아집니다. 다만 이 체육 시설이 강남이라는 평지에 대규모로 심어지죠. 체육시설이 88년 전후로 지어진 후 리모델링이 되지 않아서 낡고 볼품이 없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88 올림픽의 최대 긍정적인 변화는 화장실입니다. 당시 한국은 재래식 화장실이 대부분이었고 가끔 수세식 화장실이었습니다. 이걸 창피하게 여긴 정부는 수세식 화장실 보급에 큰 노력을 합니다.
지금은 한국의 화장실 문화가 발달하고 인심도 후합니다.
3저 호황은 꿈 같은 나날을 만들어줍니다. 그러나 90년대 들어서 해외 언론들은 샴페인을 너무 빨리 터트렸다면서 한국 경제의 흥청망청을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곪을대로 곪은 한국 경제는 97년 IMF가 터지고 맙니다. 당시 한국 가정은 흑자였지만 대기업들이 적자 경영을 하다가 부채를 이기지 못하고 부도가 납니다.
80년대는 이념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80년대 이야기를 하니 한도 끝도 없겠네요.
위 이미지에서 점선은 성화 봉송로였습니다. 이 성화 봉송로에서 판자촌이 보인다면서 전두환 정권은 상계동 달동네를 포크레인으로 부셔 버립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집에서 밥 먹고 있는데 포크레인으로 집을 부셔 버리는 정권이었습니다. 다큐 '상계동 올림픽'에 이 이야기는 담겼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거대한 아파트 단지를 지었습니다. 이런 행동을 한 나라가 또 있죠. 바로 중국입니다.
가만히 보면 일본의 10년 후가 한국이고 한국의 10년 후가 중국 같습니다. 세 나라는 서로를 아주 미워하면서 하는 행동은 참 비슷합니다. 중국도 베이징 올림픽 한다면서 볼품없는 판자촌을 거대한 벽으로 가리거나 강제 철거 했습니다.
88올림픽 페막일 오전에 있었던 마라톤 대회가 여의도에서 강남을 도는 코스를 달렸습니다. 이 코스는 한국에서 가장 발전된 지역이자 가장 부동산 가격이 비싼 지역입니다. 이 마라톤 대회는 서울의 부감을 보여주고 발전상을 보여주는 모습이 담기기에 아주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이 마라톤 코스가 한국의 신 시가지이기도 합니다.
신 시가지의 대표인 강남과 송파는 서울시의 계획으로 만들어진 곳입니다. 위 지도를 보면 1960년 한강은 잠실도가 있었습1니다. 한강의 폭은 다른 나라의 강처럼 강폭이 아주 넓지 않았습니다. 워낙 강수량 편차가 심해서 모래 사장이 많은 강이었죠. 또한 범람도 자주 했습니다. 이에 서울시는 한강 전체를 개발합니다.
그렇게 개발이 시작된 한강은 여의도를 섬으로 만들고 잠실도를 강남으로 붙여 버립니다.
위 지도에서 푸른 물길이 예전 한강 물길입니다. 잠실도 위에 올림픽 주 경기장 등이 들어섭니다. 잠실도는 강남에 붙여서 섬이 사라졌습니다. 다만 그 흔적이 남아 있는데 롯데월드 매직 캐슬의 호수가 그 흔적입니다. 원래는 한강의 지류였는데 간척 사업으로 호수로 만들어 버립니다.
88올림픽 전후로 강남은 신 시가지 역할을 하면서 서울의 경제 중심지가 되고 지금까지 그 중심지 역할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온갖 대형 시설과 국가 시절과 관공서가 강남에 세워집니다.
남이 땅값이 비싸다고 하지만 정작 뒷골목 걸어보면 서울의 여느 골목길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좁디 좁은 골목길에 편의 시설은 많지 않습니다. 다만 전철이 블럭마다 있다고 할 정도로 촘촘하게 잘 깔아 놓았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동차 보급률이 높은 강남이고 그래서 매일 같이 막히고 막히는 강남인데 전철은 또 엄청나게 잘 깔아 놓았습니다. 물론 이 전철은 거주민 보다는 회사를 출퇴근 하는 사람들의 몫이기도 하죠. 도시는 정치라고 해서 권력 높은 정치인들과 고위 공직자 그리고 언론사 고위직이 강남에 많이 살다 보니 각종 인프라는 아주 잘 깔아 놓았습니다.
다른 건 크게 안 부러운데 올림픽 공원은 부럽습니다. 올림픽 공원을 10년 만에 가봤는데 서울 안에 이렇게 큰 공원이 있었나 할 정도로 그 규모가 엄청나더군요. 서울숲도 크지만 올림픽 공원의 규모와 관리에 비할바가 아닙니다. 반면 서울 서남부 즉 관악구, 금천구, 구로구 주민들은 조막만한 보라매 공원이 가장 큰 공원입니다. 편의공간의 차이가 지역의 부동산 가격 차이에 큰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서울시가 균형 발전에 신경을 써야 했는데 서울시 고위 공무원이나 권력자들이 이런 균형 발전에 큰 관심을 가지기 않았던 것이 지난 일입니다.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크게 달라져 보이지 않습니다.
신 시가지 잠실과 강남. 88올림픽의 최대 수혜지역입니다.
강남은 서울이 아닌 경기도였습니다. 그런데 한국전쟁을 겪고 나니 북한이 밀고 들어와도 막을 수 있는 한강 남쪽의 중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여기에 시골에서 서울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위해서 강남 개발이 필요했습니다.
정부는 강남 개발을 위해서 많은 혜택을 줍니다. 가장 큰 혜택은 교육열 높은 점을 이용해서 강북의 명문 학교를 강남으로 강제 이주합니다. 휘문고, 경기고, 서울고 등 강북의 명문고를 강제로 이주합니다. 여기에 강북에 술집 허가를 안 내주는 등 각종 혜택을 줍니다. 또한 개발 이익에 대한 세금도 묻지 않습니다. 이런 특혜는 강남 개발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었다고 하지만 그 특혜를 타고 지금까지 강남 광풍은 이어지고 있네요.
강남 개발이 한국의 국토 개발의 역사이자 권력 기반 개발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88 올림픽 이야기를 하다가 개발 이야기로 끝났네요.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88올림픽과 강남 개발 역사는 뗄 수 없고 그 영향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88올림픽은 한국을 세상에 다시 알린 계기가 되었고 이후 한국은 전 세계에 많이 알려지고 제대로 알려집니다. 지금은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인터넷을 통해서 다들 잘 알고 있고 있지만 한국이라는 나라의 이름도 잘 몰랐고 알아도 북한이 더 많이 알려진 나라이기도 했습니다.
좋은 전시회입니다. 88올림픽 당시 자료와 다시 시대상과 관련 영상 및 관련 포스터와 기념품 등등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10월 14일 전시를 하니 10월 초에 들려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