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메라사진/외국사진작가

예술사진을 내가 카메라로 찍으면 그 사진도 예술사진일까?

by 썬도그 2011. 3. 4.
반응형

사진을 너무 많이 찍으면 그 사진의 무게에 질려버려서 사진을 업로드 하지 않습니다.
작년 가을 남도 여행에서 전주 한옥마을 이야기는 가득 했지만  그 다음날 일정인 광주 비엔날레 포스팅은 하나도 하지 못하고 지나갔습니다.  늦게 한 이유중 하나는 나중에 천천히 예술작가들을 소개해도 그 빛이 퇴색되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좀 방치했네요  

오늘 부터 조금씩 소개해 볼까 합니다.  저 앳된 도슨트도 생각나기도 하고요. 제가 여러 전시회를 가봤지만 가장 앳된 도슨트였습니다. 10대 소녀 같은 모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네요. 그렇다고 말이 어눌하거나  있잖아요~~~ 식의 특유의 10.20대 여자분들의 말투가 아니였습니다. 

2010 광주 비엔날레에는 많은 사진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격세지감이죠. 이제는 당당히 시각예술의 한축을 넘어서 주류가 되고 있는 사진,  하지만 10년전만 해도 사진은 예술가 특히 미술가들이 천대시 했죠.  그 이유는 사진 본연의 뛰어난 재생력과 순간성에 있을 것 입니다.

미술 작품 하나 그릴려면 몇 년 몇 개월 몇 일이 걸리는데 사진은 1초도 걸리지 않죠. 뭐 사진 한장 찍는데 들이는 그 전의 시간은 사진에 잘 담기지 않잖아요.  뭐 이런 저런 이유로 미술계에서 사진을 천대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같은 전시회라도  사람들은 미술전시회보다는 사진전시회를 택합니다. 사진은 거의 대부분의 구상사진이기에  어떤 사물이 담겼는지 잘 알 수 있잖아요.  구상사진이라는 것은 우리가 어떤 이미지를 인지할 수 있다는 것인데요. 그 사물이 어떤 알레고리를 가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사람, 풍경, 사물이 올곧이 담기기에  아주 좋아 합니다.

이제는 사진 무시하면 큰코 다칩니다. 시각예술의 첨병역활까지 하고 있으니까요
도슨트는 저를 사진의 무리속을 헤치면서 길안내를 잘 해주었습니다. 그중 가장 인상깊었던 사진이 있었습니다. 

이 사진은  현대사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워커 에반스의 사진들입니다. 

작년에 한국에서도 전시회를 했었습니다. 

워커 에반스의 사진은  사진을 좋아 하는 사람들이나 사진 역사를 들쳐보는 사람들에게 꼭 한번 들어봐야 할 이름이죠
위 사진은 다큐멘터리 사진의  대가인 워커 에반스의 사진들입니다.


위 사진과 똑 같은 사진일까요?   눈썰미 있는 분들은 위위의 사진과 바로 위의 사진이 닮았지만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맞아요. 좌우가 바뀌었는데 거울에서 본 내 모습 같기도 합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  워커 에반스의 흑백사진을 위에서 그대로 카메라로 촬영해서 자신의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작가가 있습니다.  개념주의 에술가인  세리 레빈(1947~)은  워커 에반스의 사진집을 그대로 카메라로 촬영해서   '워커 에번스를 따라서'라는 작품을 만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리 레빈에 비판을 했습니다.
이건 표절이다. 도둑질이다.  별 욕을 다 하고 비판을 했습니다. 하지만  세리 레빈은  '차용'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것 뿐입니다.

뒤샹이  소변기를 뉘여놓고 '샘' 이라고 한 것 이상의 괘씸함이죠.  뒤샹은 상점에서 파는 변기 하나 들고와서는 뉘여 놓고 
'샘'이라고 명명했다가 엄청나게 욕을 먹었지만 지금은 어떤가요? 아주 숭상하고 있죠. 몇년 전 한 미친 관객이 그 '샘'이라는 작품을 망치로 부셨는데  박물관에서 조각 하나하나를 모아서 접착제로 붙였다고 하죠

예술이란 참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나 같으면 그냥 비슷하게 생긴 소변기 사서 뉘여놓고  '새로운 샘' 이라고 해도 될 듯 한데요. 예술이란 어쩌면 의미 부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진도 따지고 보면  헛것이예요.  사진이 무슨 증명성이다 사실성의 최고봉이다 하지만 그 인물사진이 그 사람의 본질을 담고 있을까요?   그 사람의 앞모습만 보고 이 사람은  어떠어떠 할것이라도 우리는 판정을 내려버리죠. 

그 사진속 인물에 대한 자신만의 평가라고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사진은  사진작가 즉 카메라로 그 인물을 담는 사람의 의도와 정치성이 다분히 베어 있습니다.   어떤 유명 연예인의 사진들 중 특정한 사진작가의 사진을 선호하는 이유는 그 사진작가의 사진을 보는 시선과 모델을 보는 시선이 좋고 그 좋은 시선을 모델이 좋아하고 우리가 좋아할 때 그 사진이 유명해지죠.  

이렇게 사진에는 여러가지 시선과 정치적인 색채가 묻어 날 수 있고 이 생각을 확장하면 사진은 결코 객관적일 수 없다고 봅니다.  왜 그런거 있잖아요.  여자 연예인들의  화장 후 사진과 화장 전 민낯사진을  동시에 올려놓고 우리는 그 괴리감에서 손발이 오그라들잖아요. 이렇게  우리는 꾸며진 상태의 이미지만 보고 그게 연예인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워커 에반스의 사진도 인물의 본질을 한장의 사진으로 다 담기 힘듭니다. 
물론 에반스가 저 인물을 여러장 찍었겠지만 우리는 유명한 사진 한장으로만 소비하고 말잖아요. 

세리 레빈은 1981년 '워커 에반스를 따라서'라는 연작을 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워커 에반스도 신이 만든 피조물을 복제한 사진작가다.   그 복제된 이미지를 다시 복제하는게 무슨 큰 잘못이냐~~  참 당당한 말투죠.  어떻게 보면 궤변일 수도 있습니다.

세리 레빈은 다큐멘터리 사진이 가지고 있는 가부장적인 권위를 허물어 트렸습니다. 
인간의 고통을 상품화하고 미화시키는 것에 대한 비판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도 리비아에서 혹은 중동지역에서  이라크에서 아프카니스탄에서 한국에서 비참한 이미지들이 사진과 인터넷과 포털에 전송됩니다. 기자들은  그 '타인의 고통'을 상품화 하고 혹은 미화시켜서 소비자에게 보내주면 우리는 그 '남의 고통'을 소비합니다.  그리고 도움의 손길을 주죠. 문제는 이게  처음에는 도움의 손길을 주다가도   타인의 고통을 너무 많이 보면 무던해 집니다.

전 그렇습니다.
80년대 에디오피아 기아 사태에 눈물을 흘렸지만 지금 굶어죽어가는 사람들의 이미지를 보면 큰 반향을 가슴속에서 일으키지 못합니다. 그 고통의 이미지에 무뎌진거죠. 

또한 세리 레빈의 작품은  작품의 오리지널리티와 대한 의문을 제기 하기도 합니다.
세상에  새로운것은 없다고 하죠.  고흐도 피카소도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도  자신의 머리속에서 나온 이미지로만 작품을 하지 않습니다. 계속 다른 작품에 영감을 받고 영향을 받습니다. 피카소가  마티즈라는 경쟁상대가 없었다면 그렇게 화풍이 변했을까요?  서로 주고받고 경쟁하다보면 닮아가기도 서로 영향을 주기도 하죠

마찬가지입니다. 유명한 작가의 이미지들이  자기 머리속에서만 나온것은 없습니다.
음악가들은 어떤가요?  표절시비가 끊임없은 가요계. 이 더러운 굴레를 어떻게 끊어야 할까요?  책 처럼 어디어디서 
영향을 받았다라고 쓰면 될까요?  음악계가 특히 이런  즉 자신이 영감을 어디서 받았다고 말하는데도 그걸 인정하는데도 참 박합니다.  그러니 무조건 자기가 다 썼다고 주장하죠.

세리 레빈은 이런  유명 작가들의 사진과 이미지에 대한 노골적인 차용으로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심한 의문을 제기 합니다. 


오른쪽은 워커 에반스의 사진이고 왼쪽은  세리 레빈의 사진입니다. 
둘다 예술작품일까요? 아님 세리 레빈은 쓰레기 일까요?  


내가 브레송의 유명한 사진을  고 해상도 카메라로 찍어서 남들에게 보여주면 그 사진은 누구의 사진일까요?
복제의 시대에 사는 현재, 오리지널리티의 의미가 희미해지는 현재, 우리는 어떤것을 지키고 어떻것을 과감하게 공유해야 할까요.   구글처럼 무한 정보공유의 시대가 올바른 문제일까요? 아님  이미지 하나하나도 저작권을 걸어서 보호해야 하는게 옳을까요?  

루이비통 진품 가방을 가지고 다니느 여자와  짝퉁인줄 알면서도  진품과 구분을 못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을 속일 수 있기에 좀 싼 가격에 진품의 아우라를 느낄 수 있는 짝퉁 들고 다니는 여자가 현명할까요? 대다수의 사람들은  진품의 아우라도 느끼지 못하는데  진품을 꼭 들고 다닐 필요가 있을까요?  

여러가지 질문을 할 수 있는  세리 레빈의 작품입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