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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영화창고

(영화 도쿄)실업, 광끼, 히키코모리, 도쿄를 바라보는 3가지 시선

by 썬도그 2011. 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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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타자의 시선을 너무나 많이 의식한다.  박지성의 일본평가는? 김연아의 일본평가는?
소녀시대의 일본평가는?  우리는 우리안에서 우리를 평가하는데 인색하다. 아니 너무 많이 한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의 평가보다는 타자의 평가를 더 가치있게 생각한다. 특히 우리보다 더 잘사는 서양인들의 시선을 더 즐겨찾기 한다

영화 '도쿄'는 타자들의 시선으로 담은 도쿄 담론이다.
도쿄라는 도시적 배경으로 프랑스의 두명의 명감독과  한국의 국가대표 감독이 그 도쿄를 스크린에 담았다


아키라와 히로코 - 미셀 공드리   


아키라와 히로코는 연인이다.  아키라는 감독지망생이고 그런 그를 뒷바라지하는 착한 히로코가 있다
이 부유하는 청춘은 집이 없어서 회사에 다니는 히로코의 친구네집에 같이 지낸다. 친구가 눈치를 주지만 따로 갈곳도 없다. 매번 집을 구하러 나가지만 매일 같이 실패한다. 

이 작은방에서 3명의 이상한 동거가 시작된다.  히로코는 닥치는대로 일을 하면서 한량인 남자친구의 감독의 꿈을 키우고 있다.  고시원생보다  쪽방촌의 21세기 버젼인 고시원같은 방에서  워킹푸어의 집에서 같이 산다.

포부가 없다는 소리를 듣는 히로코, 이런 히로코가 카프카의 소설 '변신'에서 처럼 의자로 변하게 된다.
누군가가 그런 의자로 변한 히로코를 자기네집에 가져다 놓은다.  히로코는 의자였다.  누군가가 잠시 앉아서 편함을 느끼게 하는 존재.  남자친구에게 히로코는 의자같은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히로코는 그렇게 의자로써의 삶을 만족한다.  이 옴니버스 영화 도쿄의 첫째장은 도쿄에서 사는 부유하는 청춘들의 쓰라림을 담고 있다.  젊은이 대다수가 실업자이거나 아르바이트로 삶을 연명해가는 '프리터족' 혹은 니트족이 된다.  한국은 5년전의 일본과 같다고 한다.  한국도 프리터족이 늘고  졸업후 직장없이 부모님들의 용돈을 살아가는 니트족이 점점 늘고 있다.

과연 우리의 청춘들은 행복할까? 그리고 이 나라의 미래가 과연 행복할까? 도쿄에서 서울을 본다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의자)가 된것을 기뻐하는 히로코. 그녀는 행복하다




광인 - 레오 까락스 

맨홀뚜껑을 열고 광인이 도쿄로 나왔다. 그는  꽃과 돈을 주식으로 하는 붉은 머리와 꼬부랑 수염을 가진 광인이다.  사람들은 그의 출몰에 기겁을 한다



광인은 지하공간에서 사는데 그곳에서는 우리를 욱하게 만드는 욱일승천기가 있고 수류탄등 2차대전의 잔재들이 많이 남아 있다. 광인은  수류탄을 들고 지상으로 나온다. 그리고 수류탄으로 마구마구 살인을 한다

그리고 그는 재판을 받게 된다. 광인은 광인만의 언어를 쓴다.  광인의 만행을 사람들은 궁금해 하지만 그는 엉뚱한 말만 한다.  검사가 묻는다.  일본의 어떤것이 싫은가?  

오래산다는 것도 싫고 생긴것도 짜증난다고(영화에서는 더 직설적으로 말하지만) 한다.
까뮈의 이방인처럼 이유가 없다. 하지만  이 점잖은 일본인들은 그 이유를 알아야 직성이 풀린다
그리고 그는 죽는다. 하지만 죽지 않았다. 교수형을 받고 사망선언을 당했지만 그런것 따위 그에게는 
관심없다. 다리 좀 긁다가 사라진다

이 영화는 레오 까락스가 연출했다.  레오 까락스는 이상한 문화현상인 '퐁네프의 연인들'을 연출한 천재 프랑스 감독인데 이 예술영화가 한국에서 대히트를 친다.  문화평론가들도 희한안 현상이라고 말할정도로 92년 서울은 예술감이 충만했던 연도였던것 같기도 하다

영화는 핸드헬드와 핸드폰 영상등 영상적 실험과 함께 간결한 메세지를 던져주고 있다
지하에 살고 있는 우리가 덮어둘려고 했던 광끼들이 도시위를 질주한다. 우리에게는 그 광인이 일본의 군국주의로 보였을것이고  누군가에게는 도시인의 이면에 있는 광끼라고 할 수도 있다. 

서울의 지하속에는 뭐가 살까? 마녀들이 살까?  xx녀라고 하는 마녀들이 민방공 훈련처럼 주기적으로 맨홀 뚜껑을 열고 미친년 널뛰기하듯 서울 도심을 달리면 우리는 핸드폰을 그걸 찍고 xx녀라는 예쁜 이름을 붙여주고 포털들은 그걸 세상에 전파하며 뉴스가 그걸 마무리한다.   그녀들도 미쳤지만 그런 모습에 웃고 욕하는 우리도 미쳤다



흔들리는 도쿄 - 봉준호

아버지가 매달 보내주는 새뱃돈 같이 빳빳한 새돈으로 10년간 집안에서만 사는 히키코모리
그는 모든 것을 배달로 해결한다. 주말에는 피자배달을 시켜먹는다. 그는 한번도 배달원의 눈을 보지 않는다.  


그러다 배달원의 다리를 훔쳐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배달원과 눈이 마추친다. 그리고 세상이 흔들린다.
그녀가 쓰러진다.  쓰러진 배달원을 보고 어쩔줄 몰라하다가  그녀의 몸에 있는  문신같은 전원버튼을 눌러서 그녀를 깨운다. 그렇게 그녀는 사라진다. 그 짧은 순간 이 히키꼬모리는 10년만에 사랑을 느끼게 된다



일을 그만둔 피자배달원을 찾기 위해 이 10년된 히키코모리가  사랑을 찾아가기 위해서 문을 나선다.
그렇게  달린다. 달리다가 깨달았다.  거리에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안다.  모두가 히키코모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그녀도 히키코모리가 되었다.  히키코모리가 히키코모리가 막 된  그녀의 창문을 두들긴다

그러나 문은 더 굳게 잠긴다.  그때 지진이 일어난다.  사람들은 문을 열고 거리로 나온다. 하지만 지진이 멈추자 다시 집안으로 들어간다.  그녀도 지진때문에 나왔다가 다시 집으로 들어갈려고 하다가 남자가 잡는다
그리고 그녀의 몸에 있는 러브라고 써있는 문신같은 버튼을 누른다

이 흔들리는 도쿄는 일본의 사회문제인 히키코모리 문제를 아주 재미있게 담고 있습니다.
모두가 완벽한 세상을 꿈꾸면서 집안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피자배달원이 히키코모리집을 둘러보고 완벽함을 느끼고 자신의 세상의 불완전함을 한탄하면서 완벽해지기 위해 집으로 들어가는데 지구의 완벽하지 못함인 지진이 그들을 잠시 밖으로 끄집어 냅니다. 지진이 많은 일본이기에 집안에만 있으면 큰 화를 당할 수가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다른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히키코모리 현상이 일본에서 많이 발생합니다. 

하지만 한국도 일본과 크게 다르지 않죠.  봉감독이 연출한 흔들리는 도쿄가 개인적으로는 가장 좋았습니다. 봉테일이라는 말처럼  히키코모리 집이 덩굴로 감싼 모습의 디테일은 정말 대단하다는 말밖에 안나오더군요. 단지 거리에 비현실적이게 로봇이 피자를 배달하는 한컷은  좀 오버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도쿄를 3명의 외국인 감독이 담았고 결코 아름다운 소재들은 아니였습니다. 프리터족, 히키코모리, 광끼,
결코 도쿄를 아름답게 포장하지 않는 이 영화에 많은 일본인 배우들이 출연했다는 자체만으로 도쿄라는 도시는  포용성이 있는 도시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만약 외국인 감독이 서울이라는 주제를 놓고 옴니버스 영화로 만들었는데  그 주제들이 대학등록금, 비정규직, 이념갈등이라는 주제로 담았다면 과연 우리는 그런 영화를 곱게 볼 수 있을까요?  
일란성 쌍둥이 같은 도쿄와 서울  영화 도쿄를 보면서 서울이 떠오른것은 저뿐만이 아닐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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