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봄 연세대 교정을 거닐다가 이 거대한 돌과 그 앞에 쓰여 있는 숫자를 한참 봤습니다.

198769757922
암호 같아 보이는 이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숫자는 끊어서 봐야 이해가 갑니다.
1987 = 1987년

69 = 6월 9일 연세대학교에서 6.10 출정을 위한 연세대 궐기 대회가 열렸습니다. 이 6월 9일에는 박종철 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 출정을 준비했습니다. 호헌 철폐란 전두환이 헌법에 있는대로 간선제로 다음 대통령을 뽑겠다 즉 전두환의 친구인 노태우에게 정권을 물려주겠다는 의지를 표명했고 이에 전 국민들이 일어나서 헌법을 고쳐서 다시 민주주의의 상징인 대통령을 우리 국민이 직접 뽑는 직선제로 바꾸라는 소리가 바로 호헌 철폐입니다.
이 6월 9일에 연세대 정문에서 시위를 하던 이한열 군이 전경이 쏜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쓰러진 날입니다. 전경의 최루탄 총은 곡사로 싸야지 직사로 쏘면 사람이 맞아서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직격을 쐈고 그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서 이한열 군이 사망합니다. 최루탄을 쏜 사람은 알 겁니다. 자신이 쐈는지를요.
그 전경도 이한열과 같은 또래일텐데요.
75 = 27일 동안 사경을 헤매던 이한열군은 7월 5일 새벽 사망을 합니다. 부검 결과 최루탄 피격이 직접적인 사망 원인이었습니다.

79 = 7월 9일 6월 민주 항쟁의 기폭제가 된 이한열 열사가 민주국민장으로 장례식이 열립니다. 전국에서 16여만 명이 참여한 추모식은 연세대 본관을 출발해서 신촌로터리를 지나 서울시청 앞까지 이어집니다. 영화 1987에서 김태리가 본 장면이 그 장면입니다.
22 = 그때 이한열 군의 나이 단지 22살이었을 때
1987년 6월 10일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시작점인 6.10 민주 항쟁

역사를 일베에서 배운 20,30대 청년들이 참 많습니다. 이명박 정권이 심어 놓은 혐오의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서 독재를 찬양하고 혐오와 조롱이 일상인 세대를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이준석이라는 혐오의 아이콘이 남녀 갈라 치기를 심화시켰습니다. 한국사에서 현대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다 보니 같은 역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공과가 있는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오히려 잘 되어 있는 편이지만 이승만은 윤석열이 나오기 전까지는 공이 거의 없는 조선으로 만하면 선조와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자국민을 반공청년단을 지원해서 학살을 자행하고 친일 역사를 청산하려는 반민특위를 해산시킨 아주 아주 못난 대통령이죠. 그러나 건국의 대통령이라는 소리를 하는 세력들이 등장하는 걸 보면 이명박 정권이 바꾼 삐뚤어진 역사 인식은 이제는 뿌리를 잘 내려서 정착단계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그냥 뽑기로 뽑은 건 줄로만 아는 분들에게 그 1987년 공기를 전하고자 이 포스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1987년 대학생 시위가 극렬했던 그 해 일반 시민들이 일어서게 된 2개의 사건

모든 내용은 영화 <1987>에 잘 담겨 있고 현대 역사 교과서로 활용해도 좋을 정도로 뛰어난 영화가 바로 <1987>입니다. 대학생들의 시위는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계속되었습니다. 한국은 계엄령 강국으로 무려 10번 이상의 계엄을 때렸던 나라입니다. 툭하면 계엄을 때렸습니다. 그게 군사 독재 정권 박정희였습니다. 법을 고쳐가면서 2선, 3선을 지나서 평생 대통령 해 먹겠다고 하자 대학생들은 연일 시위로 박정희 정권을 비판했죠.
이에 박정희 정권은 군홧발로 때려 잡고 강제로 군대에 입대시켜서 정신 교육을 시키는 등 폭압을 시전 했습니다. 그러다 부하의 총탄에 사망합니다. 이후의 이야기는 영화 <서울의 봄>에 잘 나옵니다. 박정희가 아끼던 전두환이 대통령이 됩니다. 이후 폭정은 더 심해졌고 결국 1980년 5월 18일 광주 전남도청 앞에 있던 시민들에게 공수부대가 총을 쏴서 학살을 일으킵니다. 그 이야기는 한강 작가의 소설 <소년이 온다>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서울에 사는 저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1980년에 광주에 무슨 폭동이 일어났다는 소식만 접하고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1988년 여소아대의 정국에서 물 태우라고 하는 노태우 정권은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라는 야당이 진행한 5공 청문회와 광주 청문회를 통해서 5.18의 참혹상을 알게 됩니다.
물론 이전에도 이야기는 많았습니다만 제대로 알게 된 것은 1988년입니다. 이렇게 여소야대로 이끌어내고 대선을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바꾼 사건이 6.10 민주 항쟁입니다.
1. 1987년 1월 14일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

매일 시위였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1985~6년도에 대학생 시위가 극심했습니다. 건국대에서는 학생들이 건물을 점거하고 시위를 하기도 했고요. 여기저기서 분신 사건이 참 많았습니다. 얼마나 시위가 심했는지 흐린 날 바람이 불면 교실에 최루 가스가 들어올 정도였습니다. 근처에 시위를 한 곳이 없는데 얼마나 많은 최루탄을 쐈는지 바람에 날려서 학교까지 날아오기도 했습니다.
당시는 과격한 대학생 형 누나들이 불만이 많아서 나라가 싫어서 시위를 하나 했습니다. 학교에서는 절대로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모든 교사가 침묵했습니다. 단 딱 한 분의 선생님만이 제대로 말해주었습니다. 왜 시위를 하는지 정부가 뭘 잘못했는지 알려주더라고요. 그러나 그건 한 사람의 목소리라서 다들 무시했습니다.
그러다 친구 누나의 이야기를 친구가 들려주었는데 우리가 아는 이야기와 달랐습니다. 대학생들이 폭도가 아닌 독재자인 전두환의 잘못된 점과 광주 민주화 항쟁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물론 안 믿었죠. 주변 어른들도 제대로 알려주던 사람도 없었고요. 지금같이 SNS가 있던 시대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니까요. 그러다 대림시장 앞에서 시위를 하다가 도망쳐온 대학생 형이 평상에서 마을 어른들과 나눈 이야기를 듣고 내가 알고 있던 세계와 다른 이야기가 있음을 서서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안 믿었습니다. 그러다 1987년 1월 14일 서울대 학생인 박종철 군이 고문을 받다가 죽은 사건이 터집니다. 이때부터 동네 어르신들도 부모님들도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학생을 죽여? 드디어 시민들까지 들고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이 사건은 여러 의식있는 언론사의 힘으로 세상에 알려지고 점점 독재 정권 시위가 일반 시민들까지 함께하기 시작합니다. 명동 성당으로 피해있던 대학생들을 응원하는 당시 회사원들이 넥타이 부대가 되어서 이 반독재 시위에 참여하고 동조하자 전두환 정권은 겁을 먹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1987년 내내 매일 같이 대학생들의 시위가 계속되었습니다.
1987년 6월 9일 이한열군 최루탄에 맞고 쓰러지다

한국의 역사를 바꾼 사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사진 보기 전까지만 해도 대학생 형의 이야기도 친구의 이야기도 선생님 1분의 이야기도 믿지 않거나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화염병 던지는 게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건 해도 너무했다고 할 정도로 충격적이었습니다.
최루탄을 맞고 쓰러지는 연대생의 모습을 당시 로이터 통신 서울주재 사진기자였던 정태원 사진기자가 촬영을 합니다. 이 사진은 다음 날 많은 신문사의 1면을 장식했습니다. 이 사진은 그 파급력이 엄청 났습니다. 아침밥을 먹으면서 보던 조간신문에 이 사진이 실리자 어른들도 들고 일어섰습니다.

그렇게 1987년 6월 내내 전국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대학생 시위는 시민 시위로 확대됩니다. 그렇게 매일 강렬한 시위가 계속되자 노태우가 6월 29일 간선제를 폐지하고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선거로 뽑는 직선제를 선언합니다. 그게 바로 6.29선언입니다.
이렇게 되면 다음 대통령에 노태우가 되지 못하면 전두환은 망명을 생각할 정도로 그의 악행이 바로 드러날 겁니다. 그러나 말로는 국민 염원을 받들어서 직선제 개헌을 선언합니다. 그럼 노태우가 전두환이 국민의 뜻을 따른 것일까요? 아닙니다. 다음 선거에서도 이길 자신이 있었기에 직선제를 허락합니다.
이 6.29 선언에는 중요한 내용이 있었는데 대선 후보에 나올 수 없는 내란범으로 사형선고까지 받은 김대중을 사면 복권 시켜줍니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같은 민주 인사이고 같은 뿌리의 정당에서 나온 신진 민주 인사였지만 지역 기반이 달랐습니다. 출생지가 전라도인 김대중은 전라도에서 출생지가 경남 거제인 김영삼은 경상도 특히 경상남도에서 지지를 받았습니다.
1987년 6.10 민주항쟁은 민주주의의 완성이 아닌 시작점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랍니다. 두 청년의 죽음이 피워낸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하죠. 그럼 영화처럼 해피엔딩일까요? 삶은 엔딩이 없습니다. 사람들의 삶이 이어질 뿐입니다.

6.29 선언으로 잠잠해진 시위는 그해 연말에 있었던 1987년 제 13대 대선에서 결과를 냈어야 합니다. 그러나 전두환 노태우 생각대로 김대중을 사면 복권시켜줬더니 표가 갈렸습니다. 그럼 두 야당 후보 중 한 사람이 사퇴를 하고 표를 몰아주면 됩니다. 그러나 두 엘리트 군인의 생각대로 둘은 결코 손을 잡지 않고 그대로 출마를 합니다.
김영삼, 김대중 표를 합치면 노태우보다 많지만 국민들의 염원을 외면한 김영삼, 김대중 덕분에 노태우가 쉽게 당선됩니다. 노태우의 노림수가 먹혔습니다. 여기에 김영삼은 1988년 총선 후에 1990년 김종필과 함께 민주정의당과 합당을 합니다. 그렇게 민자당이라는 새로운 거대 여당이 탄생하고 민주주의는 후퇴하게 됩니다.
그래서 전 전두환 못지 않게 김영삼 전 대통령이 참 싫습니다. 어떻게 자기가 대통령 하고 싶다고 군사독재정권과 손을 잡습니까?
노태우 정권은 낫지 않았냐는 말도 있지만 노태우 정권 때도 수많은 시위가 있었고 1991년 명지대 강경대 군을 구타해서 죽게 한 인간들이 그 유명한 하이바 쓴 백골단 경찰입니다. 노태우도 잔혹한 군사 정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살인 정권과 손을 잡다뇨. 정말 김영삼 전 대통령은 용서가 안 됩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리다.

2024년 12월 3일을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군사정권은 멸종했고 쿠데타는 사라질 줄 알았지만 행정력을 장악하고 있던 대통령이 의회 권력까지 차지하기 위해서 군인을 동원해서 국회를 봉쇄하려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쿠데타냐고 할 수 있지만 그게 바로 친위 쿠데타입니다.
공화정은 입법,사법, 행정이라는 3개의 권력으로 서로를 감시하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게 한 사람에게 몰려 있으면 그게 바로 왕정국가이자 독재 국가죠. 그날 저는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렇게 되면 또 하나의 박정희, 전두환이 태어나는 것이고 막을 수가 없을 줄 알고 절망의 밤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방법이 있다는 소리에 놀랐습니다. 방송에서는 1987년 개헌을 하면서 쿠데타를 너무 자주 하니까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해도 국회의원 과반 이상이 참석해서 과반이 반대하면 계엄 선포가 무효가 됩니다. 그래서 윤석열이 150명이 넘었냐고 계속 물어보고 끌어내라고 지시했죠.
이 법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1987년 개헌할 때 이 조항을 넣었습니다. 계엄령을 막는 안전장치가 추가되었습니다. 이 조항은 광주민주화항쟁과 박종철, 이한열 열사가 아니었다면 넣지 못했을 겁니다. 이 안전장치 덕분에 그 새벽에 계엄령이 해제가 되었습니다.

살아보니 기술과 과학은 매년 발전하는데 인간의 성품이나 마음씨는 발전하는 게 아닌 반복되는 걸 절실하게 느낍니다. 미국도 한국도 점점 마음의 양극화에 거짓 뉴스에 휘둘리고 혐오와 갈등을 먹고 자라는 젊은 세대를 보면서 인간의 무능을 점점 더 깨닫게 되네요.
역사가 반복되는 이유는 우리 인간의 나약함과 무능함과 반성없고 성찰 없는 삶이 늘기 때문이 아닐까 하네요. 숏폼에 물들고 자극만 찾고 거짓뉴스를 검증도 못하는 낮고 얕은 판단력이 또다시 독재자를 나오게 하고 쿠데타가 나오게 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럼에도 희망이 있다면 한국은 그 어려운 탄핵과 새로운 대통령을 만들어 낸 나라로 이제는 또 하나의 민주주의 롤모델 국가가 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미국인들도 한국을 부러워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우리는 역사에서 배워야 하지만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왜곡해서 가르치는 늘봄학교 같은 사회의 암들을 제거해야 건강한 민주주의 사회가 될 겁니다.
위 사진은 연세대 이한열 동산에서 촬영한 사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