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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향기/추억을 길어올리는 우물

추억과 시대를 박제한 우표와 크리스마스 씰

by 썬도그 2009.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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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된 컴퓨터 잡지를  신주단지 모시든 가지고 있는 저는 추억병에 걸린 듯 합니다.
모든 물건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모습 때문에 방은 항상 물건들로 꽉 차 있습니다. 버려야 새것이 들어올 공간이 생기는데
오래된 것이고 하찮은 것이라도 내 손때가 묻고 추억이 묻은 것은 그게 폐품이라고 할지라도 잘 버리지 못합니다. 
어린 왕자의 장미처럼 세상 유일한 나의 추억이 묻은 잡지니까요. 

그런데 다정도 심하면 병이듯 합니다.  결국 추억 더미에 살고 있는 것 같아  최근에 대부분의 폐품과 잡지들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또 뭐 정리할 게 없나 뒤적이다 이걸 발견했습니다.



오래된 우표책입니다. 제 것은 아니고 외삼촌들이 제가 어렸을 때 모으던 건데요. 이거 삼촌들이 저에게 줘서 제가 계속
이어서 수집하다 만 우표책입니다.  70, 80년대에 우표수집이라는 취미가 있었고 취미가 우표 수집인 분들 많았습니다. 
당시는 지금같이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라서 먼 거리에 있는 사람과 연락하려면 급한 일이 아니면 편지를 주로 연락했습니다. 특히 낯선 외국인과 편지로 친구를 만드는 국제 펜팔 문화도 발달하여 편지로 사연을 주고 받거나 사랑을 나누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편지의 느림의 미학은  한 시대를 풍미했고 빠름이 미덕인 현제에도 느림의 미학을 담은 편지는 너무나 반갑고 고맙습니다.

80년대 중반 학교에서는 가끔 우표책을 가지고 와서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서로 교환하는 모습도 있었습니다. 
친구 중에 우표 수집이 취미인 친구는 새로운 우표를 사러 우체국까지 찾아가서 수집하더군요. 편지는 사람들의 사연을 전송하고 우표는 그 시절의 모습을 박제하는 풍속화 같은 느낌이 많이 드네요. 


오래된 우표책을 다시 펼쳐보니  반 이상이 도장이 찍힌 우표들입니다. 삼촌들이 용돈을 아껴서 모으는 것들이라서 그런지 정석대로 트래이싱지로 포장한 하고 도장이 안 찍힌 우표가 아닌 것들이 많네요. 근처 우체국에서 우편용으로 파는 우표와 해외펜팔 등을 통해서 모은 도장이 찍힌 우표들이 많습니다. 가끔  기념용 우표들도 보이네요.




학생이었던 삼촌들이 모은 우표책에 저는 크리스마스 씰을 주로 모았습니다. 


저는 이 우표가 기억에 많이 납니다. 근거리 배정 원칙에 따라서 다른 고등학교에 입학할 것을 서로 알고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단짝 친구와 수차례 편지를 주고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감수성이 풍부한 게 저와 닮아서 무척 좋아했던 친구였습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고등학교 입학 후에 연락을 하지 못했는데 가끔 그 녀석 생각이 나네요. 

이 우표도 많이 썼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우표 가격이 얼마인지 모르겠네요. 요즘 편지 보내는 사람들도 없잖아요. 대신 택배나 소포 비용은 잘 압니다. 





우표는 이렇게 역사를 기록하는 리트머스용지 같은 역할도 합니다.  코스타리카 대통령이 방한했었네요.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 생각해보면 뭔 그리 해외 순방과 국내 방한이 많았는지 정말로 그때 툭하면 유럽 5개국 아프리카 10개국 중동 8개국등  많이 왔다 갔다 한 듯 합니다. 그 이유는  당시 북한과 남한이 유엔에 가입된 국가가 아니라서 외교력 과시하기 위해 
전 세계에 국교 수립을 더 많이 하기 위해 남북한이 국교 경쟁이 심했습니다. 특히, 아프리카는 북한과 친한 국가가 많았는데  전두환 전 대통령이 아프리카의 핵심국가인 가봉에 가서 외교전을 펼쳤습니다. 이 아프리카 외교 전략으로 인해 아프리카 국가들이 한국을 바라보게 되고. 북한은 큰 압박을 받습니다. 

당시 가봉이라는 나라의 대통령 이름이 봉고였습니다. 한국 정부는 봉고 대통령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기아자동차의 베스트셀러인 봉고 트럭의 이름을 붙였다는 루머가 있었습니다. 실제로는 봉고라는 아프리카 북에서 따온 이름으로 널리 멀리 울리는 봉고음처럼 많이 팔리라는 이름으로 지었는데 공교롭게도 봉고 대통령이 방한해서 가봉의 봉고 대통령 이름을 따서 만든 것이라는 많이들 알고 있습니다.  이유가 어찌 되었건 적극적인 아프리카 외교 노력으로 인해 아프리카에서 북한에 밀리던 외교전쟁은 점점 한국으로 기울게 됩니다. 



88올림픽 마크가 저게 맞나요?  초기 마크 같아 보이는데요. 유치해 보입니다. 81년도가 아마 바덴바덴에서 사마란치 IOC위원장이
쎄울을 외쳤고 그 모습을 전국민이 지켜본 기억이 납니다. 저도 그냥 멋도 모르고 박수쳤던 기억이 납니다. 



1978년 국회개원 30주년이 되었군요. 30년이 지났지만  변한 것 없는 국회입니다. 한세대가 지나도 정치문화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100억 불 수출 기념   이때는 우리나라 경제성장율이 엄청났었죠. 지금의 중국의 모습을 떠올리시면 이해되실 겁니다.
이때 중국은 다른나라와 무역 거래를 거의 안 했습니다. 그래서 세계의 저가 제품은 한국이 많이 만들어 미국에 팝니다.
신발, 의류산업이 주력수출산업이었습니다. 


이제는 결핵 씰로 가볼까요

씰은  결핵환자를 돕기 위해서  결핵협회에서 만듭니다. 우표옆에 같이 붙여 보내면 됩니다.
내가 이런 착한 일 한다는 것을 알리는 사랑의 열매 같은 건데 이게 문제가 되었던 것이 각 초중고등학교에 할당제로 내려보냈어요.
학생들이  사지 않으면 담임선생님이 다 사야 하는 것으로 기억돱니다. 선생님 표정이 참 난감해 하더군요.
이 80년대만 해도  강제로 하는 것들이 참 많았죠. 방위성금도 코흘리개 학생들에게 500원씩 국가에서 강제로 뜯어가고 불우이웃성금도  불우한 이웃인 학생에게도 뜯어가고  국가가 국민을 머슴으로 아는 시대였습니다. 이 결핵 씰도 취지는 좋지만 구매를 강매 하는 모습을 국가에서 지시하는 모습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에 선생님도 학생도 반기를 들지 않았습니다.

그냥 위에서 명령을 내리면 따르는 군대 같은 사회였습니다. 왜? 라는 물음이 없던 시대였습니다. 
그 착하디착한 예쁜 담임선생님의 난감해 하는 표정에  아이들은 하나둘 사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줄서서 사야 했습니다. 덕분에 5분 만에 다 팔렸죠. 이렇게  저와 크리스마스 씰은 인연을 맺습니다. 결핵이 뭔지도 몰랐죠.


아래는 제가 모은 크리스마스 씰입니다.



1980년대 당시 크리스마스 씰은 대부분 한국 문화를 담은 그림들이 많았습니다.




86년 것은 연을 주제로 했는데 가장 예뻤던  씰이였습니다. 파란 배경색이 눈에 쏙 들어왔습니다. 



87년도  탈춤이네요.

88년은 건너뛸려고 헀습니다. 사도 카드에 붙이지도 않고 돈 낭비같기도 하구요. 그런데 디자인때문에 샀습니다. 
특히 이 한질은  너무 그림이 좋더군요. 거기에 친한 반장이 옆구리 살살 찔러서 산 것도 있습니다. 반장 때문에  보통때보다 더 많아 샀습니다. 








89년 까지만 크리스마스 씰을 구매했습니다. 이제는 이런 씰이 나오는지도 모르겠네요.





추억이 담긴 우표책 몇몇 우표는 트레이싱지에 포장된 값어치 나가는 우표들이 있네요.  이걸 팔면 돈이 얼마나 될까요?  
큰 돈을 받지는 못할 것 같지만  제 방에서 가장 오래된 물건이 이 우표책입니다.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보니 도장이 찍힌 우표도 안 찍힌 우표도 그 70,80년대의 시대를 그대로 박제한 풍속화 느낌이 듭니다. 제가 모은 우표와 크리스마스 씰은 그 우표가 붙어 있던 편지의 온기까지 느껴지네요. 이제는 사멸해 가는 종이 편지지만 가끔 받는 종이 편지는 전자 메일에서 느낄 수 있는 온기가 가득 느껴집니다. 

감동은 시간에 비례한다고 하죠. 편지 받을 사람을 생각하면서 또박또박 손필기로 편지를 쓰는 그 시간에 비례해서 편지를 받는 사람은 감동하게 되고 그 감동은 길고 오래 기억됩니다. 돌이켜보면 전자 메일 중에 기억 남는 전자 메일은 없지만 기억에 남은 손 편지와 크리스마스 카드는 많습니다. 그 손편지의 온기를 전달해주는 메신저가 우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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