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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영화창고

버닝 종수가 벤에게 해미의 행방을 물어보지 못한 이유

by 썬도그 2018.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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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다섯개를 줬습니다. 강렬하고 아주 재미있다고 할 수 없지만 시간 거지들로 살고 있는 현재의 20대의 자화상을 제대로 담은 영화라서 별 다섯개를 준 영화가 바로 <버닝>입니다. 영화 <버닝>에 대한 평은 극과 극입니다. 저 같이 100점 만점에 만점을 준 사람이 있는 가 하면 영화가 너무 재미도 없고 지루해서 졸았다는 관객도 많았습니다. 

감히 말하지만 영화 <버닝>은 사회에 대한 감수성이 있는 분들만 보셔야지 영화를 오락의 도구로 보는 분들은 졸기 딱 좋은 영화입니다. 영화를 통해서 세상을 되새김질 하는 영화를 창으로 여기는 분들에게만 추천하는 영화입니다. 

이 글은 영화를 본 분들을 위해서 쓰는 글입니다. 따라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참고하세요


버닝 종수가 벤에게 해미의 행방을 물어보지 못한 이유

금수저 벤(스티븐 연)이 비닐하우스를 태운다고 예고한 다음날 해미(전종서 분)도 사라졌습니다. 해미와 연락이 끊긴 흙수저 종수(유아인 분)는 벤의 주위를 맴돕니다. 보통 친구이자 연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사라지면 그와 가까운 사람에게 행방을 직접 물어보는 게 상식입니다.

그러나 종수는 이상하게 해미와 가까웠던 벤에게 "해미 어디 갔어요?. 혜미와 연락이 되나요?"라고 묻지 않습니다. 그냥 벤을 따라 다닐 뿐이죠. 그날도 낡은 트럭을 몰고 벤의 집 앞에서 벤의 차가 나오기만 기다렸던 종수는 벤의 갑작스러운 전화에 당황을 합니다. 그리고 벤이 트럭 뒤에서 나타나자 크게 놀라죠. 

이제는 직접 물어 보나보다 했지만 종수는 벤에게 직접 해미의 행방에 묻지 않습니다. 왜 묻지 않을까요? 왜 묻지 않았을까요?


1. 종수와 벤은 흙수저, 금수저에 대한 메타포이다

남산 타워가 보이는 단칸방에서 사는 해미는 자유를 꿈꿉니다. 카드빚 때문에 쪼들리고 쫒기는 삶을 살고 있지만 여행이라는 일탈을 통해서 벤을 만납니다. 벤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한량입니다. 직업은 없지만 여러가지 지식은 참 많은 흔한 강남 도련님 같은 인물입니다. 

어른이 되고서 한 번도 슬퍼서 눈물을 흘려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부족함 없고 원하는 것도 딱히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냥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은 벤은 세상이 지루하고 지루합니다. 벤에게 있어 해미는 또 하나의 장난감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해미는 벤을 돈 많은 좋은 오빠라고 생각하는데 반해 벤은 해미를 친구들에게 보여줄 새로운 장난감 정도로 여깁니다. 해미가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추지만 벤은 그런 해미를 보고 하품을 합니다. 그런 모습을 흙수저 종수가 봅니다.

종수는 어렸을 때 어머지가 도망가고 아버지 밑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고지식하고 불같은 성격으로 공무원을 폭행하고 합의나 사과도 하지 않습니다. 문예창작과를 졸업했지만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택배 일 등을 하면서 겨우 자기 앞가름만 합니다. 항상 쪼들리면서 사는 모습은 동창인 해미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종수는 대한민국의 현재를 사는 우리네 20대들의 표준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반면 개츠비 같은 벤은 돈 잘 버는 재벌 같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만나서 무위도식하는 흔한 강남 도련님의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개가 자욱히 낀 가로등이라는 보호등 하나 없는 시골길을 달리는 흙수저 종수는 온기와 재미가 넘쳐서 삶이 무료하게 느껴지는 재벌 2세 같은 벤을 부러워하면서 동시에 그에게 분노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출발선이 다른 세상이라고 하지만 교육과 사회 시스템을 통해서 그 출생의 불평등의 격차를 줄여야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노력을 해서 검사가 되고 판사가 성공하는 기업인 같은 노력만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보이지 않는 룰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룰이 사라졌습니다. 열심히 일해도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고 평생 열심이 일해도 벤과 같은 자본이 많은 사람의 노예 생활만 할 뿐입니다. 열심히 일하지만 높은 월세와 생활비로 쓰고 나면 남는 돈이 없습니다. 돈을 모을 수도 없고 평생 시간 거지로 살아가는 것이 2018년을 사는 우리네 20대들이자 종수의 삶입니다. 

 

종수는 궁금했습니다. 왜 내 삶은 이렇게 시궁창인지를 묻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물어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벤에게 물어 볼 수도 없습니다. 벤은 그냥 돈 많은 부모님을 만났을 뿐입니다. 그게 벤의 잘못은 아닙니다. 그냥 태어나자마자 로또 맞은 삶을 살고 있는 럭키 가이일 뿐입니다. 

종수는 자신과 닮은 삶을 사는 해미의 행방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벤은 모른다고 말할 것이 뻔하고 모른다면 그 이상을 물어 볼 수도 없습니다. 종수는 답답합니다. 뭔가 세상이 잘못 된 것 같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노력해서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닌 가난한 사람은 노력해도 평생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 세상에 대해서 울분이 쌓여져 갔습니다. 

누군가에게 묻고 싶고 자신의 울분을 멱살을 잡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벤은 아닙니다. 벤은 하나의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자본주의 최첨단의 현상일 뿐이지 원인은 아닙니다. 그래서 종수는 벤 주변만 맴돌 뿐 자신의 가난한 삶의 위치도 원인도 물어 볼 수 없었습니다. 


2. 보이는 것만 믿는 종수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판토마임을 잘 하는 해미는 "없다는 것을 잊어"라고 말합니다. 없다는 것을 잊는다는 것은 존재를 인정하고 그걸 잊으라고 말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벤이라는 금수저를 인정하고 다만 그들의 존재를 잊으라고 합니다. 

종수는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지독한 현실주의자이자 눈 앞만 보고 사는 리틀 헝거입니다. 그래서 해미의 고양이가 보이지 않자 상상의 고양이냐고 농담을 합니다. 그러나 고양이는 보이지 않지만 고양이가 싼 똥을 보고 어느 정도 해미의 말을 인정하게 됩니다. 결정적으로 벤의 집에서 해미가 키운 듯한 그러나 확실하지 않는 고양이를 보게 됩니다. 


종수는 해미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넘어서 해미를 벤이 죽이지 않았을까? 라는 의심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의심을 바로 한 것은 아닙니다. 벤이 무료한 삶을 달래기 위해서 2달에 한번 씩 쓸모 없이 많은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소리를 직유로 알아 듣고 동네 비닐하우스를 돌아다니면서 비닐하우스를 지킵니다. 

그러나 벤은 여유로운자의 언어인 듯한 은유(메타포)로 말하는 사람입니다. 벤에게 있어 비닐하우스는 하나의 은유이지 진짜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뒤늦게 그게 은유라는 것을 알게 된 종수는 벤을 찾아갑니다. 


이런 종수의 모습은 또 있습니다. 해미가 어렸을 때 자신의 집 앞에 우물이 있었다고 말하지만 해미 가족은 없었다고 합니다. 오랜만에 만난 종수의 어머니는 있었다고 합니다. 우물이 있는지 없는지는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기억이라는 것이 불확실하기도 하지만 사람은 자신의 입장에 따라서 거짓말을 하는 존재들이니까요. 

하지만 종수는 우물의 존재 유무에 매달립니다. 보이는 것만 믿는 종수는 해미를 벤이 살해하는 모습을 직접 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고양이, 해미가 차던 시계와 여러가지 정황으로 벤을 의심할 뿐입니다. 의심이 확신이 되지 못했던 종수는 그렇게 물러납니다.




영화가 그냥 그렇게 끝이 났다면 종수라는 흙수저와 벤이라는 금수저라는 세태만 담고 끝났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영화 <버닝>은 다큐로 끝이 났을 겁니다. 그러나 영화 마지막 장면을 통해서 종수의 변신을 보여줍니다. 많은 분들이 마지막 장면에서 속이 시원했다는 말을 합니다. 

저 또한 마지막 장면이 충격적이면서 가슴 속에 있던 응어리 하나가 펑하고 터진듯한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영화관을 나서자마자 다시 응어리는 커졌고 지금은 그 응어리가 원래부터 있었던 것 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응어리란 노력해도 부자가 될 수 없다는 응어리. 돈 많은 자들에게 짖눌리고 사는 듯한 느낌. 돈이 돈을 버는 자본가들의 세상에 대한 응어리입니다. 

영화 <버닝>은 1980년 개봉한 이장호 감독의 <바람불어 좋은 날>의 2018년 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 <버닝>은 답답하고 안개가 자욱한 2018년을 사는 20대 청춘들의 삶을 신랄한 비판의식으로 담았습니다. 버닝을 좋게 본 분이라면 <바람불어 좋은 날>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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