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기/서울여행

서울의 옛모습을 볼 수 있는 서울역사박물관(경성 시대)

by 썬도그 2014. 12. 3.
반응형

우리는 우리를 잘 모릅니다. 내가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많이 갖지 못하고 항상 남에게 비친 내 모습만 치장하는 열등 콤플렉스에 걸린 사람들이 많아서 주체적인 삶 보다는 외부의 시선에 휘둘리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들여다 보지 않는데 우리가 사는 이 땅에 대한 옛 이야기를 들으려고 할까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하는 옛 이야기는 큰 관심도 없습니다. 

그런데 전 이상하게도 제가 태어나기 전의 이 땅에 대한 궁금증이 참 많습니다. 조선 시대는 큰 관심이 없지만 마을이 형성하기 시작하고 서울의 인구가 급증하던 1930~40년대 서울이 무척 궁금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기 위해 '서울사진축제' 강의를 들어 봤습니다. 강의는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를 보여주지 못하고 고리타분해서 실망스러웠습니다.

그 허한 마음을 부여잡고 집으로 향하려다가 서울역사박물관 전시관을 돌아 봤습니다.

서울은 역사가 600년이 넘는 조선과 한국의 수도이지만 지난 500년 동안은 큰 변화가 없다가 일제 강점기때 조금씩 변화를 하다가 60년대 들어서 엄청난 발전을 합니다. 위 두 사진은 일제 강점기 시절과 최근의 서울의 모습입니다. 빌딩 숲이라는 표현이 달리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쪽은 남산 앞 쪽인 을지로와 충무로 종로입니다. 

서울역사박물관 2층에 올라가서 오른쪽에 가면 상설전시실이 있습니다. 2009년에 한 번 와보고 4년 만에 둘러 보는 듯 합니다. 2009년에는 정말 재미 없고 사진도 찍지 말라고 해서 그냥 나왔던 기억이 나네요. 서울역사박물관인데 무슨 순 조선시대만 전시 했더라고요. 그런데 이번에 다시 찾아보니 확 달라졌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다양한 전시를 하는 것은 알았지만 이런 흥미로운 전시를 놓친 것은 너무 아쉽네요. 서울시립미술관은 자주 가지만 서울역사박물관은 자주 안가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두 곳이 멀지 않습니다. 서울시립미술관 관람하고 덕수궁 돌담길 따라서 쭉 걸어서 나가면 서울역사박물관이 나옵니다

상설 전시실에는 일제 강점기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했습니다. 지금의 서울이야 거대한 서울이지만 조선시대와 일제 강점기때의 서울은 성곽 안만 서울(한성)이었습니다. 일본군이 주둔해 있던 용산 지역이 일제 강점기에 경성으로 인정했습니다. 너머지는 다 경기도죠 


19세기 말 고종이 조선의 왕과 황제로 있던 시절 한국에 온 외국인들입니다. 언더우드 가족도 보이고 아펜 젤러도 보입니다. 사바친이라는 러시아 건축가도 보이는데 고종이 사바친을 고용해서 많은 유럽식 석조 건물을 만들었습니다. 

덕수궁의 정관헌이라는 서양식 건물도 사바친이 만들었습니다. 


조선시대 선교사 등이 찍은 흑백 사진이 가득 전시 되어 있었습니다. 

1903년 한국경성전도인데 저 지도에서 보면 알 수 있듯 남대문 인근까지만 경성이었습니다. 4대문 안만 수도로 인정을 했었습니다. 이는 성곽을 기준으로 하는데 성곽이 외세의 침입을 막는 용도도 있지만  수도의 경계를 나타내는 의장용도가 더 컸습니다. 실제로 조선의 한성은 성곽에서 적과 전투를 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방어하기에 너무 컸죠

예전엔 한성과 경성이 이렇게 작았습니다. 을지로와 종로가 주요 대로였습니다. 


1930년대 일제는 경성에 주요 도로를 만듭니다. 길 정비는 좋은데 문제는 창경궁과 종묘를 가로지르는 도로를 만듭니다. 
창경궁과 종묘는 하나로 이어진 궁입니다. 그런데 일제가 여길 뚫어 버리려고 하자 고종이 반대를 합니다. 고종의 반대로 눈치만 보다가 고종이 죽자 길을 만들어버렸고 현재의 종로에서 대학로까지 바로 갈 수 있는 율곡로가 만들어졌습니다. 현재 이 율곡로를 지화화 하는 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지하화 하고 종묘와 창경궁을 예전처럼 하나로 만들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경복궁은 하나의 놀이 동산이었습니다. 조선박람회라는 엑스포를 개최해서 다양한 건축물을 세우고 다양한 것을 전시했습니다. 그런데 이 전시 공간이 경복궁입니다. 광화문 뒤에 있는 공터 곳곳과 근정전 근처까지 엑스포 공간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조선박람회가 끝나고 근정전 앞에 중앙청을 세워서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고 있음을 과시했습니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힘이 없어서 이런 굴욕을 당한 것이죠. 예나 지금이나 권력 있는 놈들이 헛짓꺼리 하다가 나라 팔아 먹고 망가트리죠. 현재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고보니 요즘 10,20대들은 중앙청이 뭔지도 모르겠네요

조선박람회와 경성 관광지도입니다. 그리고 주요 일제 시대에 세워진 건물입니다. 덕수궁 석조전은 일제가 새운 것이 아닌 고종이 세운 것입니다. 



위 건물들이 조선박람회때 지어진 건물인데 다양한 건축 양식이 선보였습니다. 

1913년에는 경성의 경계가 용산까지였는데 1930년이 되면서 영등포와 왕십리로 확대 됩니다. 영등포는 군수물자를 생산할 수 있는 공장 지대로 키워졌고 왕십리는 주거 지역으로 키워졌습니다. 영등포는 아직도 철공소 거리가 있는 등 옛 공장 지대가 조금 남아 있습니다. 영등포가 공장 지대로 지정된 이유는 공장의 매연이 바람에 불려서 날려도 서울 도심인 종로나 중구 지역으로 날아오지 않는 점과 함께 경인선이라는 열차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경성 시대의 인구를 보면 1920년대는 경성에 사는 조선인 인구가 22만 명 일본인 8만 2천명으로 일본인들이 엄청나게 많았네요. 그러니 김두한이 하야시 꼬봉 역을 하면서 돈과 권력을 챙겼죠. 뭐 우리에게는 독립 투사의 아들 어쩌고 하는데 그거 다 확인 안 된 소리입니다. 그러나 이건 확실합니다. 김두한은 깡패였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비열한 깡패죠. 그러니 하야시 같은 놈의 꼬봉짓을 했죠. 

드라마와 영화가 너무 포장을 해줬어요. 책이 더 문제였겠지만요. 

경성의 도로망은 점점 늘어가고 촘촘해 집니다. 현재 서울의 도심 도로 대부분이 1920,30년대에 지어진 것입니다. 

위 지도에서 노란색이 경성입니다. 영등포가 눈에 확 들어오네요. 여의도는 당시에는 비행장이여서 사람들이 많이 안 살았습니다. 


경성은 남촌과 북촌이 있었는데 북촌이야 삼청동,가회동, 팔판동 같은 경복궁 옆 동네이고 현재도 북촌으로 불립니다. 남촌은 현재 충무로 인근 지역인데 이 남촌이 일본인 거주지역이었습니다. 


남촌에는 일본인들이 상권을 꽉 쥐고 있고 북촌인 조선인들과 트러블이 많았다고 하네요

인구 비율을 보면 알 수 있죠. 안국동, 삼청동은 조선인이 90%가 넘지만 남촌인 남산 및 마을 충무로 일대는 일본인이 조선인 보다 많았습니다. 

이런 일본인들의 조선 거주는 1910년대부터 시작 되었다고 하네요. 

경성 시절은 서양 문물이 들어오던 시절이자 한복을 벗고 양복을 입던 모던 걸, 모던 보이가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경성 시절의 서울의 모습을 보니 변하지 않은 것과 변한 것이 모두 잘 담겨 있어서 옛 서울의 모습을 보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현재의 서울은 1960년대 박정희 군부 독재 정권이 강남까지 포함해서 만들었고 지금까지 크게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1950년대 이후로 이어지는데 포스팅이 길어서 여기서 마치고 이어서 쓰겠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