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의 향기/추억을 길어올리는 우물

서울 대길초등학교 1회 졸업생의 추억담

by 썬도그 2014. 5. 25.
반응형

인간은 한 줌의 뼈와 살과 그리고 기억으로 구성 되어 있습니다. 특히 기억은 외모와 함께 그 사람의 정체성으로 다른 사람과의 구분할 때 큰 역할을 하죠. 그러나 외모는 성형강국 코리아가 되어서 성형을 하면 누귀?? 라는 인삿말로 다가오죠.

그럴 때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자신의 추억을 꺼내고 그 추억을 통해서 자신을 증명합니다. 
영화 '공각기동대'는 이런 기억이 인간의 주요 구성 성분이라고 말하고 있는 애니입니다.  그래서 추억팔이라고 폄하하는 단어가 있지만 추억 만큼 인간의 본질 적인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내 추억과 다른 사람의 추억이 동일함에 친구임을 인정하고 같은 추억을 공유할 때 많은 공감을 표시합니다.
그 추억의 화수분이자 원초적 추억, 내 인격을 형성해주었던 유년 시절의 추억 탐험을 했습니다.

저는 서울 대길초등학교 1회 졸업생입니다. 1983년 서울 대길초는 1학년부터 5학년까지 학급을 만들어서 개교를 합니다. 
서울 대방초등학교를 다니다가 서울 대길초가 개교를 하면서 서울 대방초 학생 중 일부가 서울 대길초로 강제 전학을 당하게 됩니다. 이 전학은 행복한 전학입니다. 
먼저 집에서 대방초는 어린아이 걸음으로 40분 정도 걸렸지만 서울 대길초는 20분 거리였습니다. 

저는 5학년 1학기까지 서울 대방초를 다니다가 2학기에 서울 대길초로 집단 전학을 갔습니다. 전학이 좋지는 않았습니다. 1983년 당시 최신식 건물의 학교로 전학을 가는 것은 좋은 일일 수 있었지만 이름도 기억 안나는 여자 짝꿍과 헤어지는 것은 기분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자 짝궁이 저와 헤어지는 것 보다는 동성의 친구와 헤어짐에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난 짝사랑이었구나'라는 잔혹한 현실을 안고 대길초로 이전을 했습니다. 

1983년 당시 대길초는 6학년을 제외한 1학년부터 5학년까지 이전을 했고 제가 5학년 이었기에 5학년 2학기와 6학년까지 1년 반 동안 최고학련의 지위를 누렸습니다. 특권이라면 특권이죠이 대길초를 30년이 지나서 다시 찾았습니다. 
그 이전에도 간간히 지나가다가 찾긴 했지만 최근에는 큰 사건 후에 초등학교 및 학교 방문이 자유롭지 못합니다. 특히 평일은 학교 보안관에게 신분 확인을 검증 받고 패찰을 차고 방문해야 합니다. 주말도 잘 열어주지 않아서 몇번 지나가다가 추억에 젖어서 들렀다가 닫힌 철문에 발길을 돌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제 토요일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다가 철문이 열린 것을 보고 들어가 봤습니다. 

들어간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제 추억을 되새김질 또는 변화된 모습을 찾아보기 위함도 있고 사진으로 기록하기 위함도 있습니다. 제가 가끔 학교 방문 후 사진으로 그 학교를 담아서 블로그에 소개하면 자신의 모교라면서 글과 사진 잘 보고 간다고 감사하다는 말 자주 듣습니다. 비록 제 모교는 아니지만 이억만리 외국에서 사는 분부터 먼 곳에 살아서 찾지 못한 모교를 사진으로 소개한 제 글을 보고 추억에 젖는다면서 감사하다는 댓글을 남깁니다. 이렇게 추억을 찾는 사람들이 많은데 정작 학교에 관한 글을 검색하면 그 학교에 관한 블로그 글은 거의 없습니다. 이는 초등학교뿐이 아닌 중고등학교를 검색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재학생들이 공부만 해서 그런지 자신이 다니는 학교에 대한 글을 블로그나 카페에 남기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학교 홈페이지에 글을 남기냐 그렇지도 않습니다. 아니 남긴다고 해도 대부분의 학교 홈페이지는 회원가입한 회원에게만 학교의 속살을 보여줍니다. 이게 바로 2014년을 사는 인터넷 세상의 현실입니다.지금 자신의 모교를 검색해보세요. 얼마나 검색이 되나요? 

단언컨데, 대부분 검색이 되지 않고 쓰레기 정보만 가득할 것입니다. 생각보다 인터넷은 정보량이 적습니다
제가 잘하는 일인 기록을 위해서 들어갔습니다. 모교가 아닌 학교도 기록하는데 모교는 더 적극적으로 해야죠.
부디, 이글이 대길초 졸업생과 재학생에게 좋은 도움이 되는 글 또는 추억의 마중물이 되었으면 하네요

서울대길초는 1983년 개교를 합니다
1980년대는 제 2의 베이버 붐 세대들이 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58년 개띠라는 말이 있듯 6.25 전쟁 후 1차 베이비 붐 세대인 50년대에 출생한 어르신들이 많이 태어났고 그 50년대 출생 어르신들의 자녀들이 70년대 초반에 많이 태어났고 60년대 후반 70년대 초가 제 2차 베이비 붐 세대입니다
그래서 70,71.72.73,74년 생들이 엄청나게 많이 태어났고 덕분에 사상 최고의 대입 경쟁률을 보입니다. 인터넷에 72년 태생 연예인 검색해 보세요. 엄청나게 많을 것입니다. 이런 2차 베이비 붐 열풍 덕분에 한 교실에 무려 60명까지 앉아서 공부를 했습니다. 지금은 한 교실에 30명도 안된다는 소리에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교실은 늘렸다 줄였다 할 수 없는데 같은 교실에 60명이 공부하던 풍경과 30명이 공부하는 풍경은 엄청나게 다를 것입니다. 60명을 가르치던 그 시절 선생님들은 참 고생 많았습니다. 물론, 그런 교실을 견딘 70년대 초반의 학생들도 고생 많았죠위 이미지는 대길초 건물을 찍은 사진입니다. 1회때는 앞에 보이는 건물이 없었습니다. 저 건물은 90년대 초반 혹은 80년대 후반에 새로 지어진 건물로 압니다. 위 건물도 없었던 83년에는 저 공간이 다 공터였고 작은 운동장이었습니다.


80년대 초반은 살짝 걸치는 저 ㄴ자 건물만 있었습니다. 

정문 바로 앞에는 책 읽는 소년 소녀상이 있네요. 이 동상은 제가 다닐 때는 없던 동상입니다. 이 동상의 옆을 보니 90년대 초반 전교회장, 부회장이 기증한 동상이라고 써 있네요. 

이 동상도 한 20년이 넘은 동상이네요. 그런데 제가 눈여겨 본 것은 이 동상을 만드는데 전교 회장, 부회장 부모님들이 기증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80년대 전교회장, 부회장은 아무나 할 수 없었습니다. 공부도 잘하고 돈도 좀 있는 부모를 둔 학생이 전교회장 부회장이 됩니다. 그러기에 두 부모님이 이런 동상을 기증할 수 있죠.이런 풍습은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학급의 반장(지금은 반장을 회장이라고 한다면서요)이나 부반장이 되면 한턱을 쏴야 한다고 합니다. 무슨 법으로 정해진 것도 아닌데 한 학기에 한 번 이상 햄버거를 쏴야 한다고 합니다. 이건 무슨 풍습인가요? 아니, 반장 부반장이 되면 왜 햄버거를 쏴야 합니까? 그럼 공부는 잘하지만 또는 인기는 많지만 가난한 부모를 둔 학생은 빚내서 햄버거 사야 합니까?이 동상에 대한 비판은 아니고 아직도 전교회장, 부회장 부모님들은 돈 들어가야 하는 일이 많다는 것을 현실로 인정하는 풍습이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글에 비판적인 생각을 적으면 안 되지만 제 버릇 버리지 못했네요. 

 

그런데 이 책 읽는 아이 동상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금은 그냥 방치 된 듯한 연못으로 보입니다. 지금 대길초를 다니는 재학생들은 잘 모를거예요. 이 연못은 예전엔 이런 모습이 아니였습니다

저 파란 칠을 한 작은 연못에 물이 찰랑거렸습니다. 

그리고 연못 주변에 자동차 도로가 있었습니다. 자동차 도로 위에는 미니카들이 놓여 있었는데 마치 해안도로나 강변도로를 연상케 했습니다. 그리고 그 물줄기의 상류에는 댐도 있었습니다. 미니카와 도로의 흔적은 다 사라졌지만 댐은 그대로 있네요
 
대길초 재학생들은 이 글을 읽으면 저 댐을 찾아보세요. 83년 당시에는 저 댐에서 물이 흘렀고  강변도로가 있었습니다. 일본의 분재 같은 느낌이 있었고 그 모습을 아이들과 한 참 바라봤습니다. 당시에 디카가 있었다면 카메라로 담았을거에요
이런 옛 이야기를 모르면 그냥 방치 된 작은 연못으로 느낄거에요. 가능하다면 83년 당시의 연못 풍경으로 돌아갔으면 합니다. 대길초가 사립이라면 이런 이야기를 선생님이 해줄 수 있지만 4년마다 학교를 이동하는 공립 학교라서 이런 이야기는 선생님도 모를거예요.
 
 

 

83년 당시보다 나무들이 참 많아졌습니다. 

정문 바로 오른쪽에는 철문이 있습니다. 벽을 타는 덩굴이 수염처럼 자라 있는데 저 철문은 80년대에는 새마을문고 문이였습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당시는 학교에 새마을문고가 있었고 은행 누나들이 앉아서 국민학생들의 100원 200원 저금 하는 돈을 받아줬습니다.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아침 등교길 혹은 점심 시간에 새마을금고에 가서 용돈 100원 200원을 저금을 했고 그 학기에 저축왕이 되기도 했습니다. 저금 하는 재미를 저기서 다 배웠습니다. 당시는 이자율도 10% 이상이여서 짭잘 했습니다. 당시는 한국이 고도 성장기였거든요. 어린 아이들에게 저축 습관을 국가적으로 장려하던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정문 바로 앞에 있는 ㄴ자로 꺾인 건물은 개교할 때 있던 유일한 건물입니다. 지금은 아스팔트가 깔려 있는데 개교 당시에는 여기도 작은 운동장이었스빈다. 4층에서 물폭탄을 만들어서 운동장에서 고무줄 놀이하던 여자 아이들 머리 위에 던졌던 꾸러기들이 많았죠. 그러다 걸려서 반나절 손들고 있던 친구도 많았고요. 

지금은 아스팔트로 포장 되었고 다른 초등학교와 마찬가지로 선생님들의 주차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요즘은 선생님 대부분이 차가 있어서 가뜩이나 건물을 지어서 좁아진 운동장이 자동차 때문에 더 좁아보입니다

 

 

여기 보니 옛 생각이 나네요. 고학년 특히 왕고라고 하는 최고학년들은 주번이라는 완장을 찹니다. 최고학련은 준 선생님 역할을 하는데 주번이라는 완장을 차고 뛰는 저학년들을 잡아서 뛰지 말고 걷게 만들거나 그래도 말을 안 들으면 이름과 반을 적었습니다. 그걸 선생님에게 고자질을 했는지 아니면 적기만 하고 말았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네요. 

 

 

이 계단은 제 추억이 많이 남아 있는 계단입니다
먼저 이 계단을 보고 놀란 것은 계단 위 문이 잠겨 있습니다. 주말이라서 잠근 것이 아닌 폐쇄 된 문입니다. 그렇기에 계단에 화분이 있습니다. 저 문은 폐쇄가 된 문이네요. 
왜 폐쇄 했을까요? 저 건물 아이들은 저 문으로 나와야 더 빠르게 하교를 할 수 있는데요. 그런데 폐쇄했습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좋은 모습이 아니네요. 혹, 선생님들의 자동차 때문에 또는 학생들이 쉬는 시간에 놀이 공간으로 활용하지 못하게 함이라면 그건 좋지 않습니다. 각설하고요
저 계단은 제가 아침마다 쓸었던 계단입니다. 학기 초가 되면 등교 후에 아침 조회 전에 청소 구역을 정해줍니다. 제 담당은 저 계단이었습니다. 2명이서 계단 청소를 해야 하는데 반 친구는 청소를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그 친구놈 덕분에 혼자 청소했죠. 
이런 소 같은 제 모습에 대학을 갓 졸업한 여 담임 선생님은 물끄러미 바라봤고 저의 소 같은 모습에 저에게 아주 잘 해주셨습니다. 
60명이나 되는 학급, 저 같이 내성적이고 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을 가진 학생은 선생님들이 잘 알지 못합니다. 공부를 잘하거나 싸움을 잘하거나 뭔가 하나라도 잘해야 관심을 가지지 소 같이 조용하고 공부도 적당히 하는 학생은 큰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여선생님은 저를 참 많이 챙겨줬습니다.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시고 사실까요? 저와 나이차이가 10살 정도가 났으니 지금도 어느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겠네요. 

 

대길초는 달라진 것이 꽤 있었습니다. 먼저 큰 운동장 옆에는 등나무 교실이 있네요. 예전에도 등나무 교실은 있었지만 테이블은 없었습니다. 지금은 테이블이 있네요

그리고 이런 문구가 적혀 있네요얘들아!
다치지 말아라. 아프지 말아라, 

초단순한 문장이지만 허세가 없습니다. 솔직히 이게 전부죠. 다치지 말고 아프지 말고 속상해 하지 말아야 합니다.
7,80년대처럼 착하고 바르고 슬기롭게라는  복사&붙여넣기 식의 훈화는 와닿지 않죠. 

큰 운동장입니다. 이 큰 운동장에서 축구하고 야구 하던 시절 생각이 나네요. 당시는 박종환 감독이 청소년 월드컵 4강 신화를 거두웠고 1군 2군 개념이 막 박히던 시절이었습니다.저는 반대표 축구 2군이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앞에 나서는 것을 극도로 싫어 합니다. 또한 내성적이니 성격상 1군이 어울리지 않았죠.
그래서 2군이었습니다. 한 반에 남학생만 30명이니 3군까지 만들 수 있었습니다. 2군과 1군은 점심 시간 그 짧은 40분 동안에 축구 시합을 했습니다. 당연히 1군이 주로 이겼죠. 그러나 몸은 2군에 있지만 1군 실력이었던 저와 몇몇 뛰어난 2군 반친구들이 1군을 이겼던 적이 있었습니다. 아직도 기억나네요. 3대 2로 이겼었는데  1군 친구들이 억지를 부려서 2군 주장이 울었던 기억이 나네요.
며칠 지나면 월드컵을 하지만 초등학교 추억의 3할은 축구였고 2할은 짬뽕(테니스 공을 주먹으로 치던 야구 경기)이었습니다. 
이 축구의 추억에는 여자 담임선생님이 축구를 같이 했던 추억과 전교 회장이었던 여자 반장이 축구공을 선물한 기억이 나네요

 

 

큰 운동장 뒷편에는 연립주택이 있는데 저 연립주택에 살던 전교 회장이자 반장이었던 친구가 집에서 남학생들이 축구 하는 모습에 엄마에게 졸라서 축구공을 몇개 사줬습니다. 지금이야 엄마에게 조금만 조르면 마트에서 축구공을 살 수 있지만 당시는 축구공 가진 아이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참고로 저 연립주택에 살던 그 여자 회장이자 반장은 2천년 대 초 싸이월드 열풍 때 검색을 해보니 캐나다에서 살고 있더군요.  지금은 뭐하고 사는지 모르겠네요
오른쪽에 삐쭉 튀어 나온 건물은 보라매 공원 앞 농심 건물입니다. 

그때와 달라진 것이 또 있는데 운동장을 내려다보는 큰 아파트가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예전엔 저기에 돈보스코가 있었습니다. 

운동장 한켠에는 팔각정이 있네요

이 연단위에서 애국조회를 할 때, 따분한 교장님 연설하던 때가 생각이 나네요

학교 건물 뒤에는 우성, 우창 아파트가 있는데 당시는 고층 아파트가 많지 않았는데 우창 아파트에는 많은 연예인이 살았습니다. 이성미와 몇몇 연예인들이 살았는데 여의도와 가까워서 연예인들이 많이 살았습니다.근처에는 교수 아파트가 있었는데 윤종신이 절친인 싸인의 작가이자 연출자이자 영화 '라이터를 켜라'의 장항준 감독이 살던 아파트도 있었습니다. 2002~3년 경에 윤종신의 2시의 데이트에서 장감독이 교수 아파트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고요지금은 유명한 드라마 작가인 드라마 유령, 쓰리데이즈의 김은희 작가와 결혼을 해서 잘 살고 있습니다. 물론 다른 곳에서 살고 있겠죠.

 

대길초를 들어간 이유는 아이들이 야구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작은 운동장에서 야구를 하고 있던데 그때나 지금이나 위와 같이 옷과 물병을 아무데나 벗어 놓고 노네요

얼마나 놀이에 열중하면 가방을 여기에 팽기치고 놀까요?

게임기만 가지고 놀거나 스마트폰만 만지작 거리는 아이들이라고 하지만 스마트폰의 가상보다는 이런 진성 운동이 아이들에게 좋죠.

30년이 지난 지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물질적 풍요입니다. 나무 배트가 없어서 나무 배트나 알류미늄 배트만 있으면 야구를 했던 시절, 그 마저도 없으면 테니스 공 하나만 있으면 유사 야구 놀이인 짬봉을 했습니다테니스 공으로 할 때도 있고 고무로 된 짬뽕공으로 했었습니다.


작은 운동장은 큰 변화가 많습니다. 먼저 작은 운동장 반은 정원으로 탈바꿈 했습니다

작은 정원에는 나무가 가득 했고

이런 작은 광장도 있습니다

작은 정원을 둘러 보는데 황금 빛 동상이 보이네요

단군상이 있네요. 7,80년대는 박정희 대통령이 좋아했던 이순신 장군 동상이 많았는데  단군상이 있네요. 단군상은 90년대 후반 2천년대 초에 학교에 많이 생겼습니다. 그나저나 통일이 될까요?

반응형

 

나중에 생긴 건물에는 식당이 있습니다. 지금은 학생들이 식당에서 밥을 먹죠. 예전에는 도시락을 교실에서 먹었지만 지금은 초등학교도 식당에서 무상급식을 먹습니다. 선택적 복지를 주장하는 보수 교육감들은 가난한 아이, 부자 아이를 편 가르는데 이건 비교육적입니다. 

건물 뒷편도 추억이 많은 공간입니다. 아이들은 조그만 공간이 있으면 참 잘 놀았느데 이 뒷 공간에서도 참 잘 놀았습니다


 

앵그리버드교가 보이네요. 학교 몇몇 곳에 벽화가 보입니다. 

학생 수가 줄어서 그런지 운동장 대신에 이런 공원 공간이 꽤 많네요

학생들이 심은 식물 위에 스티커들이 참 귀엽습니다. 식물입장에서는 저런 스티커가 오히려 발육에 도움이 되지 않지만 아이들은 자신들이 키우는 식물에 대한 애정을 스티커로 표현하는 듯 하네요


SOS버튼은 좀 씁쓸하게 하네요. 80년대에는 거의 없던 왕따 문화가 만연한 요즘, 학교 폭력이 여전히 존재하는 요즘의 자화상 같아서 안타까웠습니다



교무실이 있는 건물 입구에는 학교 초상화가 있는데 자세히 보니

학생들의 얼굴로 만든 모자이크 초상화네요

아! 건물 벽화가 문화로 행복한 학교만들기 일환이었군요
문화=벽화는 아니고 더 많은 문화를 심어 준 것 같기도 합니다. 초등학교 문화의 최고봉은 책과 영화죠
특히 책은 아이들의 정서 함양에 최고입니다. 저는 점심 시간에 3층 도서관에서 수 많은 SF소설을 읽었습니다. 아직도 기억남는 SF 소설들이 많습니다. '괴기식물 트리피트'는 정말 최고의 SF 소설이었는데 이 SF 소설 영화로 만들면 안될까요? 정말 재미있게 읽었거든요내용은 지구에 혜성이 지나가는데 그 혜성을 본 사람들이 모두 눈이 멀게 됩니다. 소설에서는 인간들이 기름을 얻기 위해서 독이 든 채찍을 휘두르는 움직이는 식물 트리피티가 탈출을 하고 인간을 닥치는대로 죽이는 내용입니다. 

여전히 방과 후 수업이 존재하는데 내용들이 흥미롭네요. 엑셀 파워포인트 수업도 있네요

몇년 전에 한 초등학생이 학교에서 일어난 불상사 때문에 지금은 학교에 들어가려면 신분 확인을 받아야 합니다
당시 정말 경악을 했었죠. 

 

1982년에 착공애서 1년도 되지 않아서 완공 했었네요. 정말 빨리 짓기는 최고입니다


 

학교에 대한 추억은 여기서 줄입니다.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많지만 이미 충분히 지루해져서 마치겠습니다. 대길초에 대한 추억이 있는 분들에게 이 글과 사진들이 마중물이 되었으면 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