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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3

명성황후라고 부르지 않았다고 역사해설가를 혼을 낸 관람객 퀴즈 하나 내볼까요? 명성황후가 맞을까요? 민비가 맞을까요? 하나 더 내보죠. 민비가 일본인들이 명성황후를 낮추 부르기 위해서 만든 말일까요? 정답은 민비도, 명성황후도 다 맞다 이고 일본인들이 명성황후를 낮춰 부르기 위해서 민비라고 부른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위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80년대 고등학교를 다닌 저는 국사시간에 분명히 민비라고 교육을 받았고 민비를 그렇게 좋은 인물로 그리지 않았습니다. 민비가 행한 일들을 보면 결코 나라를 위한다거나 구국의 모습을 보였다기 보다는 19세기말 팽팽한 국제정세를 잘 이용했던 모습으로 보여집니다. 그런데 이미연이 이 민비의 모습을 다 바꿔놓았죠. 드라마 하나가 민비를 명성황후라고 바뀌게 만들었고 '내가 조선의 국모다'라는 명대사를 만듭니다. 정.. 2010. 9. 22.
운현궁의봄 2편 여기는 이로당으로 대원군 부인인 부대부인 민씨가 운형궁의 살림을 맡아서 하는곳이다. 명성후 민비도 이곳에서 궁중법도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지금의 민비에 대한 평가는 국모라 칭할정도로 융숭하다. 이부분에 대한 평가는 다시 이루어져야한다. 이미연과 오페라 명성황후가 거의 국모수준으로 끌어올리는데 일조를 했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이 과연 국모스런 행동이었을까? 자신의 친인척을 대거 관직에 올리게하고 자신을 키우고 가르치고 했던 대원군과 싸우질 않나. 결국 임오군란이란 구식군졸들에게 쿠테타를 일으키게하게 하고 결국 뒤도안보고 도망가지 않았나. 친일파의 세력을 보듬어주고 키우고 가까이 하다가 청의 세력을 끌어들여서 대원군을 유배보내고 결국 죽음을 맞이했지만 명성황후가 과연 국모의 수준까지의 인격과 품위를 가지고.. 2007. 4. 14.
운현궁의 봄 1편 삼청동을 지나 종로3가쪽으로 내려가다가 운현궁을 발견했다. 우리에겐 쇄국정책의 흥선대원군이 거처하던 궁으로 알고 있다. 그 쇄국정책으로 인해 자율적인 근대화를 늦추게 하는 결과를 유래했다고 하는데 그건 결과론적인 얘기이구 유교문화가 조선의 국시이던 시절에 흥선대원군 아버자의 묘를 파헤친건 독일인 이었다. 왜 파해쳤는지 모르겠지만 그놈 때문에 쇄국정책을 결정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것이다. 오히려 개화파들이 일본가의 을사늑약의 디딤돌을 만들어준것은 자명한일이다. 힘이없는 나라이고 국력이라든 개념도 없던 시절이니 이리치이고 저리치이다 일본이 통치하는 가슴아픈일이 생긴것이다. 그렇다고 그 시절에 일본 프랑스 러시아 미국 영국등등 일본이 아니였어도 누군가의 속국이 되었을것이라 본다. 운현궁은 안국역 바로앞에 있다.. 2007.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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