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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아버지 한승원 작가 원작의 아제아제 바라아제라는 명작을 이제 보다

썬도그 2024. 10. 15.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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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장흥 출신의 한승원 작가보다는 한강 작가의 아버지로 잘 알려진 작가입니다. 물론 문학에 관심 많고 나이 많은 분들은 한승원 작가를 잘 알죠. 그러나 현재 20,30대들에게 한승원 작가는 한강 작가의 아버지로 더 유명합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어마어마한 일을 이루고도 이렇다 할 인터뷰 하나 없는 한강 작가 때문에 언론을 연일 노심초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있었을까 할 정도로 한강 작가는 축하의 자리도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전쟁을 두고 어떻게 잔치를 하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전쟁 이제 한국에서 일어날지도 모르는 세상이 되었네요. 오히려 70~80년대가 더 합리적인 남북 적대 관계가 아니었을까 할 정도입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시절에도 남북간의 비밀 접촉은 꽤 많았으니까요. 지금은 내일 당장 서울과 경기도에 다연장포가 떨어져도 이상할 게 없는 나날이 되고 있네요. 

 

한승원 작가 원작과 시나리오의 1989년 대종상 작품상을 받은 <아제아제 바라아제>

아제아제 바라아제

2013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후배 감독들이 임권택이라는 한국 영화계 거목에 대한 회고전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임권택 감독 영화를 선정하는 작업이 있었습니다. 이창동 감독은 짝코를 선택했고 봉준호 감독이 선택한 영화가 <아제아제 바라아제>였습니다. 봉준호 감독은 이 영화를 '치열한 구도(求道)의 길을 다룬 이 영화가 미래의 진로를 고민하던 내게 큰 감명을 줬다'라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전 이 영화 안 봤습니다. 불교 영화를 싫어하기도 했고 재미없을 것 같았거든요. 1989년 개봉작이니 참 오랫동안 안 봤던 영화입니다. 물론 당시 모스크마 국제영화제에서 강수연이 여우주연상을 받고 그해 대종상 작품상을 받는 등 평론가들의 평가는 높았습니다. 그러나 비구니의 삶에 대한 관심이 없어서 안 봤습니다. 그러다 어제 봤습니다. 어제 한국영상자료원이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4K 리마스터링 해서 유튜브에 업로드했습니다. 물론 무료로 누구나 볼 수 있습니다. 

 

이 <아제아제 바라아제>라는 뜻은 반야심경의 마지막 주문 구절로 '가자 가자  더 높은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자'라는 뜻을 가진 산스크리티어입니다. 불교라는 종교는 종교라기보다는 하나의 철학이라고 주장하는 분도 계시고 그 말이 참 공감이 갑니다. 깨달음을 위한 종교라고 할까요? 그래서 그런지 다른 종교보다 포근한 느낌이 참 많습니다. 불교 사찰에 가면 느끼는 정갈함과 청아함과 단아함이 전 참 좋습니다.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을 쓴 분이 한강 작가의 아버지 한승원 작가로 불료 및 동학 관련 소설을 쓰셨던 분입니다. 

시나리오도 직접 각색에 참여했습니다. 

 

욕망이 가득한 세상을 뒤로 하고 사찰에 들어간 순녀의 구도의 길을 담은 영화

아제아제 바라아제

시대 배경은 현대입니다. 전 사찰이 주로 나와서 조선 시대 영화인가 했네요. 주인공인 순녀(강수연 분)는 간호전문대를 다니다가 홀로 자신을 키워온 어머니와 한 바탕하고 절에 들어갑니다. 영화에서는 잘 담기지 않지만 고리대금과 욕정이 가득한 어머니 밑에서 지내는 것이 순녀는 무척 고통스러웠나 봅니다. 처음 보는 스님을 따라가질 않나 현종이라는 유부남 선생님과 함께 여름방학 때 충청도 여행을 하는 등 집 밖으로 돌아다닐 생각만 합니다. 영화는 구도의 길을 떠나서 비구니가 되려고 하는 순녀의 모습으로 시작해서 가끔씩 과거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영화 초반 장면에서 어디서 많이 본 사찰이다 했는데 이 뒤간을 보고 알았습니다. 선암사네요. 한국 사찰 중에서도 아름답기로 유명한 순천 인근에 있는 선암사. 이 선암사는 가을 특히 11월 초에 가면 참 아름다운 곳입니다. 

 

소승불교 같은 진성 스님과 대승불교 같은 순녀를 통해본 종교가 가야 할 길

아제아제 바라아제

순녀(강수연 분)는 그렇게 비구니가 되기 위한 수행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순녀와 진성 스님(진영미 분)은 깨달음에 대한 생각으로 티격태격합니다. 사찰 주변에 있는 못생긴 돌부처를 보면서 진성 스님은 왜 이렇게 못생겼을까라는 말에 순녀는 부처는 필부필부의 가난한 농부나 무지렁이 서민들의 얼굴에서도 부처님을 발견한 사람이 만들을 수도 있지 않냐고 합니다. 영화 <아제아제 바라아제>는 두 스님의 세상에 대한 태도 및 서로 다른 구도의 길을 보여줍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영화 초반에 사찰 방문객이 불교의 자비와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이라는 덕목은 어떻게 다르냐고 묻습니다. 
전 이 장면에서 깜짝 놀랐습니다. 대스님도 아니고 스님도 아니고 수련생 신분인 순녀가 방문객의 질문에 대답을 합니다. 그래서 전 순녀가 무례한 줄 알았습니다. 그게 아닙니다. 다른 스님들은 이런 방문객들과 말을 섞으려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찰 스님들이 추구하는 건 소승불교이기 때문입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이에 방문객은 한국은 대승불교 국가인데 소승적인 요소가 많지 않냐는 말도 합니다. 이에 순녀는 그 점이 우리 불교가 지향해야 하는 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승불교, 대승불교 잘 아세요? 전 고등학교 때 배웠지만 동남아가 소승불교고 동북아시아는 대승불교라고 만 배웠지 이 둘의 차이를 알 수 없었습니다.

 

이에 바로 검색을 해보고 지식을 장착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소승불교에서 승은 탈 승(乘) 으로 올라타는 것이라고 합니다. 깨달음을 가는 길에 올라타는데 나 혼자 올라탑니다. 그래서 작을 小를 사용합니다. 주변 사람들이 뭘 하던 사회가 어떻든 중생이 어떻든 말든 자기의 깨달음은 추구하는 나 혼자 불교 깨달음을 추구합니다. 반면 대승불교는 다릅니다. 같이 타는 겁니다. 깨달음을 얻는 길에서 만난 중생들을 구제하고 울고 있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서 일으켜서 같이 열반으로 가자고 손을 내밉니다. 

 

이 차이는 아주 큽니다. 저는 소승불교 국가였다면 불교를 좋아하지 않았을 겁니다. 자기들의 구도 활동에 왜 우리가 시주를 하겠습니까? 다행스럽게도 한국은 대승불교 국가이고 중생들의 고통을 여러 보살님들이 보살피고 굽이 살핍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순녀가 추구하는 불교는 대승불교이고 진성 스님이 추구하는 불교는 소승 불교입니다. 진성 스님은 어려서부터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여러 책을 읽고 대학교도 다니고 토굴에 들어가는 등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합니다. 그러나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멀고도 험한지 고통스러운 구도의 길이 멀고 험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하소연도 하죠. 

 

그러나 순녀는 개울가에서 빨래를 하다가 한 자살을 기도하는 듯한 사람을 보고서 지나치지 못하고 경찰에 신고해서 자살하려는 사람을 살려냅니다. 그런데 이 현우라는 사람이 죽은 사람 살려 놓았더니 자신을 책임지라고 순녀에게 매달립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찰 주지스님인 은선 스님은 순녀에게 체벌을 가합니다. 아니 죽은 사람 살리는 거룩한 행동을 했는데 속세에 물들었다는 듯 강력한 훈육을 하게 합니다. 이에 은선 스님은 순녀를 사찰에서 내쫓아냅니다. 이 행동이 이상하게 보일 수 있지만 영화 끝에 보면 깨닫게 됩니다. 스포일 수 있지만 알고 봐도 좋은 영화라서 좀 적어보겠습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순녀는 이미 부처였습니다. 깨달은 자! 바로 부처였습니다. 은선 스님은 그걸 알기에 구도로 가는 길은 사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면서 나가서 배우라고 하죠. 그렇게 순녀는 현우라는 사람과 함께 탄광촌에 갑니다. 거기서 겁탈을 당하는데  다음 장면이 놀랍습니다. 임신까지 하고 잘 삽니다. 순녀는 현우라는 중생을 구원한 보살님이었습니다. 이렇게 다리를 잃은 사람과 결혼하기도 하고 지방 작은 섬마을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면서 아이 딸린 홀아비와 함께 살기도 합니다. 

 

순녀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던져서 중생과 함께 깨달음과 극락에 가는 수행자이자 보살이었습니다. 
반면 진성 스님은 주지 스님의 질문에 대답을 찾기 위해서 혼자 토굴에 들어가서 수행을 합니다. 

 

그 질문이란  "왜 달마 스님은 수염이 없을까?"

 

왜? 달마 스님은 수염이 없을까라는 질문이 내포하는 뜻

아제아제 바라아제

스님 중에 가장 유명한 스님은 달마 스님이 아닐까 합니다. 달마 스님의 외모를 보면 수염이 덥수룩하는 걸 보면 서양인 같습니다. 이 달마 스님은 선종을 창시한 인도 승려입니다. 달마 스님은 한국, 중국, 일본 모두에게 유명한 스님입니다. 

 

그런데 보시면 수염이 있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죠. 이 화두는 세상을 이분법으로 보지 말라는 질문입니다. 서양사회가 이분법으로 나눈 세상의 대표 생태계입니다. 있으면 없고 없으면 있습니다. 뭐든 반대를 찾죠. 그런데 세상이 무자르듯이 이거와 저거로 구분할 수 있나요?

 

영화 초반 술병을 든 현우가 개울가에서 빨래하는 비구니들에게 무(無)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지만 누구도 대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순녀만이 이 술꾼에게 대답을 합니다. "없음이란 반드시 있음에 대한 없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이 꽤 있죠. 뭘 좋아한다고 하면 이건 왜 안 좋아하는데라고 묻습니다. 이게 좋으면 저게 안 좋은 게 아닙니다. 그냥 난 이게 좋은 겁니다. 이렇게 흑백 논리와 2분법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이 다양한 대답과 취향과 생각과 구분할 수 없는 것들을 보게 됩니다. 

 

진성 스님은 그걸 보지 못하기 때문에  "달마 스님은 왜 수염이 없을까?"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합니다. 이 질문은 무문관 제 4칙에 나오는 말로 '호자무수, 달마는 수염이 없다'라는 말을 주지 스님이 화두로 순녀와 진성 스님에게 던진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받으면 수염이 있는데 왜 없다고 할까?라는 질문의 굴레에서 벗어 나오지 못합니다. 정답이 있는 줄 알고 수염이 있는데  왜 없다라고 했을까라는 생각에 매몰되게 되죠. 깨달음은 있고 없고라는 질문에서 벗어난 무념무상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하네요. 

아제아제 바라아제

세상은 옳고 그름이 있지만 그 경계는 사람마다 국가마다 다 다를 겁니다. 누군가에게는 영웅 같은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빌런이 될 수 있으니까요. 그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입니다. 오늘도 나만 옳고 다 틀렸다고 사는 사람이나 경험도 안 해 보고 선입견과 편견에 사로 잡혀서 세상을 미리 판단하고 남의 생각에 동조하는 이분법적인 생각으로 사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게 솔직히 편하긴 하죠. 정답이 없는 세상인데 정답을 내주면 아주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그걸 이용하는 사람들이 사기꾼과 사이비 종교인입니다. 보세요. 그들은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정답을 말해 줍니다. 그 말에 홀려서 전재산 탕진하는 사람 숱하게 많습니다. 세상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기에 겸손하고 모르면 모른다라고 하는 그런 사람이 진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광주민주화 운동, 백제, 동학, 87년 민주항쟁이 담겨 있는 영화 <아제아제 바라아제>

아제아제 바라아제

영화 <아제아제 바라아제>는 한승원 작가의 생각이 많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순려가 짝사랑했던 현종 선생님의 아내가 광주에서 임신한 채 사망을 했습니다. 아마도 광주민주화항쟁의 희생자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 현종 선생님은 낙화암에서 백제가 한국 역사 최초로 중국이라는 외세를 끌어 드려서 승리한 더러운 전쟁으로 멸망했다면서 한탄스러워합니다. 

 

또한 동학농민 운동도 전라도와 충청도 일대에서 일어난 운동인데 일제의 기관총에 세상을 뒤집지 못한 것도 한탄스러워하죠. 이걸보면 전라도 지역의 한이 꽤 묻어 나옵니다. 여기에 연출이 아닌 실제 1987년 경의 대학생들의 시위 장면을 담은 장면도 흥미롭습니다. 요즘 한강 작가 노벨문학상 수상에 불편해하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소년이 온다>가 광주민주화항쟁을 다루었다면서 무척 껄끄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런 모습은 1990년대 당시보다 더 처참한 시선입니다. 당시는 온 국민이 끔찍한 과거를 밝혀내고 가해자를 처벌하자는 분위기인데 시간이 지날수록 왜곡된 시선과 가짜뉴스가 더 난무하네요. 

 

흥미로운 건 이런 전라도 출신 현종 선생님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한탄을 지금은 문화체육부 장관이 된 유명한 보수주의자인 유인촌이 연기를 했다는 것이 흥미롭네요. 

 

서로 다른 구도의 길 그러나 그 끝에서 만날 듯하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진성 스님이 토굴에서 3년간 수련한 후 돌아온 후 책을 태우는데 서울에서 만난 기자가 찾아옵니다. 그 기자가 공안에 쫓기고 있다면서 자기를 좀 숨겨 달라고 합니다. 순녀라면 숨겨줬겠지만 외부인과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걸 불경스러워하는 진성 스님으로서는 난감한 부탁입니다. 그런 진성 스님이 변합니다. 이 장면이 너무 인상 깊네요. 

 

소승불교 태도였던 진성 스님이 중생을 구원하는 대승 불교의 태도로 변합니다. 
또 한 장면은 순녀가 그렇게 세상을 돌아다니다 다시 사찰로 찾아와서 주지 스님의 다비식에 참가합니다. 그러나 사찰 스님이나 불교를 믿는 분들이 순녀를 다비식에서 밀어냅니다. 그걸 보면서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저리 못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네요. 참 좋은 영화입니다. 제가 20대였다면 이 영화 추천 못했겠지만 세상풍파를 겪고 경험이 많은 나이에서 바라보니 너무나도 아름다운 영화네요. 로케이션 장인 임권택 감독답게 아름다운 풍광도 참 좋네요. 마지막 장면도 참 곱습니다. 다비식에서 나온 사리를 들고 전국 1천 곳에 탑을 세워서 중생들의 빛이 되겠다는 순녀가 거룩하게만 느껴지네요. 

 

강수연 배우의 연기에 뛰어난 스토리와 연출 특히 진성 스님을 연기한 진영미 배우는 왜 활동을 잠시하고 중단했는지 아쉽기만 하네요. 당시에도 꽤 인지도 높았고 인기가 높았는데요. 이렇게 다시 보니 더 그리운 얼굴이네요. 강수연 배우도 그렇고요. 

 

별점 : ★ ★ ★ ★
40자 평 : 두 사람이 걷는 각기 다른 구도의 길에 뿌려 놓은 종교에 대한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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